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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629화 (629/729)

# 629

제629장 용성

남궁혜가 쓰던 비밀 전송지점 덕분에 용의 고개까지는 기적성 전송탑에서 단번에 갈 수 있었다.

용의 고개는 광활한 땅을 가로지르는 혼돈의 숲 최대 규모의 산맥이었다. 300여 종에 달하는 희귀 지하자원과 20개가 넘는 도시를 품은 이 산악지대의 유일한 지배자는 바로 강대한 용의 영주였다.

숲에 떠도는 이야기가 아무리 장황해도 용성이 얼마나 압도적인 웅장함을 뽐내는지는 직접 그 앞에 서본 자만이 실감할 수 있었다. 용의 고개 중심부에 자리한 용성은 건축물 대부분이 황금색에, 앞쪽으로는 파랑이 아득한 물을, 뒤쪽으로는 우뚝 치솟은 산을 끼고 있었다.

숲 속 도시들은 보통 넓은 면적에 건물들이 띄엄띄엄 질서 없이 흩어져 있게 마련이지만, 천제현이 마주한 용성은 기적성에 못지않은 규모에 건물들의 밀집도는 인간 도시 저리가라였다.

300m 높이로 곧추 솟은 탑들은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흑요석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만든 것이었다. 탑을 하나씩 차지하고 사는 비룡들은 제일 약한 개체도 무려 진령 9성 정점의 경지였다.

오색찬란한 마력 구름과 숨 막히는 천지의 영기가 용솟음치는 땅.

거대한 면적을 차지한 건물 대부분은 쓸모없는 장식용, 또는 순수한 예술품이었다. 대단한 힘을 지녔다는 전설 속 금속과 보석도 여기에서는 싸구려 벽돌로 쓰일 뿐이었다. 오로지 지배자가 소유한 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보석으로 포장된 도로에 수정석으로 쌓은 담장. 극도로 호화로운 이곳은 흡사 환상 속의 도시를 방불케 했다.

용성 안에서 굳이 가장 비싼 건물을 꼽으라면 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 중앙에 우뚝 선 수정궁일 것이다.

400~500미터 높이에 달하는 수정궁 앞에서 인간은 한 점 먼지에 불과했다. 족히 수십만 명이 살 수 있을 만큼 웅장한 규모만으로도 모자라 이 궁전은 건축자재마저 범상치 않았다. 티 하나 없이 투명해서 아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이면서도, 또 막상 자세히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넘어다볼 수 없는 재질. 황홀한 색을 띤 빛의 띠가 마치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처럼 벽체 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면서도 아름다움과 위엄이 동시에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수정궁은 용의 영주가 사는 거처였다.

거대한 궁전 어느 구석에서 벽돌 하나만 떼어가도 아마 한평생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용의 한도 끝도 없는 자랑질에 이제 천제현조차 살짝 샘이 날 지경이었다.

수정궁 중앙 홀에는 300미터 이상 높이의 벽옥 기둥이 늘어서 있고, 양쪽에는 온갖 진귀한 보석들이 그득했다. 조명 대신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커다란 공간 전체를 찬란하게 밝히는 가운데 천연 수정석을 깎아 만든 왕좌가 우뚝 서 있었다. 이 궁전의 왕좌는 좀 특별했다. 단순한 의자라기에는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고층건물이나 다름없는 크기였다.

왕좌에 나른한 자세로 늘어져 있던 흑룡이 수십 미터 길이의 몸체를 꿈틀하자 주변에 쌓여 있던 보석의 산이 와르르 무너져 마치 홍수처럼 주변을 뒤덮었다.

“랜스로드, 널 부른 기억은 없는데.”

용의 영주가 기다란 목을 빼고는 그 가늘게 찢어진 동공으로 엘프왕 랜스로드를 노려봤다. 불청객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랜스로드가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알다시피 천제현은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협력 파트너라서 말이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안 되거든. 그나저나 썬더와 클로까지 와 있을 줄이야, 이거 참 대단한 우연이군.”

홀연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유명한 그레이트 타이탄 썬더와 악명높은 골든 베헤모스 클로였다. 비술을 이용해 몸집을 줄였어도 무지막지한 위압감만은 숨길 수 없었다.

“엘프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클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특별히 위협적인 동작이 아니었는데도 무형의 압력에 보석산 몇 개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아무리 너라도 오늘 저 인간 버러지의 방패막이는 못 돼준다!”

용의 영주 역시 수정 왕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흑룡의 서슬 퍼런 위엄이 실내에 몰아치자 여기저기서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강도 약한 보석이 절정 고수들이 뿜어내는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면서 내는 파열음이었다.

숨 막히는 힘의 바다가 천제현을 덮쳤다.

구구절절한 말은 불필요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분노만으로도 상황 설명은 충분했다.

“기적성이 용의 고개와 황야고원에 대량살상무기를 팔아넘겨 분쟁을 조장한 덕에 우리 측 피해가 막심하다. 기적성주는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나?”

“말씀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만.”

천제현은 이 상황에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뒷짐을 진 그가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잘 아시다시피 저희는 장사치들입니다. 어디든 무기가 필요한 곳이 바로 기적상회가 있을 곳이죠. 저희는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라 이윤을 낼 뿐입니다. 용의 영주님과 골든 베헤모스 어르신께 의도치 않게 폐를 끼쳤다면 물론 사과드려야지요. 일단 인질부터 풀어주고 얘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데스윙이 낮게 조소했다. 보통 인간은 살짝 귓가에 스치기만 해도 미치광이가 되어버릴 만한 웃음소리였다.

