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0
제590장 엘프은행
천제현은 자신을 숭배하는 열성팬들에게 둘러싸였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아리따운 엘프 소녀들이었다. 옆에 있던 공서련은 질투가 나서 도끼눈을 하고 천제현을 노려봤다.
‘교류회에 참가하자고? 여자 꼬드기러 온 거잖아!’
“흠흠!”
“뭐 하는 짓인가!”
“채신머리없이!”
엘프의회 의장 오거스트가 헛기침을 하며 나타나자 엘프들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엘프왕 랜스로드와 엘프의회의 고관들 및 엘프성의 성주들도 모습을 보였다. 뒤를 따르던 비비안은 천제현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엘프들의 교류회에 천제현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니 비비안은 무척 기뻤다.
의장의 안색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했고 눈빛은 험악했다. 이 청년이 엘프족의 오랜 전통을 깨뜨렸으니 곱게 볼 턱이 있겠는가? 그러나 천제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낯가죽은 성벽보다 두껍기 때문이다. 그는 공서련과 함께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당신이 기적성의 성주 천제현이오?”
낯선 엘프 몇 명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천제현을 훑어봤다.
이들은 엘프족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사로 모두 성주급 인물들이었다. 혼돈의 숲에서도 일류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천제현과 기적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기적성의 전반적인 실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그러나 엔트족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주 대단한 세력이 아니고서는 기적성을 위협할 수 없었다. 기적성은 혼돈의 숲에서 영향력이 상당히 큰 세력으로 발돋움하여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천제현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엘프왕 랜스로드가 성주들을 소개한 후 천제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북방 대주국의 항복을 받았다고 들었소. 세력이 또다시 강해졌으니 축하할 일이오. 바쁜 와중에 엘프 마을에 와주어서 무척 고맙소.”
공서련은 엘프왕의 깍듯한 모습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니에요. 초대를 받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비비안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제가 천 회장을 초대했어요.”
오거스트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엘프족 모임에 인간족을 초청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지 맙시다.”
천제현은 자신을 조금도 외부인이라 생각하지 않고 거침없이 굴었다.
“기적성과 영원의 숲이 협력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이제 성과가 좀 보이네요. 혼돈의 숲 각지에 사는 엘프들이 모임을 여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잖아요!”
한 엘프가 웃으며 말했다.
“숲의 성에 전송탑이 없었다면 우리 엘프족은 아주 중요한 일을 제외하고 왕래가 드물었겠지요. 이런 모임은 상상도 못했고요.”
“그렇습니다. 천제현 성주의 기술에 우리 모두 탄복했습니다.”
다른 엘프 성주 하나가 감탄하며 말했다.
“엘프족은 인간보다 너무 많이 뒤처졌어요!”
천제현이 곧바로 대꾸했다.
“사실 인간족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기적상회와 손을 잡았으니 엘프족도 이제 앞서나가게 될 거예요. 하하하!”
오거스트와 고지식한 의원 몇 명은 계속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적상회와 협력을 한 후 개혁을 주장하는 엘프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 지방 성주들과 영원의 숲은 원래 왕래가 아주 적었다. 백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아서 영원의 숲에서 세운 규칙들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제 엘프왕은 전송탑으로 여러 지역과 소통했다.
엘프 성주들은 모두 엘프왕 편이었다.
천제현은 엘프왕과 함께 앉았다. 공서련은 준비해온 등심구이를 꺼냈다.
“여러분 어서 기적성의 등심구이를 드셔보세요. 이건 저희의 가장 우수한 마력요리사가 요리한 겁니다.”
“고마워요!”
“정말 맛있군요.”
“공서련도 우리 은월의 숲에서 가져온 신비과를 먹어봐요.”
공서련은 수려한 미모에 성격이 단순하고 명랑해서 남들과 쉽게 어울렸다. 게다가 직접 출연한 영화들이 엘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그녀도 엘프 사회에서 유명인사였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맛있는 것들을 모두 공서련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건 내 휴대전화 번호예요. 시간 나면 연락하세요.”
“뭐라고요? 그쪽에 아직 휴대전화가 없다고요? 통신기조차 없다고요? 괜찮아요. 신호가 그쪽까지 갈 수 있게 준비할게요.”
이번 미식교류회로 여러 지역의 엘프들은 서로 안면을 텄을 뿐만 아니라 공서련과 천제현을 알게 되었다. 모두 각 지역의 특산물과 미식을 두루 맛보며 빠르게 친해졌다. 공서련이 다음날 모두를 데리고 기적성에 놀러 가기로 하자 젊은 엘프들은 매우 신이 났다.
엘프족의 문화는 매우 다채로웠다.
미식교류회가 진행되면서 패션쇼와 예술품 전시회, 품차회, 음악교류 등의 활동이 잇달아 펼쳐졌다. 천제현은 엘프족의 문명이 어째서 느리게 발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엘프들은 이런 지엽적인 것들, 특히 예술에 너무 몰두했다.
이건 아마 엘프들의 천성 때문일 것이다.
엘프족은 선천적으로 싸움을 좋아하지 않아서 인간보다 힘이나 권력, 재물에 대한 욕망이 훨씬 적었다.
엘프들의 달아오른 모습을 보니 천제현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런 교류 활동을 더 많이 열어야겠군요. 엘프족뿐만 아니라 숲의 여러 부족과 대륙의 종족들도 전부 참여할 수 있게요. 그래야 교류도 진보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
오거스트가 콧방귀를 뀌었다.
