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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604화 (604/729)

# 604

제604장 진귀한 생명체

아마 용암층이 몇 백 미터만 더 두꺼웠어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천만 다행히도 천제현은 마력이 완전히 소진되기 직전 불의 바다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천둥새 같은 숯덩이 신세는 면했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하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콰앙!

강력한 충격파에 숲 절반이 날아가는 동시에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천제현은 구덩이 중앙에 엎어진 채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잿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새끼 여우가 뭔가의 잔해를 헤치고 기어 나왔다. 꼴은 말이 아니었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는지 잽싸게 천제현 쪽으로 뛰어와 꼼짝 못 하는 주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다크엘프는?”

새끼 여우가 얼른 주변을 살폈지만 다크엘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염에 흔적조차 없이 불타 버렸는지 아니면 추락 과정에서 어딘가 엉뚱한 데로 날아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천제현 역시 힘겹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네간계, 여기가 바로 네간계로구나.’

지상세계에서 제일 상상력이 뛰어난 인물이라 해도 대륙 아래에 이토록 불가사의한 공간이 펼쳐져 있을 줄은 감히 생각조차 못 하리라.

네간계에는 하늘이 없었다.

이곳에 사는 생명체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보게 되는 건 오색빛깔 돔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갖 암석층과 마력물질로 구성된 바위지붕으로, 가지각색 수정석 층이 눈부시게 어우러져 별이 가득한 지상의 밤하늘과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그렇다고 이곳이 한밤중처럼 깜깜하리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네간계는 결코 어둡지 않았다. 밝기를 따지자면 얼추 지상세계의 황혼 무렵 정도, 환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시야에는 큰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이 빛은 어디서 오는 걸까? 네간계에 태양이 뜰 리는 없고.’

아니, 태양이 없으리라는 생각 역시 큰 실수다.

이곳에는 태양이 있었다.

그것도 수백, 수천, 수만 개의 태양이.

네간계에서 머리 위를 올려다 보면 현란한 빛깔의 암석 돔 외에도 큼직큼직하게 빛나는 덩어리들을 볼 수 있었다. 원형도 있고 다각형도 있고 길쭉한 모양은 물론 일부는 시시각각 형태가 바뀌기까지 했다.

그랬다. 용암층.

천제현이 조금 전 건너온 불의 바다 역시 용암층이었다.

사실 네간 상공에는 그와 비슷한 용암층이 수도 없이 깔려 있었다. 용암층은 네간계의 대지에 막대한 양의 빛과 열, 그리고 마력을 제공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었으면 이제 네간계 상공이 어떤 모습인지 충분히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무수한 태양과 별들이 반짝이는, 지상에서는 각각 낮과 밤을 대표하는 천체가 한데 공존하는 듯한 장관. 그것이 바로 네간계의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지하세계는 반드시 황량하기만 한 곳일까?

물론 아니다.

빛이 있고 열이 있고 마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여기에 무한한 세월이 더해져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가 형성됐다. 종의 다양성 역시 지상세계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천제현이 추락한 위치도 나무가 무성한 숲 한가운데였다.

물론.

네간계의 숲은 지상과는 딴판이었다. 이곳 식물 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지하 암흑식물이었다. 네간에서는 똑같이 생긴 나무를 두 그루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곳에서는 생물들이 시시각각 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씨앗 두 개를 심더라도 다 자란 뒤에는 완전히 다른 식물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네간계는 마치 엷은 베일이 눈앞을 가린 듯 전체적으로 시야가 어렴풋했다. 석순처럼 뾰족뾰족 자라난 수정결정이 땅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고 물이 흐르는 곳에는 빛나는 수정수초가 우거져 있었다. 이곳이 지하세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동화 속 세상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천제현에게는 네간계의 이색적인 풍광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새끼 여우가 짧은 수색을 벌였지만 여전히 다크엘프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됐어.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 알아서 움직이지 뭐. 그나저나 몸 상태가 영 별로야. 정신력을 회복하려면 푹 자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아. 그동안은 네가 보초 좀 서줘.”

새끼 여우가 성약 몇 개를 내놨다. 천제현이 데빌앤트 협곡에서 찾아낸 정신유형 성약이었다. 천제현은 지금 느긋하게 앉아서 단약을 만들 형편이 못 됐다. 어차피 몸속에 유명화를 지니고 있으니 일단 집어삼킨 뒤 몸을 화로 삼아 체내에서 단약을 만드는 편이 나았다. 약효 낭비야 상당하겠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성약을 삼킨 천제현은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 있을 때는 뇌의 활동이 활발하니 정신력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수면은 일종의 본능적인 보호기제였다. 부상을 완벽하게 치유하기 위해서는 깊은 잠이 필수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새끼 여우가 낑낑거렸다.

이런 데서 잠들면 어떡해.

하지만 새끼 여우가 아무리 흔들어대도 천제현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전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슬슬 침울해져 가던 새끼 여우가 갑자기 털이 복슬복슬한 귀를 쫑긋 세우더니 무슨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재빨리 천제현의 옷섶으로 몸을 숨겼다.

숲 속에서 인영 몇 개가 어른거렸다.

조심성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온 건 족히 15분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난 뒤였다.

“가쿠에서 이상한 생명체가 떨어졌어!”

불청객들은 기이한 모습이었다. 지능이 있는 생물은 확실한데, 나비를 닮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뾰족한 귀를 비롯해 전체적인 외모는 엘프와 비슷했으나 피부색이 초록색, 파란색, 노란색, 흰색 등 개체별로 제각각이었다. 기다란 꼬리는 끄트머리가 화살촉 모양이었다.