“그까짓 말 한마디로 인질을 돌려받을 생각이라니, 사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어려울 건 또 뭡니까? 사리 분별이라면 충분히 되는 사람들끼리.”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천제현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남궁혜는 제 수하 중 가장 충성스럽고 재능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절 협박하거나 기적성을 흔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에요. 애초에 인질을 죽일 거였으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 빙빙 말 돌릴 것 없이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시죠.”

데스윙과 썬더, 클로가 동시에 움찔했다.

‘간 큰 놈인 줄은 알았지만 우리를 앞에 두고도 이렇게 침착할 정도라니.’

내심 바라는 게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천제현이 너무 대놓고 까발려 버린 탓에 삼대 거물도 다소 민망해져 버린 상황이었다.

엘프왕 랜스로드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영원의 숲과 기적성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맹 관계네. 기적성에 대한 선전포고는 곧 영원의 숲에 대한 도전, 우리 중 누구한테도 좋을 게 없는 일이지. 그러니 이번에는 내 체면을 좀 봐주는 게 어떻겠나.”

“좋아, 엘프왕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용의 영주가 다시 수정왕좌에 몸을 누였다.

“기적성주, 그래서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지?”

천제현의 대답은 명쾌했다.

“말씀하신 지역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겠습니다. 배상할 건 배상하고 사과할 건 사과해야지요.”

삼대 거물이 서로 마주 봤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을 하는 건지?’

‘배상 따위로 입을 싹 닦겠다고? 사과는 받아서 또 어디다 쓰라고.’

돈이 썩어나는 용의 영주는 물론이고 막강한 군대를 거느린 클로 역시 코딱지만 한 배상액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알량한 사과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이번에 남궁혜를 미끼로 천제현을 불러들인 건 엘프족의 눈부신 발전상을 자기들도 따라잡고 싶다는 욕심이 주된 원인이었다.

서로 껄끄러운 사이에 기적성에 다짜고짜 솔직하게 얘기를 꺼낼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삼대 거물이 지금 위치에 오른 건 머리와 안목이 남들보다 뛰어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기적상회의 거침없는 성장세와 함께 각종 불가사의한 과학기술과 제품들이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판에 삼대 거물이라고 어찌 그 막강한 영향력과 잠재력을 간파하지 못했겠는가? 그들도 엘프처럼 기적상회가 축적한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다. 그들도 열 배 백 배로 세력을 키우고 부를 쌓고 싶었다. 어차피 그들만이 아니라 천제현과 혼돈의 숲에도 좋은 일이 아닌가.

사대 거물과 기적성이 힘을 합치면 못 해낼 일이 없으리라.

천제현 혼자였다면 일이 쉬웠겠지만, 설마하니 랜스로드를 대동하고 올 줄이야. 랜스로드야 셋이 힘을 합쳐서 제압한다고 쳐도 기적성에는 전송두루마리라는 물건이 있었다. 랜스로드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천제현은 분명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랜스로드가 시치미를 똑 떼고 있는 천제현을 향해 말했다.

“천제현 성주, 이웃들끼리 응당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나. 이번 기회에 협력에 대해 전격적으로 논의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네만?”

“협력이라고요?”

천제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기적성이 얼마나 잘 나가는데요. 조력자들이라면 이미 차고 넘쳐요. 아무나 마구잡이로 끼워줘 봐야 동맹이 불필요하게 비대해질 뿐이라고요.”

이건 삼대 거물이 내민 손을 그 자리에서 쳐낸 게 아닌가.

썬더의 표정이 구겨졌다.

“인간, 너희 힘만으로 혼돈의 숲에서 얼마나 더 설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지난 몇 달간 우리가 관용을 베풀어주지 않았다면 기적성이 이만큼 클 수 있었을 것 같나?”

“썬더의 말이 옳아. 우리 신분에 너희가 숲에서 하는 소꿉장난까지 일일이 관여할 수는 없지. 이번 무기매매 건도 좀 성가시긴 했지만 사실 큰 문제까지는 아니야.”

용의 영주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기적성이 엘프와 손잡고 벌이는 일들은 숲의 세력 균형을 뒤흔들고 있다. 우리도 더는 두고만 볼 수 없어.”

클로는 한층 직설적이었다.

“전송탑, 공간창고, 통신기술, 무기, 알파브레인, 은행, 공장 등등! 엘프가 가진 건 우리도 가져야겠어. 거절한다면 전쟁이다!”

“아, 그거였어요? 진작 얘기하시지.”

천제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기적성이 지금 가진 자원으로는 엘프족 개혁을 돕는 것만도 힘에 부쳐서요.”

용의 영주가 코웃음을 쳤다.

“용성은 혼돈의 숲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다. 영원의 숲이 내놓은 대가만큼은 우리도 얼마든지 치를 수 있다는 말이다.”

클로와 썬더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빠졌는가 싶던 천제현이 입을 열었다.

“기적상회가 제공하는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싶다면 우선 사소한 부탁부터 하나 들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여기 계신 분들의 능력이라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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