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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622화 (622/729)

# 622

제622장 동부의 왕

전력이 반 토막 났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들의 전투력은 천제현 일행을 한참 웃도는 것을.

누가 죽고 누가 살지는 이미 정해진 일이다.

기르단은 그렇게 생각했다. 쌍방의 실력 차가 겉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지금 그가 가장 죽이고 싶은 상대는 메이나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인간이었다. 저 인간족이 난데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간단히 끝날 임무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각 성이 입은 손실은 둘째치더라도 엄청난 모욕을 당한 일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기르단이 지면을 향해 힘을 방출하자 염마의 힘이 폭발했다.

천제현은 거대한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화염의 파도가 스치고 지나간 곳에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균열이 생겼고, 균열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용암이 이글거렸다. 삽시간에 반경 수천 미터가 전투 지대로 변해 버렸다.

최고위 염마는 최적의 전투 환경을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게다가 악마의 문 주변은 화산 지맥이 흐르므로 이런 지형을 만드는 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주변 지형을 자신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만들었으니, 기르단의 전투력이 대폭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의 화신!”

조로의 형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한 번 흔들릴 때마다 잔영이 하나씩 만들어졌는데, 그 잔영은 조로와 똑같이 생긴 분신으로 화했다. 말 그대로 진짜 분신이었다.

기령 유명을 개조해서 만든 천제현의 유명 분신과는 본질부터 다른 진정한 분신.

조로의 분신은 실재하는 그의 육신에서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에 모든 움직임에 통일성이 있었고 능력치 또한 본체와 거의 흡사했다. 분신술은 영마족 특유의 능력이었으므로 다른 종족들은 익힐 수 없었다.

“그림자 분열!”

“죽음의 그림자!”

고수들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옥화염악마에게 볼품없이 당하기는 했지만,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그들은 천제현 일행을 일망타진하겠다며 이를 갈았다.

그때, 기르단의 몸이 쇠파이프를 박아 넣은 양 용암이 흐르는 지반의 틈을 뚫고 들어갔다. 동시에 흔들거리던 몸이 천천히 대지에 고정되었다. 그는 천제현을 보며 말했다.

“인간이여. 어떤 이유로든 암흑성을 따라서는 미래가 없다. 딱 한 번의 기회를 주마. 염마의 종이 되어라. 그렇게만 한다면 어떤 잘못도 묻지 않고 살려주마.”

천제현이 실소를 터뜨렸다.

“미안하게 됐군. 난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말이야. 개똥처럼 생긴 너희들과는 같이 있기가 좀 그래!”

“화를 자초하는구나!”

기르단이 옆에 있는 조로에게 말했다.

“가서 저놈을 죽여라!”

그러자 힘을 모으고 있던 조로와 영마 고수들, 십여 개의 분신까지 한꺼번에 천제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새끼 여우는 주인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뛰어오르며 입안에서 나무인형 하나를 꺼냈다. 이윽고 하늘에서 우렁찬 새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화염을 품은 구름이 상공을 뒤덮었다. 조로는 그 괴이한 장면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움츠렸다. 화염 구름 안쪽에서 강력한 마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끼이익!”

봉황의 울음소리와 함께 화염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염조의 이글거리는 몸이 구름을 뚫고 나타난 순간, 공포스러운 기운이 주변을 뒤덮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영마 고수들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새끼 여우의 명령을 받은 화염조가 번개처럼 날아오며 입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금홍색 화염을 뿜기 시작했다. 새가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화염에 뒤덮였다. 작열하는 화염은 순식간에 조로의 그림자 분신을 하나씩 해치웠고, 악마 고수 몇몇도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호신 마력이고 뭐고, 제대로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저게 대체 무슨 무공이지? 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애완동물 같은 게 이렇게 강력한 흉수를 조종할 줄이야.’

기르단은 또 한 번 천제현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화염조의 공격을 피한 조로는 바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조로 님,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는데요.”

메이나가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이대로 도망가시는 건가요?”

그녀의 말과 함께 강력한 정신 마력이 조로의 몸을 뒤덮었다.

메이나의 환술에 당한 조로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지금이다.

기회를 잡은 영이 화살을 날렸다.

“너희가…….”

조로는 고개를 숙여 화살이 관통된 가슴팍을 보았다. 그의 어스름한 형체가 더욱 흐릿해졌다.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 중상을 당하고 어떻게…….”

메이나도, 영도, 악마의 문 앞에서 모두 중상을 당했는데.

그중에서도 메이나의 상처는 조로가 직접 만든 걸작이었다. 조로는 그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메이나의 능력을 감안하면 목숨을 구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걸로도 모자라 원래대로 힘을 회복했다고?’

조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몇 초 후, 화염조가 다시 한 번 반격하면서 거대한 화염이 조로의 몸을 뒤덮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악마들도 하나씩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죽었다.

모조리.

