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3
제613장 메이나
급히 폭군 숙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천제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꼼짝 마!”
손에 활을 쥔 암흑성 병사 수만 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화살 끝은 모두 천제현을 조준했다.
‘망할. 이게 뭐야.’
암흑성에서 병사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 규모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폭군 숙영지는 분명 크게 동요할 것이다. 악마족과 암흑족에게는 아무런 충성심도 없다. 이럴 때에 암흑성에서 투항 조건을 내놓는다면 집단으로 모반을 꾀할 것이다. 어쩌면 천제현에게 보고할 때 일부로 암흑성 병사들의 규모를 속였을 수도 있다. 천제현이 덫에 걸리게 되면 양쪽 사이에서 선택하거나 전투를 치러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군.’
암흑성에서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보냈으니 전투가 벌어지면 승산이 없었다.
천제현은 암흑성 병사들에게 잡혀 폭군 숙영지로 끌려오면서 수많은 암흑족 정예병들 사이에서 두목과 마주쳤다.
“네가 폭군 숙영지의 새로운 수령이냐?”
키가 2미터가량에 등에 넓은 날개가 달려 있고 머리에 구불구불한 긴 뿔이 난 악마가 보라색 눈동자로 천제현을 훑어봤다.
“네간 놈도 아닌 게 감히 여기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흑마였다.
흑마의 정식명칭은 암흑마로 악마족에서 수가 가장 많으며 제일 흔한 종족이다. 이들은 심연세계에서 탄생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네간으로 이주했다. 흑마는 네간계에서 가장 강하고 방대한 세력일 것이다.
천제현은 흑마를 앞에 두고 태연자약하게 웃었다.
“긴장하지 마. 누가 됐건 폭군 숙영지를 관리해야 하잖아? 내가 폭군 숙영지를 통치하는 게 암흑성에도 더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흥, 암흑성은 규칙을 어기는 놈을 용납하지 않는다! 게다가 넌 과거가 의심스러워. 우리는 널 외부에서 온 첩자라고 의심하고 있다!”
흑마가 거칠게 일어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포박해라. 놈을 암흑성으로 끌고 간다!”
고수 십여 명이 천제현을 포위했다.
“잠깐! 암흑성에 가자는 거 아니야?”
천제현이 손을 저었다.
“내 발로 갈 테니 포박할 필요 없어.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폭군 숙영지를 건드리지 마.”
흑마가 차갑게 웃었다.
“네가 조건을 걸 주제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천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흑마를 쳐다봤다. 신식의 힘이 몸을 훑자 흑마의 정신이 요동쳤다. 흑마는 천제현의 마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그를 없애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님을 느꼈다.
이 외부에서 온 종족은 몇 겹의 포위를 뚫을 수 없을 테지만 완강하게 저항한다면 사상자가 꽤 나올 것이다. 이번에 온 주요 목적은 천제현을 암흑성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니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이 영지를 누가 통치하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다. 가자!”
이번에 천제현이 이렇게 고분고분한 것은 성격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오합지졸이라면 몇 명이라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간의 정규 군단과 맞붙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천제현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도망치면 폭군 숙영지의 종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며칠 동안 쏟았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꼴 아닌가?
그럴 바에야 암흑성으로 가서 상황을 보는 게 나았다.
천제현은 자신의 말솜씨와 설득력을 믿었다. 구미에 당기는 조건을 건다면 암흑성을 설득할 수도 있다.
인내심이 없으면 큰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법이다. 일단 놈들을 따라가자.
암흑성은 폭군 숙영지에서 2백 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성은 놀랍게도 거대한 암흑화산 안에 건설되었다. 암흑화산은 어둠의 마력이 강했다. 암흑물질이 섞인 것인지 용암은 매우 괴상한 흑자색이었다.
화산활동이 활발한 활화산이지만 암흑원소가 화산의 힘을 빨아들여 폭발이 억제되고 있었다. 이 흑자색 용암은 전혀 뜨거워 보이지 않지만 일반 용암보다 훨씬 많은 힘을 지니고 있다. 암흑성의 장인들은 이 활화산을 기반으로 성을 지키는 결계를 구축했다.
악마족들은 천제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따라서 천제현이 압송된 지 몇 시간 후에 바로 흑자색 용암이 떠다니는 호수 가운데 있는 악마궁전에 끌려갔다.
“들어가!”
