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6
제606장 천하무적 인간족
천제현은 정신 속성 성약을 생으로 삼킨 후 운기조식을 위한 의식 한 가닥만을 살려둔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몸속 유명화를 이용해 약재의 정수를 흡수한 결과 정신력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모든 과정이 느리지만 순조롭게 이뤄졌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마력 역시 한 단계 더 상승을 꾀할 수 있게 됐다.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천제현은 정신력 회복에 힘쓰는 한편 새로 생겨난 마력의 가닥들을 거대한 줄기로 합치는 데에도 집중했다.
쿠구궁!
드디어 정신력이 완벽히 복구되는 동시에 마력도 진령 4성 정점 경지에 올랐다. 이제 진령 5성도 코앞이었다.
“으앗!”
“깨어났다!”
“깨어났어!”
천제현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나비악마들은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기겁을 한 나비악마들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밀실을 뛰쳐나갔다.
천제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우, 나와 봐!”
뿅!
검은색 안개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나타난 새끼 여우가 냉큼 천제현의 어깨에 올라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이채로운 건축 양식이 눈에 들어왔다. 네간 토착민들의 거처인 모양이었다.
“여기 어디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새끼 여우가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천제현에게 빠짐없이 알려줬다.
“하, 내 인생에 이렇게 인기가 많아 보기는 또 처음이군.”
네간 종족들이 자기를 두고 싸움이 붙었다는 말에 천제현은 황당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역시 미남은 어딜 가나 인기 폭발이었다.
본격적인 자아도취는 시작도 하기 전이건만.
어디선가 날개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비악마 백여 마리가 주변을 에워싼 것이었다. 형형색색 나비악마들의 우두머리는 피부가 눈처럼 새하얀 개체였다. 상당히 이국적인 미모, 인간의 눈에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흰색 나비악마가 잔뜩 당황해서는 외쳤다.
“대체…… 어떻게 깨어난 거지?!”
나비악마들이 쓰는 언어는 곤충령 어족도 엘프 어족도 아닌 악마어에 속했다. 네간계 생명체 대부분이 악마어를 쓰는 듯했다. 현재 지상세계에는 이 언어를 접해 본 사람이 거의 없지만, 미래에는 널리 알려지게 된다. 나비악마들이 쓰는 말은 악마 어족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종류였다. 과거 악마들이 남긴 자료를 연구해 본 적이 있는 천제현은 당연히 기본적인 악마어쯤이야 구사할 줄 알았다.
“뭘 그리 놀라요?”
천제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돌봐줘서 고마워. 보답으로 알려주자면, 난 땅 위에서 온 인간족이야. 저 위쪽 세상에는 인간이 팔백억 명도 넘게 살지. 인간이 그렇게 좋다면야, 나중에 몇백 명 잡아다가 선물로 줄게. 그럼,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뭐?’
‘이런 생명체가 팔백억?’
나비악마들이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이 됐다.
네간계의 지적 생명체를 전부 다 합쳐도 그 숫자가 안 나오건만.
“못 가. 뿔악마와 그린고블린, 그리고 가고일까지 몰려와서 밖을 포위했어.”
흰색 나비악마가 뱀 모양의 검을 빼 들어 천제현을 겨눴다.
“우리 재산이 남의 손에 들어가는 꼴을 볼 수야 없지. 놈을 잡아!”
나비악마의 공격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이들은 정신계열 정령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태생적으로 마력을 정신물질로 전환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나비 날개가 크게 한 번 펄럭이자 가루 형태의 정신물질이 순식간에 주변을 자욱하게 채웠다.
이 가루에는 강력한 최면과 매혹 등 정신능력이 깃들어 있어 어지간한 생명체들은 맥을 못 추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나비악마가 동시에 나섰으니 아마 진령급 고수라 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이런 장난은 나한테 안 통하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기묘한 생명체는 아무런 방어조치도 없이 나비악마들의 공격 한복판에 서 있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천제현의 무심한 눈빛이 흰색 나비악마를 향했다.
정신차단.
흰색 나비악마의 몸이 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의식과 마력 사이의 연결이 끊겼다는 게 느껴졌다. 몸 안의 마력은 그대로이건만 힘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담담하게 한 발 앞으로 움직이는가 싶던 천제현이 어느새 공간을 가로질러 흰색 나비악마의 등 뒤에 나타나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천제현의 손가락 끝에는 유명화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날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공간, 공간 재능!”
나비악마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흰색 나비악마는 벌써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지금 그녀가 가장 두려운 건 이 생명체가 발산하는 화염이었다. 직접 위력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불티 하나만 튀어도 상대를 잿가루조차 안 남기고 태워 버릴 수 있는 화염. 그런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손에 붙잡혀서도 지금 자신이 무사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입신의 경지에 이른 그의 제어능력 덕분이리라.
‘강하다. 무서울 정도로!’
나비악마 촌장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달았다.
상대는 공간 재능의 소유자, 그녀를 죽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저 생명체가 여기를 떠나겠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비악마 촌장이 미처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협곡 밖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촌장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제길, 또 공격이야.”
“고작 하급 악마 몇몇 주제에?”
주위를 둘러본 천제현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잠깐 따라와!”
