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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580화 (580/729)

# 580

제580장 죽음의 설원

천제현이 온화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굴복이라니요, 제가 언제 그런 걸 요구하던가요? 전혀요, 전 안 그래도 이래저래 바쁜 사람입니다. 정복해야 할 땅과 자원도 줄을 서 있고요. 이런 말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대주국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아요.”

“그럼 뭘 원하는 거지?”

“그저 협력을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천제현의 차분한 어조에서 위협의 기미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희 기적상회는 이미 대하국, 그리고 견융초원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둘만으로는 세력이 빈약한 감이 있어서요. 만약 대주국이 합류해 준다면 지속적으로 세를 확장해나갈 저력을 갖출 수 있을 겁니다. 주변의 크고 작은 왕국들을 끌어모아 장응국의 남진을 막을 장벽을 만드는 거죠! 여러분이 믿든 안 믿든 천검문과 장응국이 내통한 건 사실입니다. 장응국 세력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침투해 있었다면 대주국에 전쟁의 피바람이 불 날도 머지않았다는 얘기가 되죠.”

장응전국은 강력한 국가였다.

근 20년 동안 집어삼킨 왕국만도 최소 스무 개.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 듯이 영토를 확장 중이었다. 대주국이 아직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주변국들보다 강해 건드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응전국이 언젠가는 대주국까지 마수를 뻗치리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이런 시국에 천검문이 장응국과 내통하다니, 실은 다들 신경이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대주국 6대 문파의 수장인 천검문을 매수했을 정도면 장응전국의 침략 야욕이 어느 정도인지야 불 보듯 뻔했다. 이건 모른 척 덮는다고 저절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장문들을 그대로 둔 채 천제현이 계속 말을 이었다.

“대주국 왕족 학살 사건의 주모자는 천검문이었죠. 여기 있는 문파들도 물론 참여는 했지만, 왕실 복권을 돕고 외세와 결탁한 천검문을 응징하는 데 협조한다면 지난 과오는 모두 없던 일로 해드리겠습니다.”

“대체 우리더러 뭘 믿고 협조하라는 거지!”

“대주국 일은 대주국 사람이 알아서 한다. 외부인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 새 세력을 옹립하려 하는데 그 뒤에 딴 꿍꿍이가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남궁혜의 인내심이 드디어 한계에 달했다.

“이것들이 험한 꼴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물론 우려를 품을 법도 한 상황이죠. 현음종의 린지아 역시 처음에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린지아가 왜 생각을 바꿨는지 아십니까?”

“린지아? 그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가 뭘 알아! 네놈의 간사한 사탕발림에 넘어간 거겠지!”

“글쎄요.”

천제현에게는 여기서 계속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가씨, 데려가서 며칠 기적성을 돌아보게 해주세요. 다시 태음산에 왔을 때도 여전히 우리를 침략자로 생각하거든 그냥 놔주도록 해요. 이쪽도 강매는 싫으니까.”

남궁혜가 황급하게 물었다.

“내가 가면 빙우 언니네는 누가 찾고? 행방불명 상태잖아!”

“대신 비비안을 보내줘요. 비비안의 공간능력이라면 한결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자, 얼른요!”

“알았어.”

내키지 않는 얼굴의 남궁혜가 인질들을 끌고 전송탑으로 향했다.

천제현이 음무극을 불러들여 물어본 결과 심빙우 일행은 ‘죽음의 설원’이라는 곳에 간 듯했다. 죽음의 설원은 높은 해발과 혹한 때문에 인적은커녕 생명체 자체를 찾아보기가 힘든 땅으로, 심씨 집안의 발원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요더의 예언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아직껏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확실했다.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낸 이상 심빙우 일행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궁혜가 기적성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비안이 건너왔다.

“드디어 일할 때 나도 끼워주는구나!”

비비안을 위아래로 훑어본 천제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력이 더 높아졌군요!”

“맞아, 진령 5성이야.”

비비안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 엄청 강한 악당을 만나더라도 내가 지켜줄 수 있어!”

“반가운 소식인걸요.”

천제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어요, 바로 출발하죠!”

***

혼돈의 숲 고수 수십 명은 태음산에 남기로 했다.

음무극은 하루라도 빨리 천검산을 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계략이 이미 들통났으니 얼른 손을 쓰지 않으면 천검문이 장응국을 등에 업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다른 이유 역시 있었다. 왕실을 다시 일으킨다는 건 기존의 이익 구도가 재정립된다는 의미였다. 자기가 가진 걸 선뜻 내놓으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럴 때는 문제 있는 대형세력 하나를 쳐내는 게 최선이었다. 제거된 세력의 땅과 자원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나머지 세력들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을 테니,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천제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지금은 심빙우를 찾으러 가는 게 급했다. 더 미적거릴 여유가 없었다. 비비안은 이제 진령 5성,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대주국 영토가 드넓다고는 하나 비비안의 공간능력이라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몇 차례 순간이동을 거듭한 뒤.

두 사람은 죽음의 설원에 도착했다.

“와아, 여기 진짜 예쁘다!”

둘이 서 있는 곳은 고산지대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 위였다. 얼음 속성 영맥과 지하자원에 이끌려 모여든 얼음원소들이 이곳을 만년설의 땅으로 만들었다. 광활함과 고요함, 그리고 한기…… 시선을 저 멀리 던지자 뾰족하게 솟아오른 설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악지대인데도 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독특하고도 웅장한 설경이었다.

비비안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이상하게 춥네. 꼭 한기가 호신마력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아.”

“그럴 거예요, 얼음원소의 집중도가 너무 높은 탓이에요.”

