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5
제605장 전쟁유발자
네간계는 질서도 문명도 없는 혼란의 세계였다. 왕국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이곳에서는 모든 종족이 몇 개 안 되는 대도시 주변에 흩어져 살았다. 혼돈의 숲과 비슷한 구석도 있는 셈이었다. 사는 형편이 이렇다 보니 네간계의 토착민들은 야만인이나 다름없었다.
전해지는 학술자료의 양이 워낙 적은데다가 그 안에서 땅 위에 대한 언급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 탓에 네간 토착민 대부분은 지상세계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종족 역시 알 리가 없었다.
암흑 땅의 엘프 두목은 흉악하게 생긴 애꾸눈이었다. 거래가 진전될 기미가 안 보이자 두목의 인내심이 결국 한계에 달했다.
“칼 가져와, 일단 잘라보게!”
암흑 땅의 엘프들은 네간계에서 가장 수완 좋은 상인이자 창의력 넘치는 발명가였다. 이들이 네간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여러 유적지와 악마의 문 안쪽 폐허에서 발굴해낸 신비로운 고대기술과 악마연금술 덕분이었다.
땅의 엘프는 투철한 탐구정신으로 무장한 종족이었고, 미지의 생명체를 마주한 이 순간 역시 특유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려 했다.
“정체를 모르겠다고? 그럼 썰어보면 되지!”
나비악마들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흰색 젊은 나비악마가 땅의 엘프들을 막아섰다.
“아직 사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대뜸 칼부터 대겠다니, 상품가치만 떨어지잖아!”
“견본을 떠서 연금술실로 보내야 무슨 능력이 있는지, 살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분석이 될 거 아니야!”
암흑 땅의 엘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견적을 내? 팔기 싫어?”
“팔지, 팔아, 물론 팔고말고!”
나비악마 장로 하나가 얼른 뛰어나와서 흰색 나비악마를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촌장님, 안 팔고 마을에 데리고 있어 봐야 쓸데도 없지 않습니까. 그냥 잘라보라고 두세요.”
애초에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냉큼 주워온 건 물론 마을에 필요한 물자와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팔지 못하면 저건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흰색 나비악마 촌장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질질 끌지 말고, 일단 손가락 하나만 잘라봐.”
암흑 땅의 엘프 두목이 명령했다.
“보아하니 꽤 강한 놈인 것 같은데, 슬슬 썰면 잘 안 잘릴 수도 있으니까 힘줘서 단칼에 끝내.”
“예!”
허리춤에서 오금칼을 뽑아 든 땅의 엘프가 괴생명체에게 다가갔다.
엘프의 손에 들린 칼은 금속 같기도 하고 옥돌 같기도 한 재질에, 새카만 바탕 위로 은은한 황금빛 광택이 돌았다. 칼의 재질은 오금다이아라고 불리는 네간계 물질로, 일반 다이아몬드의 열 배에 달하는 강도에 약간의 파괴속성까지 지니고 있어 병기 제조 과정에서 소량만 섞어도 강철을 진흙처럼 썰어 버리는 보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전체가 오금다이아로 된 칼은 위력이 어느 정도이겠는가?
새끼 여우는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남의 일 보듯 태연히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새까만 눈망울을 의뭉스럽게 굴리면서.
손가락 하나를 고른 암흑 땅의 엘프가 칼을 높게 들었다가 곧장 아래로 내리쳤다.
쾅!
오금칼이 유리처럼 박살 나면서 자잘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예리한 오금다이아 조각이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엘프의 사지를 사정없이 관통했다. 운이 나빴던 땅의 엘프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숨이 끊기고 말았다.
“맙소사!”
지켜보던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오금칼이 어떤 무기이던가?
그런데 생채기 하나 나기는커녕 되려 칼이 가루가 되다니.
낯선 생명체의 신체능력은 용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나비악마들도, 땅의 엘프들도, 그게 방어무공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강력한 무공과 호신마력이라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네간 촌뜨기들이 뭘 알겠는가? 성광불멸체가 신기 경지에 이르면 의식의 개입은 굳이 필요가 없게 된다. 신체 부위에 위험이 감지되는 순간 불멸체의 방어기제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오금칼이 산산이 조각난 건 그 순간 천제현의 몸을 감싼 엷은 성광층과 충돌한 탓이었다.