엄청난 실력 차이였다. 손쉽게 해치울 거라고 상대를 우습게 본 조로였는데 상대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째서 염마 기르단은 죽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염마’였기 때문이다. 불 속성 공격에 면역력을 갖고 있는 그는 화염조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악마였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

천제현이 기르단을 보며 말했다.

“염마성을 버리고 나의 종이 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꿈 깨라!”

염마 기르단의 몸이 붉은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더니 갈라진 지면의 틈 사이로 들어가 용암과 일체가 되었다. 이 무공이 있는 한 기르단은 죽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산과 강, 그리고 용암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런 나를 어떻게 죽이겠다는 것이냐?”

대지 깊은 곳에서 기르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염마에게 화염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다. 염마의 힘을 더욱 증폭시켜줄 뿐!”

“그래?”

냉소를 날리는 천제현의 손바닥에서 연꽃과도 같은 불꽃이 일었다.

“내가 보기엔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천제현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연꽃처럼 생긴 화염이 그의 발아래 지면으로 파고 들어갔다. 지면 틈에서 청백색 화염이 균열을 따라 퍼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마치 기름이 고인 구덩이에 화르륵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청백색 화염은 순식간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지면 틈을 채웠다.

이제 지면은 청백색으로 이뤄진 오묘한 진법처럼 보였다.

“헉, 안 돼!”

기르단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대지를 뚫고 울려 퍼졌다.

“이게 대체 무슨 불이지? 그, 그럴 리가 없어. 염마는 불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

유명화의 불길이 점점 거세지며 모든 용암을 불태웠고, 수천 미터 반경의 지면 균열에서 청백색 화염이 솟구쳤다. 기르단은 용암과 일체가 되면 불사의 몸이 될 거라 여겼지만, 사실 그 무공은 제 발로 묏자리를 찾아 누운 것과 다르지 않았다.

“너희에게는 기회도, 희망도 없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기르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로운 동부의 왕이 나타났다. 암흑성은 동부의 왕이 만든 네간 왕성! 무슨 수를 써도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동부의 왕을 거역하다니. 너희의 결말은 나보다 수천 배 더 괴로울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불 속성 마력에 면역을 지닌 염마가 화염 속에서 죽어가다니. 이보다 더 모순적인 일이 있을까.

“동부의 왕?”

메이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진짜 동부의 왕이 나타난 걸까?”

천제현이 답답한 듯 물었다.

“동부의 왕이 뭔데요?”

“네간계의 동부 지역은 각 세력들이 힘의 균형을 이뤄 여태까지 큰 전쟁이 없었어. 그런데도 그곳 사람들은 강력하고 지혜로운 지도자를 원했지. 기르단이 말한 동부의 왕이란 동부를 다스릴 자격을 갖춘 통치자를 의미해. 그런 자가 나타났다면 그 실력은 이미 진령 경지를 초월했을 거야!”

“진령 경지를 초월했다고?”

그 정도 실력자라면 충분히 전쟁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에 간다 할지라도 최고의 고수로 대접 받을 테지. 동부에 그런 고수가 나타났다고?

만약 그렇다면 여러 개의 도시가 연합해서 암흑성을 공격한 것도 설명이 된다.

그 말은 곧 암흑성이 다시 한 번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메이나와 영의 심각한 표정을 본 천제현은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별로 심각한 문제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 거래를 하나 하죠! 제가 두 분을 도와 암흑성을 수복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단, 모든 일이 끝난 후 암흑성의 반을 저에게 주시는 겁니다.”

“허풍도 심하군.”

메이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혼자서 무슨 수로 천군만마를 상대하겠다는 거지? 수없이 많은 고수들은 어떻게 하고? 게다가 암흑성의 반을 달라니, 도둑도 이런 도둑이 없군. 상황을 몰라도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그러나 천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두 분 말처럼 지금 두 분의 힘으로 성을 되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미친 셈치고 저를 한번 믿어보는 것도 나쁠 건 없잖아요?”

메이나와 영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나빠져 봤자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를 믿어본들 손해 볼 건 또 무어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속을 했다 치자. 무슨 수로 성을 되찾아 주겠다는 거지?”

“1단계는 악마의 무덤에 들어가는 거예요.”

메이나는 별 미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천제현을 바라보았다.

“악마의 무덤은 위험천만한 곳이야. 그곳에 들어가면 열이면 열, 살아서는 못 돌아온다고!”

천제현이 대꾸했다.

“암흑성을 되찾으려면 반드시 그곳에 들어가야 해요. 악마의 무덤 위쪽 신전에 성안이 있는 걸 봤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들을 손에 넣어야 돼요.”

지금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네간 성에 악마대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천제현이 그들 둘은 데리고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계속 아래로 이동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쩌면 다른 방도가 생길지도 모르고.

“그럼 가죠!”

말을 던진 천제현은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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