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581화 (581/729)

# 581

제581장 빙령한천

비비안은 애가 탔다.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야 할 것 같아.”

“기다려요.”

천제현이 속삭였다.

“소무상검은 위험한 검결이에요. 소무상검을 대성 경지까지 익힌 능만검에게 무작정 덤비는 건 현명한 행동이 못돼요. 준비하고 있다가 이때다 싶을 때 움직입시다.”

“알았어.”

녹색용은 능만검의 날카로운 공세에 밀려 공격다운 공격 한 번 제대로 못 해보는 중이었다. 싸움의 주도권을 빼앗김에 따라 상처도 점점 더 빠르게 늘어났다. 생명의 용이라 불리는 녹색용의 치유력으로도 감당이 안 될 만큼 부상부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능만검 역시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점점 더 우세를 점해간다는 생각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능만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력을 다해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나 보자! 소무상공검우!”

능만검의 막대한 마력이 열 손가락에 모였다가 쏘아져 나갔다.

남은 마력의 대부분을 쏟아부은 일격이었다. 녹색용은 날카로운 울부짖음과 함께 시뻘건 피를 튀기며 저만치 밀려 날아갔다.

“지금이에요!”

비비안이 신혈강시를 곧장 전장으로 옮겼다. 홀연히 등장한 열여덟 개의 신형이 맹렬한 속도로 능만검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길, 매복이 있었나!”

능만검이 손가락을 튕기자 신혈강시 몇몇이 검기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마수령들도 녹색용을 포기하고 신혈강시들을 저지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적들의 신경이 모조리 신혈강시들에게 쏠린 틈에 비비안이 다시 공간능력을 시전했고, 다음 순간 능만검의 등 뒤에 나타난 천제현이 전력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능만검이 황급히 손가락을 튕겨 검기를 날렸다.

까앙.

손잡이를 통해 전해지는 무지막지한 진동에 천제현은 하마터면 유명검을 놓칠 뻔했다.

“겨우 이깟 실력으로 기습이라?”

능만검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네놈도 같이 죽여주마!”

막 검기를 응집해 천제현을 베어 넘기려던 능만검은 순간 바로 옆쪽에서 공간의 일렁임을 감지했다.

‘……적은 혼자가 아니었나?’

검기의 방향을 틀고자 몸을 돌리려는 찰나, 칼날처럼 예리한 공간마력이 능만검의 몸뚱이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깨끗하게 베고 지나갔다.

비비안의 공간참이었다.

매우 시의적절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궁극기를 발동한 직후 신혈강시들과 천제현까지 연이어 상대한 터라 능만검은 더 이상 소무상검을 시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실 비비안은 능만검의 곁으로 이동하기 전에 미리 공간공격을 시전해뒀다. 비비안이 자신의 몸을 전송할 때 발생한 파동이 공간참의 파동을 교묘하게 감춰줬고, 천제현을 처치할 생각에만 급급했던 능만검은 제 머리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줄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능만검은 정확하게 세로로 두 동강이 났다.

대주국 최정점의 고수가 자기가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은 것이다.

천제현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깔끔하게 처리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가로로 잘랐으면 잠시나마 숨이 붙어 있었을 텐데. 아아, 소무상검 검결을 손에 넣을 기회를 날리다니!”

천제현은 천검문의 소무상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장문과 부장문이 둘 다 단칼에 죽어 버렸으니 이제 어디 가서 천검문의 최고 절학을 입수한단 말인가.

“드디어 와줬구려!”

이미 한계치에 달했던 요더가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능만검이 죽고 나자 나머지 장응국 고수들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신혈강시들과 비비안이 힘을 합친 결과 놈들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말끔하게 처리됐다.

“괜찮으세요?”

검을 거둬들인 천제현이 다가왔을 때 요더는 이미 원래의 왜소한 모습으로 돌아온 뒤였다. 녹색용이 입은 상처가 본체에도 똑같이 남는 건 아니었지만, 요더는 기력이 극히 쇠한 상태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정도야 천제현과 기적성의 능력이면 간단히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기적성에서 데려온 이들은 모두 전사했소.”

요더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린지아 종주는 중상을 입었고 심빙우는 얼음궁전유적 안에 있소이다. 아마 위험한 상태일 것이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린지아는 능만검의 공격에 가슴이 관통당한 채로 얼음궁전에 누워 있었다. 마력으로 출혈은 막았지만 전투력은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얼음 단상 위에 누운 그녀가 생명이 위태로운 정도까지는 아님을 확인한 천제현이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6대 영산의 종주씩이나 되는 분이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쓰나?”

“칫, 사령시가 미완성인 탓이야. 그렇지만 않았어도 쉽게 당했을 리 없는데.”

원래도 창백한 린지아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해 보였다. 미동도 없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얼음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 같았다.

“황천길 갈 뻔한 사람 앞에서 농담이 나와?”

“자, 자, 고생한 거 아니까 일단 진정해.”

실없이 벙긋벙긋 웃어 보이던 천제현이 물었다.

“빙우 누님은 어디에?”

“지금 여기 없어. 따라와 봐.”

린지아와 요더가 천제현과 비비안을 이끌고 얼음궁전유적 내부로 향했다. 유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월등히 큰 규모였다. 얼음으로 뒤덮인 벽화와 유물, 으리으리하게 치솟은 얼음조각상, 모든 것이 과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흔적들이었다.

천제현은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주변 풍경을 관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여기가 심씨 가문의 발원지라고? 그 집안 사람들은 뭐 이런 데서 살았지?”

“대주국 전설이 100% 정확한 건 아니야.”

