# 631
제631장 초호화 라인업
메이나가 겨우겨우 긁어모은 병력은 4~5만가량. 전부 기존 암흑성 소속 병사들이었지만 충격적인 패배로 인해 이미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상태였다. 이런 부대로 암흑성 탈환은 턱도 없는 얘기였다. 아마 폭군 숙영지에서 몰래 가져오는 식량과 보급품이 아니었더라면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폭군 숙영지에서 가져오는 물자에도 한계가 있어요. 이러고 있다가는 언제 발각될지도 모르고요.”
메이나는 임시군영에서 영과 함께 앞일을 의논 중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어요. 더 멀리,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영이 움찔했다.
“천제현이 아직이야.”
“벌써 며칠째인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여기서는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몰라요. 지금처럼 군영 분위기가 어수선하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라고요.”
보아하니 메이나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 인간이 정말 지원군을 불러올 것 같아요? 지상에서 아무리 힘이 있어 봐야 머나먼 네간계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영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너무 억울했다. 아버지를 잃고, 성을 잃고, 급기야 비참하게 도망까지 치란 말인가? 온갖 신기한 일을 척척 해대던 그 인간족이라면 이번에도 뭔가 방법이 있을지 몰랐다.
“시간이 없어요, 당장 출발해야 돼요.”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헛된 기대에 세월 허비하느니 암흑성을 위해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지켜내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가.’
즉각 명령을 하달한 메이나가 막 출발을 외치려던 때였다. 보초병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부성주님, 큰일이에요! 위치가 발각됐습니다. 암흑성 방향에서 대규모 군단이 접근 중이에요!”
메이나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군단이라니 무슨?”
“염마성, 음영성, 흑금성, 암수성. 이렇게 네 개 성의 정예들인데 합치면 10만가량입니다!”
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지휘관은?”
“예, 그게…… 네 도시의 성주들입니다!”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끝이었다.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도망치기에도 너무 늦어 버렸다.
보초병이 소식을 전하기가 무섭게 사방팔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규모 선발부대가 퇴로를 차단한 데 이어 정예 가고일 전사 수천이 공중마저 봉쇄했다.
곧이어 사대 도시의 최정예 본진이 무서운 기세로 밀려들었다.
메이나 휘하의 패잔병 부대는 이미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작전은 고사하고 명령 전달조차 제대로 안 됐다.
“메이나, 뭘 그렇게 놀라지?”
제일 앞쪽에 선 거구의 염마는 다름 아닌 염마성의 성주였다. 사실 기르단은 부성주에 불과했다. 지금 눈앞에 선 상대는 진령 9성 정점, 게다가 그 경지마저도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 정도 고수는 네간계 전역을 통틀어도 몇 되지 않았다.
“원망하려거든 네 어리석음을 원망해라. 패잔병들 따위 기를 쓰고 긁어모아 봐야 판을 뒤집을 기회가 올 것 같은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겨우겨우 끌어모은 패잔병 중에 이미 저들에게 투항한 변절자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위치가 노출된 건 그 때문이었다.
음영성 성주가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로 그 한심한 놈 때문에 이까짓 일에까지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니.”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 낭비하지 마라!”
흑금성의 암흑거인 성주는 성질이 몹시 급했다.
“진격! 놈들을 쓸어 버리자!”
이제 곧 십만 대군이 새카맣게 몰려들 것이다.
아득한 절망감이 메이나와 영을 덮쳐왔다.
성주 네 명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적이거늘, 거기에 정예부대 10만의 포위망까지 더해졌으니 살아나갈 구멍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네 성주가 막 공격을 시작하려던 찰나, 공중에서 예상 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게도 살짝 늦었는데, 그래도 타이밍은 잘 맞춰 온 것 같군요!”
메이나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인간, 인간이 돌아왔다.
‘떠나기 전에 반드시 지원군을 데려오마 철석같이 약속하더니 그 약속은 지킨 건가?’
하지만 공중에 출현한 천제현 옆에는 거구 셋에 보통 체격 하나, 이렇게 네 명의 일행이 전부였다.
메이나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원군은?”
천제현이 손으로 일행을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요.”
절망적이었다.
“네 명, 고작 네 명이 전부야? 백번 양보해서 정말 대단한 고수라고 쳐도 겨우 네 명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적군은 무려 10만 명이라고! 네 명이면 성주들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숫자잖아!”
다섯 불청객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네간 성주들도 잠시 당황했다.
‘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거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한편 혼돈의 숲에서 온 사대 거물은 네간계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땅 위였는데, 눈 떠보니 수천 리 깊이의 지하세계라니.
“어디서 온 쥐새끼 놈들이냐?”
“시끄럽군.”
데스윙이 흡사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네간계 성주들을 쳐다봤다. 파리 같은 놈들이 옆에서 윙윙거리는 게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데스윙이 일행에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
“누가 하겠나?”
썬더가 콧방귀를 뀌었다.
