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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625화 (625/729)

# 625

제625장 심연의 문

촉수괴물의 위력은 정말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랜스로드 같은 최강 고수조차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유적 설계자가 신전 수호수로 삼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긴 촉수에 꽁꽁 감긴 천제현은 체내의 마력이 둑 무너진 강물처럼 미친 듯이 빠르게 유실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기도, 빛도 없는 곳.

심연에는 강력한 암흑과 죽음, 악마의 힘이 가득 차 있었다.

‘괴물의 몸 안에 이런 곳이 있다니.’

촉수괴물의 능력은 새끼 여우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둘 모두 체내에 공간이 있어 수많은 물체와 힘을 담을 수 있다는 게 그랬다. 촉수괴물의 체내 공간은 신전의 면적과 비교해도 작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생명체든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암흑 마력에 부식 당해 놈의 간식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살아날 확률은 0%에 가깝다고 보는 게 좋았다.

천제현은 마력이 모두 빨려 빈껍데기 같은 상태였다.

제 아무리 고강한 술사라도 마력을 쓸 수 없다면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이 괴물은 모든 술사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바로 놈의 체내로 들어가면 절대로 살아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감히 이 천제현 나으리를 건드려? 네 재주가 아무리 신통하다 해도 오늘은 황천길을 걷게 될 것이다!’

현재 천제현은 마력을 조금도 운용할 수 없었지만, 그의 무기가 마력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체내의 기령과 유명이 있었고 현성급의 강력한 신식도 있었다. 그 힘들은 마력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쾅!

청백색 화염이 천제현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심연의 녹색화염을 삼킨 유명화의 강도는 전보다 두 배는 강해진 듯했다. 유명화는 주변에 가득한 암흑마력을 연료로 삼아 순식간에 열 배 넘게 커졌다. 이 속도대로라면 얼마 안 가 괴물의 배가 유명화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촉수괴물은 천제현의 저항을 느꼈는지 체내에서 새로운 마력을 응축시켰다. 그러자 칠흑처럼 새까만 액체가 주변을 가득 채우며 유명화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정말 지독한 놈이네.”

그러나 천제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유명이 있었고, 신식으로 주변을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열여덟 신혈강시들이 다시 그의 통제권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신혈강시들은 열여덟 개의 등불에 불을 붙인 것 같기도 했고 어둠을 밝히는 열여덟 개의 태양 같기도 했다.

유명화가 신혈강시들 주변을 돌며 그들을 묶고 있던 촉수들을 태워 버린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된 신혈강시들은 황금빛을 발했다. 그리고 끝 모를 어둠을 가로지르는 열여덟 개의 유성처럼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암흑 마력으로 가득한 괴물의 체내를 밝혔다.

휙휙!

광명이 어둠을 파괴하고 있었다.

신혈강시들의 체내에 있는 신령의 힘이었다. 유명화와 힘겨루기 중인 암흑 마력은 사실 촉수괴물의 근원인 악마의 힘이다. 신령의 힘은 악마의 힘과 상극이기에 열여덟 신혈강시는 순식간에 유명화조차 태우지 못한 암흑 마력을 90% 가까이 없애 버렸다.

콰과광.

유명화의 불길이 이번에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어둠을 휩쓸었다. 촉수괴물 체내의 모든 공간이 유명화에 의해 타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화로가 불가사의한 힘을 발산하며 타오르는 것 같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메이나는 천제현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새끼 여우가 소환한 지옥화염을 조종하며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메이나가 상황 파악이 안 돼 멍하니 있을 때였다.

갑자기 괴물의 촉수가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오그라들었다. 제단 안쪽에서 묵직하고 거대한 소리와 압력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철옹성 같던 제단 안쪽에서 수많은 균열이 나타났다. 각각의 균열에서 눈을 찌르는 것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굉음이 울려 퍼지고, 제단이 산산조각 나면서 무너졌다.

폭발의 정중앙에서 태양이라도 탄생한 것처럼 청백색 화염이 빠르게 팽창하며 신전의 모든 걸 불태우고 있었다. 100여 개의 신상들이 모래성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거대한 폭발 마력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건물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일 각 가까이 계속되던 마력 폭풍이 마침내 천천히 흩어지고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메이나의 눈에 폐허로 변한 신전이 들어왔다. 반경 십여 리 안에 있는 지형들도 파괴로 인해 종전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무시무시한 화염이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그녀가 있는 곳을 불태웠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이윽고 불바다로 변한 공간에서 천제현과 열여덟 신혈강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을 본 새끼 여우는 잽싸게 천제현의 앞으로 달려가 작은 입은 한껏 벌리고는 성안 조각들을 촤라라 토해냈다.

신상이 파괴될 때 성안 조각을 모아놓은 것이다. 덕분에 이 진귀한 보물은 마력 폭풍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잘했다!”

천제현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마디 했다.

“흠,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잘 듣지? 네가 이런 녀석이 아닌데?”

성안은 귀하디귀한 보물이다. 그런 것을 여우가 욕심 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동자를 굴렸다. 천제현은 바로 뭔가 꿍꿍이가 있음을 알아채고 녀석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과 애완동물이 서로 눈을 가늘게 뜨고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이채로웠다.

천제현이 번개처럼 몸을 돌려 폐허로 다가가려 하는 순간, 새끼 여우가 한 발 앞서 폐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몇 분이 지났을까, 폐허 속에서 몸을 드러낸 녀석의 입에 팔각형 모양의 검은색 수정핵이 물려 있었다. 촉수괴물이 남긴 것 같았다.