린지아가 걸음을 재촉하면서 설명했다.

“이곳 얼음궁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파라고 볼 수 있어. 6대 영산과 비교해도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자랑하지. 다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을 뿐이야. 6대 영산과 달리 얼음궁전은 특정 혈통을 이은 사람들에게만 무공을 전수해. 그렇게 선택받은 이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가문이 형성된 건데, 과거 어느 시점에 급격한 기후변화나 아니면 뭔가 다른 재해로 인해 얼음궁전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었어. 그때 설원을 빠져나온 소수의 생존자들이 만든 가문이 바로 지금의 심씨 집안이야.”

“그런 배경이 있었다니.”

이곳은 대주국 심씨 가문의 발원지일 뿐만 아니라 무예 전수를 위한 성지이기도 했다. 보잘것없던 심씨 가문이 고작 수십 년 만에 6대 영산을 압도하는 대주국의 왕족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이처럼 탄탄한 저력이 숨어 있었다.

심씨 가문의 직계자손, 혹은 집안의 기대를 받는 유망주들은 성년이 되는 동시에 얼음궁전으로 보내져 혈맥을 깨우고 지고지상의 무공을 익혔다. 이것이 바로 대주국 왕실이 단기간에 찬란한 번영을 이룬 비결이었다.

“바로 여기라오.”

요더가 얼음궁전 중앙에 멈춰섰다.

“이 안쪽이 얼음궁전, 더 나아가 설원 전체에 작용하는 힘의 핵심부라오. 강력한 마력이 몰아질 테니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요.”

고개를 든 천제현의 눈에 커다란 전당의 입구가 보였다. 얼음수정으로 만들어진 육중한 출입문 주위에는 얼음교룡 36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고, 얼음조각상 두 개가 위엄 넘치는 문지기처럼 좌우에 각각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입구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모종의 기운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여세요.”

요더가 출입문을 밀어서 열자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거센 마력 기류가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왔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셀 수 없이 많은 얼음바늘이 한꺼번에 몸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면서 체내 마력의 흐름조차 완전히 멈추려 했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제아무리 진령술사라 해도 아무런 준비 없이 이 자리에 섰다가는 중상을 입을 수 있었다. 이때 천제현의 눈동자가 흰색으로 변하면서 공간마력이 그의 전신을 에워쌌다. 사방을 메운 한기도 허공둔의 공간장벽까지 뚫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억지로 버티기보다 허공둔을 이용해 얼음 마력이 몸을 슬쩍 비켜 지나게 하는 편이 체력소모를 줄이는 길이었다.

먼저 문 안쪽으로 들어간 비비안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엄마야, 이게 뭐야!”

문 너머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건 거대한 얼음구멍이었다. 100m는 되어 보이는 두꺼운 얼음층은 깊이가 깊어질수록 점점 더 짙은 푸른색을 띠었다. 얼음층의 정체는 귀하디귀한 얼음흑수정이었다. 3급 희귀금속만큼이나 높은 강도에 얼음 속성까지 지니고 있어 최고급 장비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 깊은 곳에서 채굴할수록 좋은 품질을 얻을 수 있는 특징을 생각하면 이곳의 얼음흑수정은 다른 데서는 감히 꿈도 못 꿀 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행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얼음흑수정보다는 100m 깊이의 얼음구멍 안을 휘도는 마력 소용돌이였다. 청백색으로 빛나는 마력이 마치 모종의 힘이 휘젓고 있는 액체처럼 구멍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빙령한천?”

“빙령한천을 알다니 역시 박학다식하구려.”

요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씨 가문의 후예들은 하늘이 내린 이 ‘빙령한천(氷靈寒泉)’을 마셔 혈맥을 뚫는다오. 심빙우는 지금 저 안에 있소. 마력을 빨리 높여야 한다며 아예 속으로 뛰어들었다오.”

“뭐?”

비비안이 아연실색했다.

“뛰어들었다니!”

이름에 ‘천(泉)’ 자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사실 빙령한천은 샘물이 아니라 일종의 마력 응집체였다. 막대한 마력이 한데 뭉쳐 있으니 당연히 위험할 수밖에. 설사 뛰어든 게 화령술사라고 해도 살아나올 확률은 급류에 휘말린 생쥐가 목숨을 구할 확률과 엇비슷했다.

“들어간 지 얼마나 됐죠?”

“벌써 사흘이 지났소.”

천제현이 비비안에게 말했다.

“공주님이라면 저보다 마력이 한 수 위니까 공간을 찢어서 바로 건져낼 수 있지 않겠어요?”

“이곳 자체의 마력이 너무 강해.”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했던 비비안이 곧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마력으로는 마력 간섭을 극복할 수가 없어. 공간에 손을 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어쩌면 좋지?”

일행 전원이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곳은 죽음의 설원을 가로지르는 빙맥의 핵심부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마력이 몰려 있는 지점이란 뜻이었다. 아무리 얼음 속성 혈맥을 지닌 심빙우라 해도 저 아래에서 사흘을 멀쩡히 버텨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천제현이 얼음구멍 앞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군요. 제가 직접 내려가 보겠습니다.”

“성주, 심빙우는 그나마 타고난 혈맥이 있다지만 그대는 얼음 속성과 거리가 멀지 않소. 지금 마력으로 저기 들어갔다가는 영혼과 정신마저 완전히 얼어붙어 목숨을 잃고 말 것이오!”

“걱정하지 마세요.”

천제현이 고개를 저었다.

“새끼 여우가 있는 이상 적어도 제 한 몸 빠져나오는 것쯤은 거뜬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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