“타이탄의 손은 기적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쓰레기 청소 따위를 시키는 건 모욕이야.”
엘프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지켜보지.”
“이봐요들, 지금 소풍이라도 나온 줄 알아요?”
천제현이 눈을 부릅떴다.
“여기 온 목적이 뭔지 잊으면 곤란합니다!”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상대방의 시큰둥한 말투와 태도만으로도 네간 성주들은 이미 똥바가지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네간계에서는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거드름 피우는 몸이거늘, 언제 이런 멸시를 받아봤겠는가? 진령 9성 정점이면 이미 어디 가서 적수를 찾기 힘든 경지였다. 하물며 이들은 온갖 약재가 넘쳐나는 네간계의 성주, 일반적인 진령급의 두 배가 넘는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때 클로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네 성주에게서 풍기는 살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번거로우니까 그냥 한꺼번에 다 덤벼!”
“네놈이…….”
클로가 슬쩍 흘린 기운 한 가닥에 네 성주가 동시에 몸서리를 쳤다. 3미터짜리 미지의 종족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산과 같은 야수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몹시도 기이한 감각이 그들을 전율케 했다.
클로는 비술로 체구를 줄이는 동시에 기운 역시 가둬두고 있었다. 그 와중에 흘러나온 미세한 힘만으로도 적들을 새파랗게 질리게 했던 것이다.
네 성주는 거의 동시에 확신했다. 상대는 이미 진령 경지를 초월한 절정고수임을.
‘일개 생명체가 이렇게까지 강할 수 있단 말인가?’
네간계 성주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 것은 상대편 일행 다섯 명 중 그나마 만만한 인간족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이 거의 동등한 지위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설마 네 명 모두가 진령 경지를 초월한 고수? 말도 안 돼.’
네간계에 그런 고수가 있었다면 성주들에게 진작 보고가 들어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고작 네 명으로 십만 대군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어떻게든 겁을 줘서 싸움을 무마해 보려고 수를 쓰는 것이다. 맹랑한 작자들이 아닌가. 어차피 전투가 시작되면 밑천이야 저절로 드러날 테지만.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성주 네 명 중 누구도 선뜻 상대에게 덤비지는 못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성주들이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돌격! 돌격하라!”
십만 대군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공격 명령과 함께 성주 넷도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설사 진짜 진령급을 초월한 절대고수라고 쳐도 진령 9성 정점인 적 넷이 동시에 덤빈다면 애를 먹을 것이다. 제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자인들 10만 정예군을 무슨 재주로 당해내겠는가.
인해전술로라도 어떻게든 되겠지.
성주 네 명이 각자 필살기를 시전했다. 용암의 바다를 불러낸 염마는 온몸에 마그마를 두르고 두 발로는 불길이 넘실대는 파도를 밟고 올라선 채였다. 흡사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대마신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영마는 강력한 분신을 열 개도 넘게 만들어냈다. 영마의 분신들은 금세 허공으로 숨어들어 적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적들이 무슨 짓을 벌이든 미동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클로가 돌연 하늘을 향해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크오오!”
허공에 숨었던 영마의 분신들이 강제로 끌려 나오더니 포효에 동반된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모두 피를 쏟으며 이성을 잃고 발광하던 영마의 본체는 결국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골든 베헤모스의 포효가 터져 나오는 동시에 염마의 발밑에서 끓어오르던 마그마 역시 어디론가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수천수만 번의 공격이 한꺼번에 가해지는 듯한 충격에 반원소 상태인 염마의 신체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정신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결과 더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암흑거인과 암흑마수령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그래 봐야 치명상을 입긴 했어도.
한 번의 포효.
단 한 번의 포효가 전부였건만.
진령 9성 정점의 성주 넷 중 하나는 즉사했고 하나는 반병신이 됐으며 나머지 둘도 중상을 입었다. 암흑거인과 암흑마수령은 도저히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비술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위력을 낸단 말인가? 일단 상대가 진령급을 초월한 절정고수임은 확실해졌다. 그것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경지까지 오른.
“어딜 도망치려고?”
골든 베헤모스가 가소롭다는 듯한 조소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암흑거인을 따라잡았다. 베헤모스의 손톱이 한 번 할퀴고 지나가자 10미터에 달하는 암흑거인의 거구가 마치 강철 검으로 수박 쪼개듯 힘없이 쪼개졌다. 심지어 대지에도 수십 미터짜리 상흔이 남았다.
공격은 단 한 번, 상대가 죽었는지 확인조차 없이 클로의 신형이 공중에서 휙 사라졌다. 도망치던 암흑마수령을 어느새 따라잡은 클로가 손톱을 휘두르자 진령 9성 정점 고수의 강인한 육체가 마치 휴짓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성주 네 명 모두 클로를 상대로 한 합조차 버티지 못한 것이다.
천제현 역시 놀랐기는 마찬가지였다. 강한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적군 부대는 단체로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성주님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끝장날 수도 있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