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602화 (602/729)

# 602

제602장 네간계

니크론성.

곤충령들의 지하도시.

니크론성은 십여 개 씨족 곤충령 삼백만이 거주하는 거대 지하성이다.

곤충령은 지상의 여타 종족들과는 달리 마력광물을 갉아먹으며 살아간다. 마력광물은 마력수련과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곤충령의 껍질을 단단하게 만들어 방어력을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곤충령들이 그 막강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지표면으로 진출하지 않는 건 지하세계의 자원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땅 위는 되레 낯설고 불편하기만 할 뿐이다. 이는 마수령이나 인간이 지하세계를 탐내지 않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지하세계에도 세력구도는 존재한다. 이곳을 대표하는 몇몇 세력의 지도자들 중 가장 이름난 존재는 바로 거미여왕 엘리카시스다.

엘리카시스는 곤충령 세계의 3분의 1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지상에 거점을 세워본 곤충령 통치자는 그녀가 유일하다. 니크론성은 바로 이런 거미여왕이 지배하는 지하도시다.

천제현은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바비큐용 돼지처럼 운반되는 중이었다.

“경고하는데 팔다리 중에 하나만 없어져도 내 동료가 알을 싹 다 박멸해 버릴 거다!”

“입 닥쳐!”

그 와중에도 천제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바빴다. 제대로 된 지하 심층부 도시를 구경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니크론성은 구멍이 숭숭 뚫린 장기 같은 모양이었다. 흡사 종양으로 뒤덮인 거대 마수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성 주변에 넓게 펼쳐진 공터에는 암흑생물을 기르는 사육장과 암흑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곤충령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진 않지만, 소량이나마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3,000미터 높이에 달하는 니크론성은 깔때기를 세워놓은 듯한 형태였다. 위는 넓고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성 표면은 온통 구멍투성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벌집처럼 복잡하고 촘촘하게 설계된 통로들 때문에 눈이 다 빙빙 돌 지경이었다.

세상 그 어떤 미궁도 이에 비교할 바는 아니리라.

천제현은 본의 아니게 곤충령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질서도, 군대도, 관원도 없는 이들에게는 영주의 말이 곧 법이었다. 여러 씨족 집단이 뒤섞인 도시는 혼란 그 자체였지만, 혼란 속에도 보이지 않는 합의는 존재했다.

개미가 그렇고 벌이 그렇듯이 곤충령들은 공동체 생활을 위한 본능을 타고났다. 규칙이 없더라도 하급자들은 상급자들을 섬겼고, 지휘관이 없더라도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이 복잡하게 얽힌 미로에서 탈출한다는 건 맨손으로 하늘을 오르기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물론 천제현에게는 공간전송 두루마리가 있었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무질서한 곤충령 도시 내부에도 정중앙에는 확 트인 메인통로가 존재했다. 통로에 설치된 관문에는 최정예 전사들이 바글바글하게 주둔 중이었는데, 당장에라도 적이 들이닥칠까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신식을 발동해 슬쩍 넘어다본 관문 뒤쪽에는 아래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길이 이어져 있었다.

천제현은 화령술사도 부수지 못할 수정석 감방에 갇혔다. 현성급에 달하는 그의 신식마저 완전히 차단하는 벽 재질 탓에 바깥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감방 안에서는 다크엘프 하나가 고문당하고 있었다.

“잠입한 목적이 뭐냐!”

“당장 불어!”

다크엘프 청년은 온몸에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곤충령 몇몇이 달라붙어 엘프의 등 쪽 피부를 벗겨내더니 그 자리에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물약을 칠했다.

하지만 다크엘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모진 고문이 가해져도 청년은 신음 한 번 낼 줄을 몰랐다.

천제현을 끌고 온 거미족 전사가 물었다.

“뭐야?”

“네간에서 올라온 첩자.”

“네간 놈을 왜 여태껏 살려뒀어? 빨리 처리하지.”

“영주님께서 죽이지 말고 정보를 뽑아내라고 하셨어.”

“흥, 네간 첩자와 지상 도둑놈이라. 한 방에 가둬놔.”

연이은 고문에 결국 정신을 잃은 다크엘프는 천제현과 같은 방에 감금됐다. 악질 죄인 둘을 가둬놓은 걸 보면 제일 경비가 삼엄한 감방인 모양이었다.

십 분이 조금 더 지났을까.

엘프가 정신을 차렸다.

그를 흥미롭게 뜯어보던 천제현이 엘프어로 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괜찮아요?”

“인간?”

“인간에 대해 좀 아는군요? 잘됐네요.”

다행히 말이 통하는 상대인 것 같았다.

“네간에서 왔다고요? 어쩌다 잡혀들어왔어요?”

“네간계를 어떻게 압니까?”

통증이 한결 가신 듯한 다크엘프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은 땅 위에 사는 종족이 아닌가요? 그러는 당신은 어쩌다가 가쿠계 곤충들한테 붙잡힌 거죠?”

네간과 가쿠.

낯선 두 단어.