“난폭한 마수령이나 가식적인 인간족과 어울려봤자 뭐 좋은 일이 있겠소! 우리 엘프족은 그런 거칠고 음험한 종족과 교류하지 않겠소!”
이 늙은이는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야.
천제현운 제대로 면박을 주고 싶었다.
이때 엘프왕이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지만 전송탑 이용료가 만만치 않소. 엘프족에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한도가 있긴 하나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려면 부담이 크오!”
숲의 전송탑 10여 기가 정상적으로 운행된다면 매월 마석 수십만 개의 수익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수만 명이 넘는 인원이 전송탑을 이용하려면 매우 많은 비용이 든다. 영원의 숲처럼 거대한 세력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천제현은 내심 움찔했지만 태연하게 반문했다.
“엘프족은 부유하잖아요. 설마 그 정도 푼돈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천 성주, 뭘 잘 모르시는구려.”
엘프 성주 하나가 대답했다.
“엘프족은 장사를 하지 않소. 마석이 좀 있긴 하지만 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거라오. 이렇게 쓰다가는 그나마도 다 탕진될 것이오.”
“엘프족 지역과 기적성은 이미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더 깊이 협력할 계기가 생겼어요. 우리가 서로의 장점과 조건을 잘 활용하면 더욱 근사한 미래가 펼쳐질 겁니다.”
엘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련 부성주와 관련 세부 사항을 협의했소. 엘프족은 통신과 정보 기술을 대행할 것이오. 그리고 성에 기적쇼핑몰을 짓기로 했소.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대륙 각지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고 힘들게 행상을 꾸리지 않아도 우리의 특산품을 대륙 각지에 판매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선조들의 유훈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엘프족은 번영을 누릴 수 있소.”
오거스트는 이 방안을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게 엘프의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인 것 같군. 그러니 엘프왕을 만류하지 않았겠지. 큰아가씨와 협력에 관한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고? 큰아가씨는 대체 몸이 몇 개나 되는 거야?’
천제현에게 순간 번득이는 생각이 스쳤다.
“사실 제게 건의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엘프족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엘프왕은 인간에게 잔꾀가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제현이 뱉은 말이니 들어봐야 했다.
“말해 보시오.”
천제현이 자기 생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엘프왕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는 주위의 엘프 성주들과 논의하기 시작했다. 엘프 성주들은 천제현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성주는 깜짝 놀란 얼굴로 천제현에게 계속 경의를 표했다. 어쨌든 기적상회는 이 문제에 있어서 엘프족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비비안은 더욱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천제현이 더 많은 엘프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 특별히 그를 초대했다. 그렇지만 천제현이 이 자리에서 곧바로 중요한 제안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앞으로 엘프족과 기적성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질 것이다.
천제현 역시 엘프족이 자신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몹시 흡족했다. 그는 얼핏 보면 기적성이 다소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양측에 다 이익이 되는 방안을 제시했다.
잘만 되면 기적성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도 있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부성주님, 소식 들으셨어요?”
“방금 엘프족이 성주님과 함께 폭탄선언을 했어요!”
델로리스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업무에 몰두하고 있던 공화련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델로리스는 작은 일로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 아니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한 걸 보니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천제현이 어떻게 엘프족과 같이 있죠? 또 무슨 일을 벌였나요?”
델로리스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엘프족이 숲의 두 번째이자 대륙의 두 번째 은행인 엘프은행을 열겠다고 선포했어요!”
공화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프족이 은행을 연다고? 뭐가 잘못된 거 아냐?
공화련은 서둘러 상황을 알아보고 나서 크게 놀랐다.
엘프족이 은행을 연다는 소식은 사실이었다. 엘프족에게 큰 이득이 되는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엘프족은 각지에 전송과 물류 체계를 구축했다. 기적쇼핑몰도 곧 완공된다. 통신이나 정보 플랫폼도 얼마 후에 완비된다.
자원 판매나 제조업 구축, 특산품 판매, 기술 개발, 영화 예술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엘프족의 창업 열풍이 불 것이다.
엘프왕이 은행을 설립하겠다고 선포한 것은 바로 이들의 창업을 위해서이다. 영원의 숲과 다른 숲의 여러 성에서 모든 자본을 은행에 넣고, 창업을 원하는 엘프들에게 대출해 준다면 엘프족이 점점 더 발전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 방식이 좋긴 하지만 은행을 설립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천제현은 은행 설립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해결해주었다. 우선 은행의 공간금고로 활용할 수 있게 공간창고 열 개를 엘프족에게 팔겠다고 선포했다. 그뿐만 아니라 엘프족이 정확하고 지능적으로 은행을 관리할 수 있도록 알파브레인까지 열 대 판매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적상회에서 엘프은행 설립에 기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이다.
왜 굳이 이렇게 하는 걸까? 엘프은행이 설립되면 기적은행의 기세가 한풀 크게 꺾이지 않겠는가? 숲에서 엘프족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엘프족의 영향력은 둘째 치더라도, 엘프족 성과 마을 10여 곳만 해도 방대한 시장이다.
엘프족은 영원의 숲과 엘프왕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마석을 전적으로 은행에 예금할 것이다. 게다가 엘프족은 숲의 다른 종족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다. 엘프은행은 기적은행보다 더 빨리 성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적성은 뭘 노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