천제현 역시 추위를 막기 위해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아마 땅 밑에 빙맥이 있을 거예요. 빙맥이 형성하는 얼음의 힘은 일반적인 추위와는 다르게 체내로 곧장 유입돼요. 진령급 고수가 아니라면 하루도 못 버티고 전신의 마력이 얼어붙어서 목숨을 잃을 거예요. 그래서 죽음의 설원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죠.”

“빙우 언니랑 린지아가 정말 여기 있을까?”

비비안이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통신신호도 안 잡히는 판에 이 넓은 설원을 어느 세월에 다 뒤지지?”

“설마 잊었어요? 우리한테는 추적의 고수가 있잖아요!”

천제현의 품에서 빠져나온 새하얀 여우가 냉큼 어깨에 올라앉더니 자랑스럽게 꼬리를 흔들었다.

이 타이밍에 내가 안 나서면 또 누가 나서리?

비비안은 아차 싶었다.

또 새끼 여우를 깜빡했구나.

“요녀석,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서둘러.”

천제현이 새끼 여우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사람부터 찾고 상은 돌아가서 꼭 챙겨줄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새끼 여우가 눈을 감고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앞발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비비안의 새하얀 손이 천제현의 어깨에 올라가는 동시에 두 사람은 백 리 거리를 뛰어넘었다. 죽음의 설원은 눈보라와 죽음의 한파가 휘몰아치는 드넓은 땅이었다. 걸어서 통과하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공간 전송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망망대해나 다름없는 죽음의 설원도 한순간에 수백 리를 이동하는 비비안에게는 손바닥 크기에 불과했다.

새끼 여우의 안내에 따라 몇 차례 공간이동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뭔가 성과가 보이는 듯했다. 죽음의 설원 북쪽에서 거대한 얼음호수를 발견한 것이었다.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마치 매끈한 거울처럼 보이는 호수에서는 푸른 마력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빙맥의 핵이었다.

호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진령급 마력의 소유자라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렬했다.

“우리가 찾던 곳이야!”

호수 중앙, 얼음과 눈에 뒤덮인 채로 우뚝 선 성을 발견한 비비안이 말했다.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성은 짙은 얼음과 서리의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기 봐, 요더 아니야?”

위풍당당한 녹색 비룡 한 마리가 빙설고성을 지키고 있었다. 두껍게 쌓인 눈이 기다란 몸체의 절반 이상을 덮었지만 비룡 특유의 위엄만은 가려지지 않았다.

틀림없었다.

요더가 변신한 녹색용이었다.

용을 관찰하던 비비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다친 것 같은데.”

위풍당당한 기세와는 달리 녹색용은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비늘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목과 배 부분은 이제 겨우 새살이 돋아난 듯 보였다. 수십 군데가 넘는 상처는 비룡이 힘겨운 전투를 겪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자!”

“아니요.”

천제현이 비비안을 붙들었다.

“요더가 저 지경이 됐다는 건 강력한 적을 만났었다는 얘기에요. 일단 나서지 말고 지켜보죠.”

말을 마친 천제현이 봉인두루마리 안에 있던 신혈강시들을 불러냈다. 호수 근처에 숨어 상황을 지켜본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설원에 한 무리의 인영이 등장했다. 스무 명이 약간 넘는 무리 중 대부분이 마수령이었다. 선두에 선 몇 명만이 인간이었는데 옷차림으로 보아 천검문 고위층인 듯했다.

흥분한 비비안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말했다.

“역시, 아까 말했던 대로 적들이 나타났어!”

천제현이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더 지켜보죠.”

“늙은이, 끝까지 저항할 셈인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검술사가 녹색용을 노려보며 검 네다섯 자루를 동시에 휘둘렀다. 언성을 높이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이제 힘도 다 빠졌을 텐데 겨우 이런 일에 목숨까지 바칠 생각인가?”

크르르 낮은 울림이 흘러나오던 녹색용의 목구멍에서 불꽃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거대한 두 날개가 펼쳐지며 눈보라를 일으켰다. 칼날처럼 매서운 기운이 순식간에 사방을 휩쓸었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검술사가 훌쩍 도약하면서 두 손으로 인을 맺었다.

“소무상공검지!”

갓 새살이 돋아난 녹색용의 목 부위가 다시금 찢겨나가면서 피와 살점이 튀었다. 하지만 녹색용은 상처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날개를 퍼덕이며 적들을 향해 쐐기처럼 쇄도했다.

이때 마수령들이 가세했다. 우선 검술사에게 보호 결계부터 씌운 마수령들이 용을 향해 감속과 마비를 비롯해 온갖 사악한 주술을 쏟아부었다. 녹색용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수십 명에 달하는 마수령을 혼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켜보던 천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무상검?’

그렇다면 천검문 장문인 능만검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능만검의 마력은 진령 5성 정점 수준이었다. 소무상검 역시 능응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를 이룬 게 확실했다.

마수령 고수들 쪽도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20여 명 중 진령 5성이 무려 넷. 지상 최강이라 불리는 용족의 방어력을 뚫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요더의 발을 묶어두는 것 정도는 충분했다. 능만검도 마력이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소무상검 자체가 워낙 공격적인 무공이었기에 진령 5성 정점이면 용 비늘을 뚫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요더는 지난 며칠간 이들의 일방적 공격을 막아내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요더는 진짜 녹색용이 아니었다. 현재 모습은 드루이드 비술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얻은 것일 뿐, 용족의 형상을 유지하는 데만도 시시각각 적지 않은 힘이 소모됐다. 그러니 전투가 길어질수록 힘이 부치는 게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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