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6
제586장 다가오는 천국
천제현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돌연 정령을 소환했다. 칠흑같이 검은 신마검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파멸의 기운을 담은 검기를 방출했다. 검기는 순식간에 이 부러진 검을 뒤덮었다.
부러진 검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녹슨 부분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공서련이 눈을 반짝였다.
“움직였어!”
이 부러진 검의 녹슨 부분이 계속 떨어져 나가자 그 안에 감춰져 있던 것이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냈다. 눈처럼 새하얀 옥벽이었다. 매끄러운 피부와 같은 흰 표면에는 오묘한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역시 이거구나.”
봉인을 해제하는 열쇠는 강력한 검의 정령에 있었다. 천검문의 역대 인물 중 이처럼 강력한 정령을 가진 인물은 아마도 시조인 무상검성이 유일했을 것이다.
공서련이 다가와 이 문자들을 보았다. 1년 넘도록 적지 않은 문자를 보았지만, 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난해 한 문자는 처음이었다. 기호 하나도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이건 무슨 문자지? 난생처음 보는데.”
“이건 고대 신족의 고등 비문이에요. 저 역시 일부분만 해석할 수 있어요.”
천제현이 자세히 살펴본 후 말했다.
“이건 검결 무공이에요. 무상검(無相劍)이 분명해요!”
“뭐야, 천검문 선조가 만든 <소무상검>이라더니, 그냥 헛소리였네!”
남궁혜가 코웃음을 쳤다.
“이걸 고대로 베껴 놓고 자기가 만들었다니, 정말 창피한 줄 알아야지!”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가 이 문자들을 해독하는데 30년이라는 시간을 할애했을 게 분명해요. 이 검결의 본질은 공간 속성에 있어요. 그렇지만 공간 속성을 가진 검술 자체는 많지 않죠. 그래서 검결을 간소화한 거예요. 원본을 기초로 소위 소무상검으로 재창조한 것이죠. 물론 무상검이 소무상검보다 훨씬 더 대단하긴 하지만요!”
“그럼 천제현이 찾은 무공이 원본 아니야?”
“맞아요. 그런데 문자가 소실되고 있어요. 빨리 기록해야 해요. 아가씨에게 해독을 부탁하고요.”
공서련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찾는 소무상검은 없지만 원본인 무상검결을 얻은 것이다. 이 검결을 잘 정비한다면 개인 전투력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향상될 것이다.
무상검의 옥벽 이외에도 천제현은 천검문의 고급 절학 십여 가지를 찾았고, 이를 전부 베껴 적은 후 가지고 나왔다. 천검문의 대다수 검결은 고대에서 전승된 것으로 수많은 세대를 거쳐 수많은 천재가 이를 정리했을 테니 그 가치가 매우 높을 것이다.
기적상회는 물자와 자원뿐만 아니라 이런 무공과 비술도 대단히 귀한 재산이라 여겼다.
대주국의 지형은 폭이 좁고 길며,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수만 리나 되고 중간에서 약간 위쪽에 있는 지형은 서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대주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운성이 바로 여기에 위치해 있다. 운성의 인구는 800만이 넘고 사방으로 국경과 맞닿아 있어 지정학적 위치도 특이했다.
운성은 동쪽으로는 견융초원과 가깝고 남쪽으로는 대하국, 북쪽으로는 북방의 여러 나라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상단과 모험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은 과거 영허동, 약왕곡, 현음종 등 세 문파가 공동으로 관할하는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대주왕족의 동부 도시로 변모하였다.
대주국의 5대 영산은 대주공주 심빙우를 왕으로 추대했고, 그녀는 대주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앞으로 그녀는 경제, 무역을 비롯하여 각 문파를 관리하는 일을 주로 맡게 될 것이다.
왕성은 앞으로 반년 후에나 완공될 예정이다. 왕성이 세워지기 전까지 동부 도시가 왕성을 대신해 그 역할을 맡게 된다.
“여왕님이 즉위하신다!”
