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7
제627장 커다란 변화
기적성과 엘프들의 관계는 밀월기에 접어들면서 한층 더 긴밀해졌고 기적상회의 활약에 힘입어 과거에는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대변혁이 현실이 되었다.
엘프의회는 이렇다 할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공동체인 엘프 사회에서 다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거니와 선조들이 남긴 율법을 거스르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상회를 설립하고 공장을 짓는 과정 전부가 숲 안에서 이뤄졌다. 상품은 기적쇼핑몰에서 판매하거나 아니면 아예 기적성에 납품했다. 직접 물건을 짊어지고 대륙을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바깥세상과 거리를 두라는 엘프들의 은거 원칙과도 딱 들어맞는 셈이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무한한 기회로 충만했다.
엘프들은 유능했다. 보유한 자원 역시 어마어마했다. 딱 한 가지, 재주 많은 놈이 밥 굶는다고 선택지는 너무 많은데 그걸 한꺼번에 다 키울 수는 없는 게 문제였다. 지금은 가장 잠재력이 큰 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할 시기였다.
엘프왕 랜스로드는 전략적인 안목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기적상회와 기적성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핵심사업 한 가지와 집중 육성영역 두 가지를 선정했다.
핵심사업은 이미 탄탄한 기반이 닦인 금융이었다.
엘프은행은 앞으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할 단체였다. 부족 내부는 물론이고 이제 엘프 거주지역 바깥 숲 속 도시 수십 곳과 지하성까지 은행업무가 확대되고 있었다. 엘프들의 강력한 세력과 확실한 신용이 뒷받침된 덕에 혼돈의 숲 어디를 가나 사업이 술술 풀렸다.
집중 육성영역에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포함시켰다.
소프트웨어란 운영체제 생산, 하드웨어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생산을 가리켰다.
영원의 숲은 지속적으로 기적성에 인력을 보내 행렬 언어 프로그래밍을 익히게 했고 이제 엘프 시스템개발상회는 이 분야에서 기적성의 뒤를 바로 잇는 유력 사업체로 성장했다. 그런가 하면 향후 각종 기기에 쓰일 칩을 생산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 공장 건립에 나선 엘프 도시들도 있었다. 행렬 컴퓨터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세력은 기적상회를 제외하면 이들이 유일했다.
이 두 가지 사업영역에 들어간 대출액만 해도 이미 마석 십만 개 규모가 넘었다.
랜스로드의 야심과 추진력에는 천제현도 놀랐을 정도였다.
엘프들 사이에서는 민간창업 열기 또한 대단했다. 대부분이 음반이나 영화를 제작하는 업체였는데, 음악은 디스켓에 담겨 각지로 팔려나갔고 우수한 영화 작품은 기적상회 극장체인을 통해 관객들을 만났다.
이 과정에서 엘프들이 얻은 건 단순한 부(富)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광범위한 종족들이 엘프의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었다. 대외무역 역시 점점 더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엘프가 생산한 찻잎과 예술품은 이미 각국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러한 상품들은 이제 상류층의 품격과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물 그 자체로 자리 잡았다.
하루하루 거대한 변화와 철저한 개혁이 이어졌다.
엘프족 대부흥의 싹은 이미 움텄다.
기적상회 발전에 지대하게 기여했다는 점을 감안해 공화련은 심지어 상회 핵심기술 일부를 엘프들에게 이전하기까지 했다. 그 대신 시스템과 행렬 개발을 포함한 모든 엘프 공장에 기적상회 임원들이 주주로 참여함으로써 수익을 공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서련이 에어바이클을 타고 기적성을 한 바퀴 돌며 천제현에게 그간의 변화를 보여줬다.
산업, 생활, 여가, 상업지구가 질서정연하게 구분된 기적성은 잘 정돈된 계획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공화련 주도의 주민등록시스템 역시 구축을 마쳤다.
거주민 신원정보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데이터베이스화한 덕에 외부인이 유입될 시 단번에 파악이 가능해졌다.
방어시스템도 완성됐다. 기본적인 방어결계 외에도 성 주변 산지에 원거리 타격을 위한 미사일 발사대 500개를 설치하기로 했고, 여타 신식무기 역시 속속 일선에 투입되고 있었다.
기적성 중심부의 고대 생명수는 이미 300m 높이로 자라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었다. 고대 생명수의 힘이 깨어남에 따라 기적성은 더욱더 풍요로운 땅으로 거듭났다. 물론 고대 생명수가 안겨준 선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나리우스는 고대 생명수와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 이 엔트 지도자 또한 나날이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엔트 경비대와 엘프왕 랜스로드라는 굳건한 동맹까지, 제아무리 데스윙이라 해도 함부로 기적성에 덤비진 못할 것이다.
