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8
제628장 기적아카데미
기적아카데미의 정식명칭은 기적과학연구아카데미이다.
기적상회의 100% 출자로 기적성에 세워졌으며 기린무도관, 운문, 정신 도서관 등을 망라한 종합대학이었다.
기적아카데미가 설립과 동시에 개설한 전공은 무려 십여 개 이상으로, 크게는 기성학문과 신흥학문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기성학문으로는 무공학, 비술학, 제약학, 무기제조학, 진법학 등이 개설됐다.
한편 신흥학문의 예로는 마력과학, 마력행렬학, 행렬프로그래밍, 마력기계공학, 마력공학 등을 들 수 있었다.
각각의 전공 안에는 수많은 갈래의 세부전공이 존재했다. 예시로 무공학 안에는 검술수련, 신체수련, 마공수련 등이 포함됐고 마력과학은 공간과학, 정신과학 등 힘의 계열에 따라 다시 세분됐다.
1기 모집인원은 고작 2천 명.
그러나 각지에서 몰려든 지원자는 무려 80만 명이 넘었다.
혼돈의 숲 전역, 대하, 대주, 북융은 물론이고 기적상회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먼 나라들에서까지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적아카데미의 탄생은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기적성과 기적상회, 숲과 대륙에서 활약할 전문가들을 배출할 인재의 산실이 문을 연 것이다. 2천 명 정원에 80만 명이 몰렸으니 경쟁률이 얼마였겠는가? 그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실력에 운까지 따라줘야만 했다.
기적아카데미는 일 년에 두 번 신입생을 모집할 예정이었다. 졸업은 정규과정 5년 안에 최소 한 개의 학위를 취득해야 가능했다. 기적성에서 발부하는 졸업증서를 받고 나면 기적상회에 입사하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일하는 걸 택할 수도 있었다.
기적아카데미 졸업생이라면 어디에서 일하든 자기 영역의 최고 전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리라.
오늘이 바로 기적아카데미 개강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각지의 전송탑을 거쳐 합격생들이 속속 기적성으로 모였다. 그중 중주 출신은 40명가량, 중주성 지원자 수만 명 가운데서 고르고 골라 뽑은 인재들이었다.
“우와, 여기가 기적성인가?”
“우리가 기적성에 오다니!”
“세상에, 진짜 크고 멋있어.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중주에서 온 학생들은 연령대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전반적인 학술수준은 대주국이나 하프엘프, 엘프족에 비해 많이 떨어지지만, 중주는 누가 뭐래도 기적상회의 고향이었다. 거기에 일찍부터 첨단 마력기술을 접해 봤다는 점까지 감안해 기적성은 특별히 중주에서만 40명이 넘는 대인원을 선발했다.
중주 입학생들 사이에는 앳된 얼굴의 남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땅바닥에 뽀뽀라도 할 기세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임범, 임선 남매였다.
이 남매의 성장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작은 나라 작은 도시에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끈기와 신념만은 남달랐던 남매. 지칠 줄 모르는 학구열로 공화련의 눈에 든 덕에 기린무도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고, 나중에는 운문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까지 했다.
임선 남매는 한 달 전 공화련이 기적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공고를 내자마자 곧장 원서를 넣었다.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탄탄한 마력과학기술 지식 덕분에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나란히 합격할 수 있었다.
기적성.
기적상회의 총본부.
남매는 오는 내내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의 심정이었다.
운문에서 잠시 일하는 동안에도 말단 연구원이었던 두 남매는 일부 기초 프로젝트에밖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니 모아둔 돈이 넉넉할 리 없었다. 말단 연구원 월급으로는 백 년을 벌어도 학비 마련은 턱도 없었다.
사실 학비가 비싼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적아카데미는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이 투입된 기관이었다. 기적상회에서 일급기밀로 분류되는 기술 상당수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었으니 학비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일부 특수지식을 배우려면 거기에 추가비용까지 더 부담해야 했다.
뒤에서 든든하게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어찌 감당이 될지 몰라도, 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대다수 학생들로서는 눈앞이 캄캄할 일이었다. 그래서 기적은행이 준비한 것이 바로 학자금대출 서비스였다. 대출받은 금액은 재학 중에 각종 프로젝트에 참여해 상환하거나 졸업 후 기적상회에 취업해 천천히 갚아나갈 수도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기적아카데미는 자유로운 학문의 장인 동시에 비싸고 고생스러운 학교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곳에 모인 학생들 앞에는 무한한 기회가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엘프들을 본 임선이 잔뜩 들뜬 얼굴로 남동생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 저기 봐, 엘프야!”
온갖 종족이 뒤섞인 기적성의 광경은 남매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교복을 입은 엘프 여학생들이 두 사람을 보고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여기 공부하러 온 학생들인가요? 우리는 은월숲에서 왔고 전공은 기계학이에요. 이쪽은 영원의 숲 출신이고 행렬 언어 프로그래밍을 배우러 왔대요. 두 사람은요?”