“여왕님이 제위에 오르신다!”
운성 사람들은 일제히 밖으로 나와 행궁 바깥에 모여들었다. 5대 영산의 장문인과 장로들도 자리를 채웠으며, 수천 명에 달하는 술사들은 제복을 차려입고 길 양쪽으로 쭉 늘어선 채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세라 대주국 백성이 일제히 밖으로 나온 바람에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주 왕실은 이제 막 재건되어 사병, 내시, 궁녀 등이 없었다. 그렇기에 의식은 간단하게 이루어졌으나 즉위식의 품격 자체가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각 문파의 장문인 및 장로들까지 자리에 참석했으니, 이는 대주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이 왕실을 인정하고 지지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대주왕족은 이제 막 재건되었으나 그 위상은 18년 전을 훨씬 뛰어넘었다.
심빙우는 왕관을 쓰고 곤룡포를 둘렀다.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가 남궁혜, 공서련이 양옆에서 보좌하는 가운데 왕좌에 올랐다.
“현음종이 만년 흑수정 100개를 바칩니다. 대주국 왕이 되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영허동이 뇌진호신부적 1,000장을 바칩니다. 왕위에 오르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약왕곡이 영양마력내단 1,000개를 바칩니다. 왕위에 오르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현무교가 현무 병사 만 명을 바칩니다. 대주왕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왕위에 오르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신기당이 왕궁을 호위할 금강기관 근위병 100명을 바칩니다. 왕위에 오르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5대 종파가 연달아 앞으로 나와 예를 갖추고 값비싼 예물을 바쳤다. 중소 세력도 이에 질세라 새로 옹립된 대주왕족에게 가장 귀한 보물을 공물로 바쳤다. 대주국의 크고 작은 세력이 가져온 보물만으로도 창고 한곳을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대 종파가 제 발로 걸어 나와 왕에게 공물을 바치다니?
게다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줄곧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대주국 6대 영산이 언제 이런 적이 있었던가? 사람들이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잠시, 군중 가운데에서 두 특별 사절단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북융왕 루츠입니다. 즉위 선물로 마수 일만 마리를 드립니다. 대주국 왕이 되신 걸 경하드립니다!”
“대하왕 동방건입니다. 즉위 선물로 마력 병기 만 개를 드립니다. 대주국 왕이 되신 걸 경하드립니다!”
대주국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괴이하게 변했다.
‘북융왕? 대하왕? 이들은 대체 언제 생겨난 인물들이지? 어째서 이런 나라와 국호를 들어본 적이 없는 거지?’
왕좌에 앉은 심빙우는 은백색의 긴 머리카락, 차갑지만 아름다운 미모, 성숙하고 고아한 품격까지 모든 면에서 지고지상한 여왕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하고 위엄 있는 눈빛으로 좌중을 바라보았고, 이내 공서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공서련이 목소리를 고르며 앞으로 나와 왕서를 펼쳐 들더니 제법 그럴듯하게 읽어 내려갔다.
“대주국 왕서를 발표하노라. 대주왕정이 재건되었으나 내부의 간사한 세력과 외부의 강적들이 호시탐탐 우리를 엿보고 있다. 대주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짐은 북융, 대하국과 국교를 맺어 미래의 번영과 태평성세를 함께 누리고자 한다!”
5대 영산의 장문인은 공수하며 예를 갖추었다.
“폐하, 영명하십니다!”
5대 장문인이 이런 자세로 나오는데, 감히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5대 영산의 제자들도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고 나머지 중소 문파와 일반 백성들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영명하십니다!”
“폐하, 영명하십니다!”