나비악마들은 당황한 와중에도 내심 흐뭇한 기색이었다.
‘보물을 주웠구나! 보물단지를 주웠어!’
오금다이아보다도 단단한 몸뚱이라면 같은 무게의 오금다이아보다 비싸면 비쌌지 쌀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오금다이아 가격을 기준으로 거래가 성사된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부를 손에 쥘 수 있다.
“이건 예상 밖이군?”
땅의 엘프 두목이 악마연금술 주문이 빽빽하게 새겨진 칼을 뽑아 들었다.
“흥, 그래도 이 마료도는 못 당할 거다!”
땅의 엘프 두목이 두 손으로 칼을 받쳐 들고 뭔가 중얼거리자 칼 표면의 주문이 번쩍하고 빛나면서 강렬한 마력파를 뿜어냈다. 마료도가 괴생명체의 팔뚝을 향해 쐐기처럼 날아드는 순간.
성광불멸체가 다시금 발동됐다.
엷은 성광이 칼날과 충돌을 일으켰다.
암흑 땅의 엘프 두목은 용의 비늘을 내리친 듯한 감각을 맛봐야 했다. 무시무시한 반동으로 인해 손목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번 공격 역시 천제현의 방어막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뿐인가, 무모한 칼질은 아까보다도 더 충격적인 후폭풍을 불러왔다.
천제현의 몸에서 돌연 불길이 치솟은 것이다!
만물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불길이!
“제길!”
땅의 엘프 두목은 황급히 물러났지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은 두목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유명화에 그저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마치 휘발유에 불똥이 튄 것처럼 화염이 순식간에 땅의 엘프를 집어삼켰다. 땅의 엘프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재 한 줌조차 남지 않았다.
‘불까지 뿜는 생명체라니?’
불티 한 점만으로도 땅의 엘프를 흔적조차 없이 태워 버리는 화염을 여기서 누가 구경이나 해봤겠는가?
저건 절대 평범한 불꽃이 아니었다. 불꽃의 힘만 보여줘도 어딜 가든 부르는 게 값일 것이다.
의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방어도 모자라 반격까지 가할 수 있는 생명체는 결코 흔치 않았다. 아마 거룡에 맞먹을 만큼 강대한 종족이리라.
“암흑수정 천 개!”
암흑 땅의 엘프 두목이 가격을 불렀다.
“이 생명체는 내가 가져가겠다!”
암흑수정 천 개면 나비악마 마을로서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거액이었다!
나비악마들이 감격을 주체 못 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
나비악마 촌장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대단한 능력을 지닌 생명체야. 암흑수정 천 개는 너무 적어!”
“주제도 모르고 흥정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암흑수정 천 개면 후하게 쳐준 값이다.”
“안 돼, 그 가격에는 못 팔아.”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팔백 개로 줄여야겠군!”
암흑 땅의 엘프가 흰색 나비악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잘 생각해서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말 한마디에 암흑수정 이백 개가 날아갔다.
쓰라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흰색 나비악마는 굽히지 않았다.
“이 물건은 안 팔 거니까 돌아가!”
나머지 나비악마들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촌장님 제정신 맞아?’
“내가 부하를 몇 명이나 잃었는데 이제 와서 안 판다니!”
암흑 땅의 엘프 두목이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누구 놀려? 땅의 엘프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흥, 천 개고 팔백 개고 무슨 거지새끼 동전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 나비악마들이 힘센 종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날로 먹으려 들면 곤란하지!”
흰색 나비악마가 쏘아붙였다.
“오늘 본 손해는 우리가 배상하겠어. 하지만 물건은 못 파니까 그만 여기서 나가.”
암흑 땅의 엘프가 폭발하기 직전.
흰색 나비악마의 코웃음을 신호로 나머지 나비악마들이 암흑 땅의 엘프 두목 주위를 에워쌌다.
네간계 토착민들은 혼돈의 살육전을 뚫고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보잘것없는 나비악마들이라 해도 한없이 나약하지만은 않았다.
“오냐, 어디 두고 보자!”