천제현은 그 의미를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지하세계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가장 하층부에 속하는 네간계에는 고대생물, 악마, 다크엘프들이 살았다. 가쿠계는 네간계의 위층으로, 똑같이 지하세계로는 불리지만 네간계보다는 지표에서 가까웠다.

가쿠계를 대표하는 종족은 이곳 전역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곤충령이었다.

다크엘프가 감옥에 끌려온 건 네간계와 가쿠계가 적대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가쿠계와 네간계는 서로의 땅을 탐냈다. 지하세계 이웃의 땅에 비하면 지상세계 따위는 그들의 눈에 차지도 않았다.

천제현은 사형수로서의 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다리를 꼬고 벽에 기대앉은 채였다.

“난 지상세계 숲 속 도시의 성주예요. 최근 들어 지하 암흑생물들이 날뛰는 이유를 알아보러 내려왔다가 실수로 저들이 기르던 개미를 죽이는 바람에 이 신세가 된 거고요.”

다크엘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기를 들을수록 눈앞의 인간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단순한 직선거리는 차라리 문제가 아니었다. 지상세계와 가쿠계 사이에는 암흑생물 서식지와 용암지대를 비롯한 험준한 지형이 가로놓여 있었다. 거의 길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혼자서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어쩌면 저 인간족은 곤충령들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 들여보낸 끄나풀인지도 몰랐다.

다크엘프가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하자 천제현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혹시 뭐 아는 것 좀 없어요?”

“마수들이 날뛰는 건 네간계에 있는 악마의 문에 틈이 생긴 탓이에요.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뭐 하러 목숨 걸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군요. 곤충령들한테 붙잡힌 이상 살아 나가겠다는 희망은 안 품는 편이 좋을 겁니다.”

“글쎄요. 아는 게 꽤 많아 보이는데, 나랑 같이 탈출합시다.”

“하, 그 꼴로 도망 운운이라니. 땅 위 종족들은 전부 당신처럼 허풍이 심합니까?”

천제현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감방 중앙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새끼 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악한 다크엘프가 말을 더듬었다.

“대체…….”

쇠사슬부터 물어뜯어 끊어 버린 새끼 여우가 두루마리를 토해냈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인 다크엘프를 사슬에서 풀어준 천제현이 그에게 공간전송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공간전송 두루마리라는 물건이에요. 펴기만 하면 간단히 땅 위로 이동할 수 있죠. 같이 갑시다.”

“당신…….”

“목숨을 구해 준 대가는 정보로 대신 받겠습니다. 이 정도면 공평하죠? 일단 따라와요!”

잠시 망설이던 다크엘프가 두루마리를 천제현에게 돌려줬다.

“아니요, 네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네간으로?”

“니크론성이 네간을 침략할 계략을 짜고 있어요. 돌아가서 알려야 합니다.”

‘맙소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혼자서 이 철통같은 성을 빠져나가겠다고? 너 같은 멍청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몸께서 나서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단 말이다.’

“도와주세요. 보답은 꼭 하겠습니다!”

“보답은 됐고.”

천제현이 못마땅한 눈으로 엘프를 응시했다.

“대체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겁니까?”

“니크론성은 사실 네간으로 통하는 몇 안 되는 길목 중 하나예요. 성 하층부에 있는 관문만 통과하면 네간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실은 천제현도 내심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쉽던 참이었다. 지하세계는 산책 삼아 아무 때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제는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떻게 감방을 빠져나가 경비가 삼엄한 관문까지 통과하느냐였다.

천제현이 묵묵부답이자 다크엘프가 수습에 나섰다.

“괜히 난처하게 만든 것 같군요. 네간에는 혼자 가겠습니다. 우린 여기서 헤어지죠.”

‘혼자 간다고? 자살이랑 뭐가 달라? 그럴 거면 그냥 감방 벽에 머리 들이받아 죽고 말지.’

그러다 천제현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전송 두루마리가 손에 있으니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경우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마침 현지인 가이드도 만났겠다, 이 기회에 네간계 구경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천제현보다 새끼 여우가 오히려 더 흥분해서 야단법석이었다. 네간계가 꽤나 궁금한 모양인지 돕겠다며 묘수를 내놓기까지 했다.

“시간을 끌어주겠다고?”

새끼 여우가 후하고 숨결을 불자 감방 안에 밧줄로 꽁꽁 묶인 두 사람이 나타났다.

환술로 복제품을 만드는 것쯤이야 새끼 여우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다음 술법은 천제현과 다크엘프의 몸에 직접 작용했다. 알 수 없는 힘이 체내로 스며드는가 싶더니 겉모습이 거미족과 똑같이 바뀌었다.

‘쓸만한걸.’

그간 오만 걸 다 주워 먹고 다니더니, 새끼 여우가 밥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금세 이상한 점을 알아챌 수 있는 술법이었지만 급한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는 충분히 훌륭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

천제현의 눈동자가 흰색으로 변했다. 다크엘프는 순식간에 천제현이 방출한 공간마력에 휩싸였다.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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