북융왕 루츠와 남하왕 동방건이 함께 단상에 올랐다. 이들은 왕서를 교환하고 평화 동맹을 맺었다. 이는 앞으로 대주, 대하, 북융 등 세 왕국이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독립국가로 존립하면서 공동운명체로 연결될 것임을 의미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세 왕국의 백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나 내막을 잘 아는 사람은 대주왕의 즉위가 그저 연극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 것이다. 이 연극의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은 기적성은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대주왕은 기적상회의 고위층이고, 북융왕은 기적성 사람이고, 대하왕은 기적상회와 막역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본적으로 기적성이 무너지지 않는 한 이 삼각관계는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현 단계에서 보면, 대주국의 국력은 대하국과 북융국을 훨씬 능가하지만 이번 연합으로 3국 모두 승자가 될 것이다. 3국은 연합을 통해 국력이 배가 되어 장응국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적상회가 가진 기술의 힘을 빌려 도약을 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지금보다 나빠질 게 없었다.
대주국의 즉위식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북융 정권은 이제 막 수립된 터라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에 루츠는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갔고 동방건 역시 대주국에 오래 머무는 게 여의치 않아 심빙우와 협력에 관한 일련의 안건만을 논의한 후 대하국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기적성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빙우 언니, 부디 몸 조심하세요.”
운성 행궁에서 공서련, 남궁혜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심빙우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심빙우는 대주국 국왕이 된 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 한동안 기적성으로 돌아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심빙우의 차가운 얼굴에서 울적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왔다.
“너흰 돌아가서 천제현한테 전해 줘. 내가 3국을 잘 관리할 테니 염려 말라고 말이야.”
“천제현, 그 바보도 참 너무해!”
공서련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자마자 무공 해석하러 언니한테 가더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바로 폐관하다니! 대주국의 이런 큰 행사에서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이에요!”
남궁혜도 한 마디 거들었다.
“맞아, 빙우 언니 혼자만 대주국에 남겨두고, 대장은 아예 얼굴도 비추지 않고 말이야. 정말 인정머리 없다니까!”
심빙우는 봄날의 따뜻한 햇살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돼. 얼굴 한 번 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돌아가.”
“빙우 언니, 걱정 마세요.”
“제가 돌아가서 언니한테 대주국에 전송탑 하나 더 세워달라고 신청할게요. 왕성의 왕궁에 세우면 앞으로 우린 매일 만날 수 있어요.”
심빙우도 마음이 조금 동했다.
대주국에는 이미 전송탑이 하나 있었다. 게다가 전송탑 하나를 짓는데 많은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니 단시간에 두 번째 전송탑을 만드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공서련이 직접 나선다면 공화련이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대주왕궁에 전송탑이 하나 더 생기면, 심빙우가 왕궁에서 살던 기적성에서 살던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심빙우는 대주왕이란 자리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기적상회의 중요한 전략과 관계된 일이니 왕좌에 오를 수밖에.
***
혼돈의 숲, 기적성 안.
공화련이 델로리스와 함께 각종 사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제로를 필두로 도시 관리 알파브레인 몇 대가 바쁘게 돌아갔다.
제로가 수집한 정보를 분석한 후 공화련에게 보고했다.
“부성주님, 이번에 대주국과의 합병은 향후 기적성 발전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인재 중 기관술사, 제약사, 부적사, 진법사 등 5만 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고, 특수형 인재 중 공간 능력자 둘, 정신 능력자 16명 등이 있으며…….”
공화련은 간만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것이 바로 대주국을 정복한 이유 중 하나였다.
기적상회가 지역연합을 결성한 이유는 향후 대륙의 패권 다툼을 위한 초석으로 삼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 자원과 인재를 흡수하여 기적상회의 저력을 키우려는 것이다.
충분한 자원과 인재만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전투용 비행선 제작? 당연히 가능하다.
정신인터넷은? 이것도 문제없다.
기적상회의 힘이 커진 덕분에 이미 이러한 여건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제 인력이 부족하진 않을 것 같으니 심사체계와 상회의 기술보안체계를 더욱 강화해야겠어.”
공화련이 빠르게 명령했다.
“제로, 상회의 현황, 각 부처의 수요를 기초로 최적의 조직 구성을 산출해 줘.”
“알겠습니다. 부성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