화살촉 모양 꼬리는 이들이 악마족이거나 최소한 악마의 아종쯤은 되는 암흑종족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나비악마였다.

나비악마는 암흑종족 중 최약체로 손꼽히는 집단으로, 네간계에서도 세력이 큰 종족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떡고물이나 얻어먹으며 목숨을 이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지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험한 네간계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종족이라면 강점 한둘쯤은 있게 마련이었다. 나비악마는 직접적인 공격력 자체는 보잘것없어도 매혹, 최면, 독공에 강해 적으로 만나면 꽤나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구덩이 주위에 모여든 나비악마들이 세상모르고 잠든 천제현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뭘까?”

“가쿠에서 보낸 첩자 아니야?”

“가쿠계 곤충령처럼은 안 생겼는걸. 오히려 엘프랑 닮은 것 같은데.”

“곤충령 안 닮았다고 첩자일 리 없다는 거야? 다크엘프만 해도 네간에만 사는 건 아니잖아. 가쿠에도 엘프들이 사는 구역이 있다고. 내가 보기에는 가쿠에서 온 첩자가 확실해. 당장 피를 빨아서 죽여 버려야겠어!”

“잠깐, 첩자든 아니든 섣불리 죽일 일이 아니야. 어쨌든 위에서 떨어진 생물이잖아. 내다 팔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야. 얼른 묶어서 끌고 가자!”

나비악마는 겁이 많은 종족이었다.

하지만 지금 천제현은 누가 봐도 저항할 힘이 없는 상태였고 나비악마들은 빈곤에 찌든 와중에 진귀한 미기록종 생명체를 발견한 참이었다. 만약 첩자라면 정보를 캐내 팔 수 있을 테고 첩자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희귀한 동물이라면 암흑 땅의 엘프 상인에게 비싼 값에 넘길 수 있지 않겠는가.

나비악마 일행이 힘을 합쳐 천제현을 구덩이에서 끌어냈다.

***

추락지점에서 30리 떨어진 절벽, 영지버섯 비슷한 물체에 뒤덮인 고목들이 벼랑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다. 구불구불 뒤틀린 나무를 뒤덮은 물질은 긴 세월을 견디느라 반쯤은 돌처럼 굳어 버린 형태였다. 나비악마들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자라는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 이 마을 인구는 고작 수천 명, 네간계 어디에서도 이렇게 규모가 작은 마을을 또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밖에서 주워온 낯선 생물로 인해 마을에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혼혈엘프가 분명하다니까.”

“아니야, 엘프라니 그게 말이 돼? 피에서 나는 냄새가 엘프랑은 완전히 딴판인 걸 보면 다른 종족이야.”

“그럼 대체 뭐지?”

“나라고 알겠니. 악마 냄새도 아니고 곤충령 냄새도 아니고.”

나비악마들의 토론이 점점 열기를 더해가고 있던 때였다.

“다들 조용히 해!”

젊은 암컷 나비악마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영민한 개체였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는 최상급 혈통의 증명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머지 나비악마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건 그들 사회에서는 혈통이 절대적인 신분의 고하를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정체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가 아니야.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저렇게 뒀다가 죽기라도 하면 돈이고 뭐고 다 날아가는 거라고!”

그제야 다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래, 죽으면 말짱 꽝이잖아.”

나비악마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괴생명체를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만큼 심한 상처가 눈에 띄지는 않아 다들 이상하게 여기던 참에 나이 많은 나비악마 하나가 말했다.

“어쩌면 정신이나 영혼을 다쳤는지도 모르겠군.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네.”

나비악마들은 대부분 정신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다른 생명체의 정신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다. 검사 결과는 나비악마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신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어!”

“이 정도면 생명체가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살아 있는 게 기적이야. 깨어나지는 못할 것 같군.”

실망스러운 결론에 나비악마 무리 전체가 시무룩해졌다. 식물이나 다름없는 혼수상태이니 제아무리 진귀한 생명체라 해도 좋은 값을 받기는 그른 게 아닌가.

“이제 저걸 어쩌지?”

“첩자든 아니든 깨어날 가망이 없는 이상 정보 제공원으로서의 가치는 없는 거고.”

젊은 흰색 나비악마가 말했다.

“그냥 땅의 엘프한테 팔지 뭐. 가뜩이나 마을에 물자도 부족한데 값이나 제대로 쳐줬으면 좋겠네.”

“그래, 그래. 그게 유일한 방법이겠군.”

가쿠계를 뚫고 내려왔다면 평범한 생명체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이렇다 할 수입원이 없는 나비악마들에게 이 기이한 생물이 어쩌면 막대할 부를 안겨줄지도 몰랐다.

땅의 엘프 상인들은 부유하다 못해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자들이었다.

값을 인색하게 쳐주더라도 마을이 상당 기간 먹고살 돈은 마련할 수 있으리라.

나비악마들이 미지의 생명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근처에 사는 땅의 엘프 상인이 역시나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곧 상인대표 몇몇이 나무협곡마을에 도착했다.

암흑 땅의 엘프는 능글맞고 약삭빠르기로 네간에서도 이름이 난 종족이었다.

하지만 나비악마가 내놓은 매물을 본 순간에는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하는 땅의 엘프들도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네간계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물이었다.

암흑 땅의 엘프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나비악마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우연히 주워온 생명체가 과연 마을에 부를 안겨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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