천제현은 깜짝 놀라서 황급하게 소리쳤다.

“맙소사! 안 돼, 먹지 마! 일단 좀 보여 줘!”

그러나 새끼 여우는 아랑곳 않고 그것을 꿀꺽 삼켜 버렸다.

촉수괴물이 어떤 놈이던가? 새끼 여우가 성안을 탐내지 않은 건 그게 눈에 안 찼기 때문이었다.

촉수괴물의 내핵을 삼켜 버린 녀석은 바로 소화시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팽창하더니 거대한 여우요괴의 형태로 변했다. 엉덩이 뒤쪽으로 네 번째 꼬리가 자라난 것이 보였다. 네 번째 꼬리는 종전의 세 개보다 작았지만, 형태만큼은 거의 완벽했다.

어쩌면 새끼 여우는 고대의 구미호요괴일지도 모른다.

구미호요괴의 능력은 꼬리 개수에 달려 있다. 꼬리가 많을수록 힘도 강해진다는 의미다. 꼬리 네 개가 생긴 새끼 여우는 진령 술사도 두려워할 힘을 지니게 된 셈이다.

‘저 녀석이.’

천제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거, 포기하는 수밖에.”

그는 촉수괴물이 죽는 순간 체내 공간에서 수많은 보물들이 빠져 나온 걸 보았다. 현재 폐허 안쪽은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했다.

슥 훑어봐도 각종 고대의 무기며 재료 등 없는 게 없어 보였다.

천제현은 폐허의 한 귀퉁이에서 십여 개의 거대한 흑란을 발견했다. 촉수괴물의 알이 분명했다. 보통 괴물이 아니었으니 놈의 알도 최상품 재료이리라. 어쩌면 촉수괴물과 같은 무시무시한 생명체를 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제현이 다른 보물들을 찾으려고 준비하던 차였다.

대지가 다시 한 번 흔들리면서 제단이 있던 위치에 거대한 균열 몇 개가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지표면이 움푹 파이며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그 구덩이는 점점 더 커지더니 지름이 500미터 가까이 넓어졌다.

메이나가 소리쳤다.

“엄청난 마력 파동이야!”

천제현도 강렬한 힘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수천만 년 동안 억눌려 있던 화산이 한 번에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일단 피합시다. 가요!”

천제현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메이나와 혼절한 영을 데리고 백여 리 밖으로 이동했다. 한숨 돌린 그들이 원래 있던 자리를 보자 맹렬한 마력 파동이 하늘을 뚫고 치솟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예리한 검이 천공의 거대한 결계에 꽂힌 듯한 모습이었다.

악마의 문 주변 지역 전부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악마의 문의 강력한 결계도 마력 파동에 타격을 입고 화산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진동했다. 초대형 지진 현장에라도 온 것 같은 장면이었다.

악마의 무덤 신전을 만든 이유는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전이 무너졌으니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구덩이에 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메이나가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게 악마의 무덤이겠지? 이 정도의 살기가 나올 곳은 악마의 무덤밖에 없으니까!”

악마의 문의 결계와 악마의 무덤의 살기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결계는 강력한 타격으로 왜곡되고 변형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포처럼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형상이었다.

두 기운은 그렇게 일 각 가까이 대치했다. 그리고 마침내 악마의 무덤의 살기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결계의 색깔은 자홍색이었는데, 살기와 부딪힌 이후 연홍색으로 변해 있었고, 결계 자체의 힘도 훨씬 약해졌다.

그렇게 또 일각이 지났을까. 악마의 무덤에서 터져 나온 기운이 악마의 문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천제현과 메이나는 사악하고 차가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심연, 심연의 기운이에요!”

천제현이 멀리 악마의 무덤의 거대한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제 추측이 맞았군요. 네간계 아래 심연의 문이 있었어요!”

메이나는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물었다.

“뭐라고? 심연?”

심연세계야말로 악마의 진정한 기원지이다. 네간의 각종 악마들도 그 근원을 파고들어 보면 모두 심연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심연세계를 통해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온 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심연 악마족과 차이가 생겼을 뿐이다.

지옥화염과 촉수괴물도 심연악마였다.

심연악마 중 지성을 지닌 종족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심연악마들은 돌연변이와 변종이 수시로 나타나므로 무리를 이루는 놈들이 거의 없었다.

천제현이 설명했다.

“사실 네간계가 만들어진 것도 아래 있는 심연의 문 때문이에요. 심연의 문은 ‘차원의 문’이라고도 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끝없이 거대하고 몹시 안정적인 차원의 통로라 할 수 있죠. 그 통로를 통하면 심연 세계로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차원의 개념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모호하고 낯선 것이었다.

“같은 이치로, 심연세계에서 차원의 통로를 찾으면 그 통로를 이용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죠.”

여기까지 말한 천제현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제 생각인데, 네간계의 악마의 문도 사실은 거대한 진법인 것 같아요. 심연세계로 통하는 통로를 봉인하는 게 목적이겠죠. 다른 차원에서 오는 습격과 위험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거예요.”

“그 말은, 악마의 문이 사실은 하나의 통로고 다른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악마의 문은 사실 당신들 악마족이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문이라고요.”

여기까지 말한 천제현은 잠깐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심연은 또 다른 세상이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심연 안에 있는 독립적인 차원에 살았으니까요. 이런 차원 세계는 심연 안에 수없이 많이 존재해요. 다만, 생명체가 사는 차원은 극소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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