악마족은 사악하지만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종족이다. 천제현은 네간의 풍취가 가득한 대전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대전 위를 향했다. 성주의 보좌가 비어 있는 것을 보니 성주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천제현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부성주 자리에 있는 악마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부성주 자리에는 인간과 외모가 거의 비슷한 악마족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회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머리 양쪽에는 뿔이 앙증맞게 솟았다. 피부는 눈처럼 희고 매끄러우며 입술은 요염하고 검붉은 눈동자는 매혹적이었다. 여인은 거의 헐벗은 상태였다. 풍만한 가슴 절반이 드러나 있었고 삼각 모양의 짧은 바지는 육감적인 둔부를 감추기에 역부족이었다. 몸의 3분의 2가량 되는 길고 쭉 뻗은 다리에 긴 장화를 신고 아주 나른한 자세로 재미있다는 듯이 보좌에 앉아 있었다.
‘서큐버스?’
보기 드문 고급 악마 종족이다.
“인간?”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음성이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누구라도 가슴이 간질거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땅에서 사는 인간이 네간에는 어쩐 일로 왔지?”
드디어 인간을 아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이제 천제현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면 인간이 네간처럼 곳곳에 화산이 깔리고 악마족과 암흑족, 사악한 물질들이 넘쳐나며 유황 냄새로 가득한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네간은 인간족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인간족은 네간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탐험가일 뿐입니다. 네간으로 갈 수 있는 지도를 얻게 되어 호기심으로 와본 것이니 경계할 필요 없어요.”
“탐험가라고?”
서큐버스가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도 무척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피처럼 새빨간 혀를 내밀고 입술을 핥았다.
“전에 나한테 거짓말을 했던 놈은 가죽이 벗겨진 채로 암흑의 화염에서 수십 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천제현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믿든 안 믿든 난 세상을 떠도는 탐험가일 뿐입니다. 암흑성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 존재죠. 내게는 당신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술이 있습니다. 우리가 협력한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제현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서큐버스의 검붉은 눈동자에서 분출된 강력한 힘이 천제현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매우 강력한 신식 통제술이었다. 그녀의 신식은 현성급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종족의 천부적인 특성으로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었다.
서큐버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진령 8~9성은 되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네간에 속한 성의 부성주가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실력으로 매혹술을 펼친다면 진령급에서는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
상대가 누구든 매혹술에 걸리면 서큐버스에게 조종당하게 되어 불구덩이 속에도 주저 없이 몸을 날린다. 그러니 사실을 털어놓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번에 서큐버스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위력을 발휘하던 매혹술이 천제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서큐버스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메이나, 그만해,”
젊은 다크엘프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천제현은 이 다크엘프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여기에서 이 녀석을 또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다크엘프는 천제현이 가쿠에서 구해 준 바로 그 녀석이었다.
메이나라는 이름의 서큐버스가 젊은 다크엘프를 보며 물었다.
“영 도련님이셨군요. 아는 사람인가요?”
다크엘프가 대답했다.
“이 자는 지상 세계의 성주라고 하더군. 바로 이자가 가쿠의 니크론성에서 날 구해주었지. 그 덕분에 가쿠에서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네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진짜 정체가 뭔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첩자는 아닌 것 같아.”
천제현은 다크엘프의 나이와 실력으로 그가 네간에서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챘다. 그러나 이 다크엘프가 암흑성 성주의 아들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첩자가 아니라고요? 그건 상관없어요. 최근 저놈이 하급 악마들을 부추겨 규칙을 깨고 제멋대로 굴었어요. 그것만으로도 저놈을 그냥 둘 수 없어요.”
서큐버스는 온화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인정사정없었다.
“게다가 우리 쪽 아이들을 속였으니 죽여야 해요.”
이 계집애는 어렸을 때 인간에게 크게 당해서 마음이 삐뚤어진 게 분명해.
천제현이 해명을 하려는데 영이 먼저 선수 쳤다.
“메이나, 네가 이끄는 악마족은 암흑성의 중요한 세력이야. 그러나 암흑성을 통치하는 건 다크엘프족이야. 암흑성을 도운 인간을 네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어.”
메이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말해 보세요. 저 사람이 암흑성에 무슨 도움을 주었죠?”
“이 자는 만만치 않은 실력자인 데다 여러 능력을 가지고 있어. 네간에서는 모두 매우 희귀한 능력이지!”
영은 여기에서 말을 잠시 멈췄다.
“악마의 문의 유적이 곧 열리니 이런 인재를 탐험에 참가시켜야 해. 한 명이라도 많이 참가하면 아버님의 병을 치료할 가능성이 더 커지잖아.”
“저 인간을 유적 쟁탈전에 참가시키려고요?”
메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거죠? 각 성에서 악마의 문 유적 탐험에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는데 저 외부인에게 그 기회를 주겠다니요!”
영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인간 덕분에 네간의 수많은 백성이 재난을 면했어. 네간과 암흑성에 세운 공으로 봤을 때 이 자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있어! 게다가 이자가 참가해야 승산이 더 커진다고. 아버님의 상처가 심각해서 시간이 별로 없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상품의 3급 선약을 찾아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