“우리는 대하국 중주성에 있는 운문연구소에서 왔어요.”
임범은 아리따운 엘프들 앞이 쑥스러운 기색이었다.
“마력과학을 공부하려고요.”
엘프 하나가 깜짝 놀랐다.
“와아, 운문 소속이라고요?”
옆에 있던 엘프도 눈빛이 달라졌다.
“대단한 곳이라고 들었어요. 마력행렬 슈퍼컴퓨터를 발명한 게 바로 운문이잖아요. 행렬 언어를 배워서 슈퍼컴퓨터용 운영체제를 만드는 게 내 꿈인데.”
임선과 임범은 내심 민망했다. 운문 소속은 맞지만 두 사람은 말단 연구원에 불과했으니까.
“우리 앞으로 친구 해요. 같이 열심히 공부해 보자고요!”
엘프들의 사근사근한 태도에 임선 남매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안에도 각지에서 입학생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십여 개 이상 종족이 뒤섞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엘프, 하프엘프, 인간이었다.
1기 신입생 중 무려 절반이 엘프들이었다. 엘프족 최고의 엘리트들이 새 시대, 새 기술을 품을 선구자가 되고자 모여든 것이다. 엘프족 내부에서도 일족의 운명을 바꿀 이들을 주목하고 있었기에 랜스로드와 일부 의원들, 성주들 역시 개강식에 참석했다.
“천제현님과 공화련님이셔!”
숭배해 마지않는 우상을 다시 만난 순간, 임선 남매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천제현이 남긴 족적을 따라 여기까지 온 두 사람이 아니던가?
최근 천맹은 몸집을 점점 더 불리고 있었고, 임선 남매는 학교에서도 천맹을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천맹은 이미 개인에 대한 숭배를 넘어서 하나의 이념이자 신앙이었다.
교복으로 복장을 통일한 입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서자 드디어 개강식이 시작됐다.
공화련이 직접 단상에 올라 연설문을 읽었다. 형식적인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연설의 주된 내용은 학칙 및 기적아카데미에 거는 기대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는 핵심 인사 발표가 이어졌다.
총장에는 천제현.
부총장에는 박학다식한 드루이드 선지자 요더와 하프엘프 대장로 클라크가 임명됐다. 엘프왕 랜스로드는 명예총장에 이름을 올렸다. 엘프족에 대한 존중을 나타낸 인사였다.
이로써 기적아카데미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개강식이 끝난 후 천제현이 막 랜스로드에게 네간계 이야기를 꺼내려던 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어떡해, 남궁혜 언니가 용의 고개에서 데스윙한테 붙잡혀갔어.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고!”
공서련이 허겁지겁 천제현을 찾아온 것이다.
“남궁혜 언니를 용성에 가두고 나서 데스윙이 기적성에 사자를 보냈어. 당장 용성으로 오지 않으면 남궁혜 언니를 죽이겠대, 어쩌면 좋아!”
천제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남궁혜는 황야고원과 용의 고개에서 줄곧 저항세력들에게 무기를 팔아왔다. 덕분에 용의 영주와 마수왕은 그간 꽤나 머리가 아팠으리라.
원래부터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두루마리를 넉넉히 챙겨서 보내기는 했지만, 데스윙이 직접 나섰다면 두루마리를 꺼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적성의 위상도 이제 예전과는 달라졌잖아. 우리한테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알 테니 잡아가긴 했어도 함부로 해치진 못할 거야.”
공화련이 천제현에게 말했다.
“네간계 일도 있으니 용성에는 내가 혼자 다녀오는 게…….”
천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흑성 쪽이 급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남궁혜부터 구해내는 게 먼저였다. 데스윙은 영원의 숲에 정면으로 맞설 정도의 세력을 이끄는 자였다. 남궁혜가 데스윙의 손에서 무사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남궁혜는 공화련 부성주와는 다르네. 사실 대체 불가능한 존재는 아니지. 죽여 봐야 기적성에 근본적인 타격은 못 줄 테고, 공연히 원한만 사게 될 거야.”
랜스로드가 걸어오며 한 말에 천제현이 눈썹을 꿈틀했다.
“엘프왕께서는 무슨 말씀을…….”
“내가 아는 데스윙은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인사가 아니네. 자네를 용성으로 불러들일 미끼가 필요했던 것뿐이겠지.”
랜스로드가 말했다.
“나도 함께 가겠네.”
“네?”
천제현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용성에 함께 가신다고요? 영원의 숲과 용의 고개는 오랜 세월 반목해온 사이가 아닙니까!”
“세상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지.”
엘프왕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도 갈등과 싸움이라면 이제 진력이 나네. 얼마나 좋은 세상이 왔는데 고작 혼돈의 숲을 놓고 서로 물어뜯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번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하네. 알력 싸움은 그만 관두자고 말이야.”
‘그래. 엘프왕이 함께라면 한결 안심이지.’
용성, 혼돈의 숲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도시. 천제현은 용성의 부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