기적성의 자체병력 또한 거듭 규모를 확대해나가는 중이었다. 2세대 장비가 광범위하게 보급됐고 전함과 기갑 연구도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이제 기적성은 혼돈의 숲에서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성안을 가볍게 둘러본 천제현은 성주 접견실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공화련과 마주했다. 공무로 바빴을 텐데도 공화련은 마력이 훌쩍 상승해 있었다. 공화련 공서련 자매는 둘 다 벌써 진령 3성 정점이었다. 기적성이 워낙 자원이 풍부한 곳인 데다가 엘프들까지 틈만 나면 선약을 비롯한 선물을 갖다 바치니 이런 환경에서라면 아무리 재능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마력이 쑥쑥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혼돈의 숲에서 공화련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공화련의 숭배자를 자처하는 데는 오만한 엘프족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고지상의 권력을 가진 엘프왕마저도 그녀에게는 유독 정중했다. 공화련은 기적상회와 기적성을 이끄는 실질적 지도자, 그녀가 내놓은 방침 하나 말 한마디면 숲 전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화련 개인은 처음 천제현을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단정한 흰옷에 눈부신 미모, 겸손한 태도까지 여전했다. 그 군더더기 없이 다듬어진 고귀함 앞에서는 누구라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오래 성을 비웠던 터였다. 공화련한테 한소리 들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천제현이 과장된 말투로 선수를 쳤다.
“와, 진짜 큰아가씨가 챙겨준 진원단 너무 잘 썼어요. 이번에 세우고 온 공의 절반은 큰아가씨 덕이라니까요! 다 먹어 버렸는데 만약을 대비해 몇백 알 더 만들어줄래요?”
“다 써 버렸다고? 그거 만드는 데 재료가 얼마나 들어가는 줄이나 알아?”
“기적상회에 차고 넘치는 게 마석인데 뭐가 걱정이에요.”
공화련이 잔뜩 화난 얼굴로 천제현을 째려봤다.
“그간 어디서 뭐 하고 다녔는지나 해명하지 그래? 최소 수백 번은 넘게 연락을 시도했다고!”
“맞아!”
공서련까지 살벌하게 추궁하고 나섰다.
“엘프족에 파견 나간 내내 아무리 전화해도 안 받더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늘은 꼭 대답을 들어야겠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너무 나무라지 말아요. 어쩌다 보니 여기서 땅속으로 수천 리 아래에 있는 네간계에 갔었거든요. 기존 통신기술로는 두꺼운 암반층을 못 뚫으니 연락이 안 될 수밖에요.”
두 자매는 듣고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지하 수천 리 아래? 말도 안 돼.”
“자, 자,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라니까요.”
천제현이 네간계에서 겪은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천제현의 기묘한 모험은 공서련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 발밑에 거대한 세계가 있고 거기서 수없이 많은 지하종족이 살아가고 있다고? 진짜 신기하다!”
천제현이 없는 말을 지어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공화련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땅 밑에 그런 세상이 있다니, 기적성이 위험할 수도 있어!”
“큰아가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난번에 서련이랑 습격당했던 일, 단서를 잡았거든.”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기는 어려울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기어이 단서를 찾아낸 걸 보면 공화련은 바쁜 와중에도 조사에 막대한 마력을 쏟았던 것이다. 그만큼 신경이 쓰였다는 뜻이리라.
“일단 황야고원, 타이탄산맥, 용의 고개가 배후는 아닌 것 같아.”
“그쪽이 아니면요?”
“개인적으로는 지하 곤충령이 가장 의심스러워. 기적상회와 여러 번 충돌했던 거미여왕의 부하들이 아닐까.”
가쿠계 짓이라고?
공화련이 말을 이었다.
“거미여왕이 이끄는 곤충령들은 지상세계에 관심이 많아. 혼돈의 숲이 무질서해야 곤충령들이 비집고 들어올 기회도 생길 텐데, 우리의 출현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그렇다면 일부러 다크엘프와 마수령을 고용해 용의 고개나 황야고원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이들 거대 세력 사이에 분란을 조장하려는 음모인지도 몰랐다. 어지간해서야 누구도 곤충령은 의심하지 않을 테니 머리를 잘 쓴 셈이었다.
애꿎은 데스윙과 클로만 억울하게 된 게 아닌가?
현재 기적상회에서 생산되는 무기의 대부분이 그들의 영역으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물론 주요 구매자는 그들의 적군이었다. 아마 지금도 충분히 고생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천제현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거나 할 일은 전혀 아니었다. 습격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위험요소였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린 천제현이 말했다.
“네간계는 우리한테 정말 중요한 곳이에요. 네간계를 장악하면 심연의 문이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는 거니까요. 나중에 심연으로 진출하려면 기반을 잘 닦아놔야죠.”
공서련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심연까지 진출한다고? 나가도 너무 나갔잖아.’
공서련도 그간 천제현을 따라다니면서 배운 게 많았기에 심연세계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은 갖고 있었다. 아직 대륙 제패도 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심연세계를 넘보다니. 대체 어디서 나오는 배짱인지.
공화련은 네간계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 눈치였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라면 지표에서는 구하기 힘든 자원도 아마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네간은 전략적 가치가 막대한 땅이었다.
“무기고라면 가득 차 있어. 네간계 도시 하나쯤은 문제없을 거야.”
“아뇨,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천제현이 암흑성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번 일은 우리 힘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요. 엘프왕 랜스로드의 도움을 받았으면 해요.”
공화련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랜스로드와 기적성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밀접했다. 천제현이 부탁한다면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나무엘프와 다크엘프가 껄끄러운, 아니 거의 적대적인 사이라는 점이었다. 랜스로드가 나섰다가 괜한 마찰만 더 생기는 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잴 때가 아니었다.
“기적성에 얼마 전에 기적아카데미가 설립됐어. 마침 개강식을 준비 중이고.”
공화련이 천제현에게 넌지시 말했다.
“엘프왕도 주목하고 있는 사안이야. 초대장을 보낼 예정이니까 그날 만나서 얘길 꺼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