암흑 땅의 엘프가 애써 화를 삭였다. 나비악마들의 소굴에서 성질대로 깽판을 쳐봐야 결국 손해 보는 건 자신이었다. 일단 조용히 빠져나간 뒤 부하들을 소집해 일거에 마을을 치는 편이 현명했다. 진귀한 생명체는 그때 가서 손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땅의 엘프가 떠난 뒤, 나비악마 장로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땅의 엘프는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세력이 상당한 놈들인데, 원한을 사서 좋을 게 없어요.”
“걱정하지 마.”
흰색 나비악마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엄청난 보물을 주운 거라고. 땅의 엘프들이 돌아오기 전에 암흑성으로 옮겨서 경매에 내보내면 돼. 그러면 우리 마을은 부자가 되는 거야!”
“정말 그렇게나 진귀한 생물일까요?”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아까 칼 튕겨내는 거 봤잖아. 거기다가 온갖 특수능력까지, 거의 뭐 용이나 대악마 급이라고 봐야지. 살아 있는 용이 경매에 나오면 얼마에 낙찰되겠어? 이 작은 마을 하나 부자로 만들어주는 거야 일도 아니지.”
“하긴, 값만 제대로 받으면 아예 다 같이 암흑성으로 이주하면 그만이겠네요. 그러면 암흑 땅의 엘프도 무서울 게 없죠.”
나비악마들은 걱정 따위는 내려놓기로 했다.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아닌가.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흰색 나비악마가 즉시 준비에 돌입했다. 인구 몇천 명밖에 안 되는 마을에서 무려 천 명을 뽑아 호위대를 꾸렸다. 암흑 땅의 엘프가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출발해야만 했다.
비행능력이 있는 나비악마들은 땅이 아닌 하늘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중간에 방해꾼을 만날 확률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준비를 마친 대열이 막 나무협곡을 떠나려던 때였다.
“큰일이에요!”
“동쪽에 그린고블린들이 나타났어요.”
흉측하게 생긴 생명체들이 무리를 지어 마을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2m에 달하는 거구에 초록색 피부, 흡사 고블린의 강화 버전처럼 생겼으나 기다란 악마 꼬리가 달렸다는 점이 일반 고블린과는 달랐다. 놈들이 손에 든 무기는 대부분 낭아봉이나 쇠망치였다.
그린고블린은 하급 악마의 일종이었다.
악마 혈통이 많이 섞이진 않았으나 개체 수가 워낙 많고, 타고난 괴력에 믿을 수 없는 맷집까지 자랑했다. 놈들은 포악하고 잔인한 암흑종족이었다.
흰색 나비악마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영역 침범이야! 여긴 우리 나비악마들 구역이라고!”
“흐흐흐, 까칠하기는. 나비악마들이 대단한 보배를 주웠다지?”
선두에 선 그린고블린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숲에 떨어진 보배는 숲에 사는 종족 모두의 것 아니겠나. 나비악마들끼리 상의도 없이 꿀꺽해서야 되겠어? 그러지 말고 다 같이 나누자고.”
나비악마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런데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옳은 말씀!”
가까운 산비탈에 검은색 긴 줄이 생기는가 싶더니 우람한 그림자 수백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등장한 생명체는 얼핏 미노타우로스를 닮았으나, 그보다는 더 추한 얼굴에 이마에는 뿔까지 나 있었다. 다름 아닌 뿔악마들이었다.
이번에는 나비악마만이 아니라 그린고블린까지 얼굴색이 변했다.
그린고블린 우두머리가 으르렁거렸다.
“여기는 왜 나타났지?”
“하하하.”
뿔악마가 뻔뻔하게 되물었다.
“왜일 것 같은데?”
그린고블린과 뿔악마가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하늘에 검은 먹구름 같은 비행체들이 출현했다. 깃털 없이 민둥민둥한 날개에 뾰족한 주둥이, 가고일이었다.
이쯤 되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야 뻔했다.
암흑 땅의 엘프가 주변 부족들을 부추겨 싸움을 붙인 것이다. 자기가 무리를 끌고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괘씸한 놈들이었다.
네간계 토착민들은 영역 문제에 극히 민감했다. 영역 침범은 용서할 수 없는 도발이자 모욕이었다.
나비악마들이 발끈했음은 물론이었다.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디 누가 끝까지 살아남는지 한번 붙어보자고!”
거대한 전장의 서막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여기서는 무엇이든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었다. 매일같이 싸움이 끊이지 않는, 혼돈의 숲보다도 더 혼란한 땅. 네간은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