흰색 나비악마는 좋다 싫다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천제현의 손에 이끌려 나무협곡 밖으로 이동해 있었다. 나무협곡에서는 만 명에 이르는 전사들이 한창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 한복판에 천제현이 나비악마 촌장까지 끌고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으니, 다들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모두 조용!”
천제현의 첫마디에 전장 전체의 움직임이 멈췄다.
“네간계 종족들이 얼마나 친절한지야 이미 잘 알았으니까 그냥 편하게 얘기할게.”
흰색 나비악마를 놔준 천제현이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마치 친구한테 인사라도 하는 듯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일단 다들 축하해.”
뿔악마 우두머리가 콧구멍에서 불을 뿜었다.
“뭐가 어째?”
천제현이 유들유들 능글맞은 투로 말했다.
“용맹하고 유능한 절세 영웅을 지배자로 맞이하게 된 거 축하한다고. 그래, 바로 나 말이야. 복종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험한 꼴 보고 싶지 않거든 멍청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천제현의 맹랑한 말에 네간계 하급 악마 만 명이 정지화면처럼 굳어 버렸다.
실성한 듯한 폭소가 터져 나온 건 십 초가 훨씬 넘게 지나서였다. 다들 유머감각 없는 네간계에 살아서 그런지 웃으라고 한 소리가 아님에도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젖히고 있었다.
만 명이 넘는 악마 떼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지배자 자리를 운운하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코미디가 어디 있겠는가?
가고일 우두머리의 인내심이 제일 먼저 바닥났다.
“가라, 놈을 붙잡아!”
가고일들의 비행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천 마리가 넘는 가고일들이 전광석화처럼 천제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모습을 본 나비악마들이 저지에 나서려 했으나 촌장이 그들을 막아섰다.
“일단 지켜봐.”
제아무리 마력이 대단해 봐야 어차피 진령 경지. 하급 악마들의 실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천 마리가 넘는 숫자는 한낱 진령술사가 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화령술사가 오더라도 체력 소모로 인해 고전하리라.
천제현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정신폭발.’
현성급 신식으로 반경 수백 미터를 덮은 뒤 정신마력을 단번에 폭발시키자 순간적으로 엄청난 정신충격파가 생성됐다. 정신폭발로 인한 충격파에 휩쓸린 가고일들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동시에 마치 소나기처럼 후두두 지상으로 추락했다.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괴생명체는 분명 꼼짝도 안 했건만, 그 많은 가고일들이 일순간에 의식을 잃었다.
천제현의 공격을 감지한 건 정신마력에 민감한 나비악마들 뿐이었다. 나비악마 부족 전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혼자서 이토록 무시무시한 정신공격을 가할 수 있다니,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정신공격은 일대일 상황에서 시전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맹렬한 광역 공격을 퍼붓는 경우는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흰색 나비악마에게 썼던 정신차단도, 방금 시전한 정신폭발도. 실은 모두 데빌앤트왕에게서 배운 기술이었다.
정신차단은 살상 없이 상대를 제압하기에 아주 유용한 비술이었다. 신식 고수만 아니라면 어떤 술사든 순식간에 무장해제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게 이 기술이었다. 특히 상대의 신식이 심등조차 못 되는 경우에는 마력과 무공이 제아무리 대단하고 쓸 수 있는 비술이 제아무리 많아도 어린애 팔목 비트는 것만큼이나 쉽게 제압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정신폭발은 어떨까? 정신폭발은 마력 소모가 큰 만큼 효과 역시 월등한 정신비술이었다. 데빌앤트가 했던 것처럼 대량의 정신마력을 모아서 단번에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는 건데, 파동이 퍼져나가는 범위와 한꺼번에 처리 가능한 적의 수 모두 다른 정신비술은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정신폭발에도 제약은 있었다.
이 비술은 신식과 마력이 시전자보다 한참 못한 수준인 적에게 사용해야 비로소 최상의 효과가 나왔다. 한꺼번에 다수의 적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 있으므로 대규모 전투에서 유용한 기술이기도 했다.
“잠깐 기절했을 뿐 죽지는 않았으니까 걱정 말라고.”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고일들 한복판에 선 천제현의 모습은 소름 그 자체였다.
“이번에는 가벼운 벌로 끝냈지만, 또 건방지게 굴면 그때는 자비 따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디 한 번 해보시지!”
뿔악마 우두머리가 포효했다.
“한꺼번에 덤빈다! 놈을 생포해!”
뿔악마와 그린고블린도 공격에 동참했다. 사방에서 원거리 공격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모든 공격이 제자리에 꼼짝도 안 하고 서 있는 괴생명체를 허무하게 관통해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괴생명체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굳이 폭력을 쓰게 만들어야겠어?”
천제현이 다시금 강력한 신식을 방출했다. 이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술이었다.
“심화!”
“으아아악!”
“불, 불이다!”
천제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런데 뿔악마가 됐든 그린고블린이 됐든 그의 주변 반경 30m 안에만 접근하면 저절로 몸에 불이 붙었다. 무시무시한 청백색 화염은 희생자를 재조차 남기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
한 놈, 두 놈, 열 놈, 수십 놈.
뿔악마와 그린고블린들은 괴생명체에게 달려드는 족족 불나방 같은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괴물, 저건 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