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9
제599장 지하 속으로
혼돈의 숲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발아래 광활한 지하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는 숲에서 가장 오래 산 엘프족조차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곳은 영원히 해가 비추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암흑의 생명체들이 살며, 고대에 멸종한 동물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지하세계는 위험천만한 곳이 되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지하세계는 죽음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출몰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지상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생활환경이든 생태계든 모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하세계의 생명체들은 지상으로 올라와 영역 다툼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마찬가지로 지상의 생명체들 역시 지하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떤 자료도, 지도도 없는 곳.
천제현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지하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또 무엇을 만날지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주님, 잘 생각하신 것 맞습니까?”
천제현을 악마의 입 입구까지 배웅한 클라크가 입을 열었다.
“하프엘프족은 지금까지 몇 차례나 동굴 부근의 지도를 만들고자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악마의 입은 지하세계의 입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진정한 지하세계는 수백 리나 깊은 곳에 있을 겁니다!”
그랬다.
수백 리 아래 뭐가 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아니, 통로가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지하세계는 알려지지 않은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지형 자체가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열악했다. 전설 속의 수많은 모험가와 탐험가들도 그곳에 발을 들인 뒤 영영 못 돌아오지 않았는가.
“걱정하지 마세요!”
천제현이 허리춤에 꽂아놓은 두루마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까요. 그리고 가야만 하는 곳이고요. 그러니 그렇게 안절부절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큰아가씨와 같은 경국지색의 미인조차 날 막지 못했는데 당신 같은 늙은이가 잔소리한다고 들을쏘냐?
결국 클라크는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괴물 폭주 사건이 발생한 후로 악마의 입 주변 수비는 한층 강화되어 있었다. 무기 장비며 수비 인원 모두 몇 배씩 늘려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여기에 사령탑을 하나 세우는 게 좋겠네요. 그럼 감시탑 건설도 더 쉬워지지 않겠어요?”
천제현이 동굴로 들어가기 전에 제안했다.
“사령탑은 생명체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괴물들이 다시 출몰한다면 즉각 경보를 울릴 수 있겠죠. 게다가 사령탑 하나면 수만 마리의 망령과 해골들을 조종할 수 있잖아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해골들이야말로 이곳 수비에 최적일 거예요.”
“알겠습니다!”
악마의 입 안쪽은 바깥쪽과 확연히 달랐다.
안쪽으로 들어간 천제현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이게 대체 무슨 냄새람?”
그 주변은 원래 이블아이들이 서식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전부 사라졌다고 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이블아이들은 사체가 되어 있었다. 그놈들뿐만이 아니었다.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의 유해와 사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피칠갑을 한 도살장이었다.
암흑 생명체들이 폭주하면서 서로 물어뜯고 싸운 것이다.
새끼 여우는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사체들 사이에서 수정핵을 찾아 간식처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천제현은 살짝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만 좀 먹고 이놈들이 어디서 왔는지나 좀 알아봐.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고!”
그러나 새끼 여우는 고개를 저었다.
“뭐야? 못 찾겠다고?”
동굴 안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괴물들이 출몰하는데다가 동굴 자체의 구조가 몹시 복잡해서 새끼 여우로서도 그 일이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 괴물들이 같은 곳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기운을 쫓는 새끼 여우의 추적 방법으로는 정확한 길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 쓸모없는 여우 같으니라고! 그저 먹는 것만 밝히지, 정작 필요할 땐 아무 쓸데가 없잖아! 동굴이 이렇게 큰데 지하로 가는 입구를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천제현은 짜증을 내며 새끼 여우 탓을 했지만, 그와 오래 붙어 있으면서 만성이 된 새끼 여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쁘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여우는 잠깐 사이에 수정핵을 최소 백 개는 먹어 치운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천제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무슨 탐험이야? 맛집 탐방이지.’
기적성의 지하기지는 400~500미터 지하에 있었지만, 그 정도 깊이는 지하세계 전체로 볼 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대륙의 표층에 위치할 뿐이니까. 이제 천제현은 이 복잡한 지질환경 속에서 지하세계로 통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마력을 품은 광물들이 빛을 발해 지하식물들의 생장을 돕고 있었지만, 깊은 곳에 있는 마력광물일수록 공격적인 힘의 특성을 보여 생명체를 부식시켰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주변에만 가도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또한, 지하식물들은 수많은 극독 물질을 내뿜어 부지불식간에 목숨을 빼앗아가곤 했다.
일반 술사라면 지하세계는 고사하고 동굴 주변을 탐험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천제현은 한 번 마음을 먹은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지하세계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단약 몇 개를 연달아 복용한 뒤 새끼 여우의 목덜미를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도도, 명확한 노선도 없지만 일단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뭔가 나올 거라는 생각이었다.
동굴은 염산이라도 뿌린 양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나 있어 개미굴이나 벌집처럼 보였다. 각각의 통로들은 복잡하고 규칙이 없었으며 곳곳에 진귀한 광석과 지하식물, 위험한 괴물들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어째서 지하공간은 수천, 수만 년이 흐르도록 무너지지 않는가?
그 이유는 두 개의 힘이 공간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태곳적부터 지하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과 숲의 지맥이 끊임없이 지질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강철처럼 단단해진 지하의 암석들이 강력한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동시에 지하세계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포 형태의 마력 파장도 공간을 지탱하는 데 한몫했다.
새끼 여우는 부단히 눈알을 굴리며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천제현은 새끼 여우의 지시대로 막힌 길들을 뚫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물론이고, 이 지하세계에 통로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으나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공간능력이 큰 역할을 했다.
천제현은 뚫고 가기 어려운 장애물을 만났을 경우 가볍게 그곳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쉽게 몸을 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속도와 효율 모두 높아졌다.
“알다가도 모르겠군!”
지친 천제현은 큰 바위 위에 앉아 쉬면서 품에서 진원단 하나를 꺼내 복용했다. 그러자 마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벌써 하루 밤낮을 꼬박 걸어온 거지? 그런데 왜 달라진 게 없는 거야? 난장판인 암흑생물들의 소굴밖에 보이는 게 없잖아!”
3만 년 후의 미래에서 천제현은 여러 지하왕국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전송진을 통해 이동했으므로 직접 두꺼운 지질층을 뚫고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 시대의 지질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대부분의 지하세계가 파괴되었고, 남은 지하왕국도 수많은 개조를 거친 것이었다.
어느 샌가 천제현은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었고, 머리카락도 까치집처럼 엉켜 있었다. 새끼 여우의 신안과 그의 공간능력, 신식 덕분에 괴물 소굴이 나타날 때마다 바로 바로 피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전투를 전혀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지하공간에서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무엇 하나 쉬운 상대가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전투를 거친 천제현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한편, 커다란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정찰하던 새끼 여우의 두 눈이 번쩍였다. 그러고는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펄쩍 뛰어올라 발톱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천제현은 여우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지하협곡처럼 보이는 지형 안쪽에서 강력한 어둠의 마력이 느껴졌다. 어두운 보랏빛과 붉은 빛을 띤 수정석들이 죽순처럼 암벽을 뚫고 자라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곳은 암흑 괴물의 근거지일 가능성이 컸다.
“확실해? 저런 곳은 웬만하면 안 가는 게 좋다고!”
그러나 여우는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천제현은 어쩔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확신하니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정말 입구가 있을 지도 모르잖아?’
그의 생각대로였다.
마력으로 가득 찬 그 공간의 기운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두꺼운 벽을 이룬 어둠의 마력 때문에 신식을 시전하는 건 고사하고, 황산에라도 빠진 양 몸 여기저기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천제현은 정화 효능이 있는 단약을 꺼내 복용한 후 말했다.
“되도록 빨리 지나가는 게 좋겠어!”
통로의 양 옆은 지하산맥이었는데, 산맥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것을 본 천제현이 석연치 않다는 생각을 하며 통로 중간까지 이동했을 때, 갑자기 협곡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미터 길이의 뭔가가 동굴에서 튀어 나왔다.
개미처럼 생긴 생명체였다. 온몸이 단단한 검은색 껍질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칼날처럼 예리한 앞다리와 반투명한 날개까지 달린 놈이었다. 그놈들이 눈 깜짝할 새에 시야를 가득 메우며 튀어나왔다.
“데빌앤트!”
천제현은 그 희귀한 생명체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봤다.
“이런 젠장, 넌 왜 이런 곳으로 가자고 한 거야!”
데빌앤트는 개미처럼 생겼지만, 실은 악마의 피가 흐르는 마수로, 속도가 매우 빠르고 공격성이 강하며, 등껍질은 귀한 재료로 사용되곤 했다. 놈들의 등껍질은 신식을 피하는 효과가 있어 천제현과 같은 현성급의 신식으로도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천제현이 무슨 수로 이렇게 많은 데빌앤트들을 상대하겠는가?
그는 급히 공간이동을 시전했으나, 암흑마력이 워낙 강한 곳이라 신식으로도 먼 지점을 설정할 수 없었고, 순간이동의 거리에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천 미터 가량밖에 이동하지 못했는데, 개미떼들은 이미 그의 머리 위로 모이고 있었다.
윙윙!
수천 마리의 데빌앤트가 동시에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놈들의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 바로 이것이었다. 데빌앤트는 천적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사냥감을 만날 경우 수천 마리가 동시에 치명적인 대형 정신파를 발산한다.
데빌앤트들이 내뿜는 정신마력은 주변 산맥이 진동할 정도로 강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