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9
제579장 포로
‘마력도 무공도 분명 나보다 한 수 아래이건만, 저런 놈에게 당하다니!’
잠시 가슴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천제현이 손가락에 맺힌 녹색 광선으로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주(主)정령까지 불러내지 않은 건 지나치게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래간만에 만난 대등한 적수와의 싸움을 무학 정신을 가다듬는 기회로 삼으려던 게 더 큰 이유였다.
한편 남궁혜는 현무종 종주 금규를 상대로 악전고투 중이었다.
역시 대국의 종파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천검문의 능응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주들 역시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남궁혜는 천제현보다 높은 마력에 정령과 무공 역시 초일류였다. 주 정령을 배제한다면 전투력 또한 천제현보다 한 수 위, 그런 남궁혜가 금규를 상대로는 아슬아슬하게 대등한 싸움을 이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나머지 세 종주의 전투력도 만만치 않았다.
새끼 여우는 마수들을 조종해 장응국 장수들을 잡아두기만도 바쁜 상황이었다.
전반적으로 천제현 쪽이 밀리는 듯해 보였다. 기적성에서 데려온 숲의 고수들도 종주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출격!”
열여덟 신혈강시가 포위 공격에 나섰다.
신혈강시들은 단순히 마력만 진령 3성급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대주국 종주들이라 해도 대적하기 까다로운 상대, 이들이 가세하자마자 남궁혜는 아까보다 한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천제현은 검을 들고 장응국 장수들에게로 돌진했다. 예리한 검광이 망토를 찢자 그 밑에 숨겨져 있던 마수령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똑똑히 보십시오! 이게 바로 천검문이 끌어들인 조력자의 정체입니다!”
천제현 손 안에서 검이 점점 더 속도를 더하면서 마수령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약왕곡, 신기당, 영허동, 현무종. 동시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개중 몇몇만 마수령이 섞여 있었다면 그나마 이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원이 마수령이라니. 거기다 복장부터 몸에 지닌 표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한 판에서 찍어낸 듯 똑같았다.
고의가 아니고서야 천검문이 공봉이랍시고 모조리 한 패거리들만을 불러들였을 수는 없었다.
이건 장응전국이 천검문에 버젓이 정규부대를 심어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잘 봤습니까?”
천제현이 마수령들을 계속해서 베어 넘기며 외쳤다.
“천검문이야말로 대주국을 갉아먹는 진짜 암 덩어리입니다. 놈들한테 빌붙어 현음종을 멸하고 나면 과연 그 끝이 좋을 것 같습니까? 그러면 대주국은 얼마 못 가 장응전국의 목장으로 전락하고 만다고요!”
“수하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르세요. 절대 해치지 않겠습니다.”
“넘어가지 마!”
마수령 하나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혼돈의 숲에서 온 놈들이다. 현음종이 혼돈의 숲과 손을 잡은 거라고! 애초에 동기가 불순한 놈들이야. 저 소리 역시 기만전술일 뿐이다!”
천제현이 코웃음을 쳤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공간이동!
불타는 천제현의 검이 마수령을 단숨에 두 동강 냈다.
지켜보던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조금 전 능응을 상대할 때는 설마 전력을 다하지 않았단 말인가?’
“죽어라!”
이때 늑대족 고수 하나가 쌍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러자 화염에 휩싸인 유명검이 적을 향해 뻗어 나갔다. 천제현은 상대의 공격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손에 든 검을 일직선으로 내지를 뿐이었다. 늑대족 고수의 표정이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치 바위가 물방울을 튕겨내듯 천제현은 모든 공격을 튕겨내고 있었다.
그 사이 유명검이 늑대족의 코앞에 도달했다.
“크허억!”
늑대족 고수의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상대의 어지러운 공격을 기민하게 뚫고 들어간 천제현의 검이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맹렬한 유명화가 적의 몸뚱이를 재로 만들어 버렸다.
“끝까지 제안을 거부한다면.”
검을 들고 곧게 선 천제현이 살기등등하게 말했다.
“지금 이자와 같은 꼴로 만들어줄 수밖에요.”
종파 지도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도망쳐!”
“내빼시겠다?”
재빠르게 몸을 날린 천제현이 검으로 원진남의 기계갑옷을 내리치자 콰지직하는 파열음이 울렸다. 원진남은 천제현의 기세에 밀려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신혈강시 열여덟에 천제현, 남궁혜까지!
스무 명의 절정고수가 합공을 시작했다.
싸움이 마무리되기까지는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대주국을 대표하는 종파 지도자들은 어느새 피떡이 된 채로 바닥에 누워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어디 더 까불어보시지!”
남궁혜가 금규를 힘껏 걷어차며 빈정거렸다.
“자신 있으면 다시 붙어보자고!”
“아가씨, 그만요. 포박부터 하죠.”
“응, 대장!”
천제현이 태음산 저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부로 대주국은 완전히 새로 태어날 겁니다!”
***
태음산 기슭은 서로 뒤얽혀 싸우는 6대 문파 제자들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음무극이 이끄는 현음종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다른 문파 제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멈추시오!”
“다들 당장 멈추시오!”
“다섯 문파의 장문과 장로들이 내 손 안에 있소.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지 않으면 이들은 죽은 목숨이오. 물론 다음 차례는 당신들일 테고.”
산마루에 설치된 거대 확성기에서 천제현의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 몸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부디 내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은 안 하길 바라겠소!”
이때 남궁혜가 밧줄로 칭칭 동여맨 포로들을 절벽 가장자리에 일렬로 세웠다.
‘장문님과 장로님들이 모조리 붙잡히다니!’
5대 영산 술사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땅바닥에 떨어졌다. 안 그래도 밀리던 상황에서 이제 장문까지 적의 손에 붙잡혔으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더 싸우겠는가?
확성기에서 천제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 사태는 천검문의 음모였소! 제 이익에만 눈이 먼 천검문이 장응전국을 끌어들여 대주국의 다른 종파들을 쓸어 버리려 한 것이오. 천벌을 받을 짓이지!”
남궁혜가 이번에는 장응국 장수들의 시신을 내보였다.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시오. 이자들이 바로 장응국 공봉이오. 시체에서 나온 증거물로 이미 신분을 확인했소. 대주국을 배반한 천검문이야말로 진짜 적이란 말이오!”
산기슭이 한층 소란스러워졌다.
천검문을 바라보는 나머지 사대 문파 제자들의 눈에는 경계심이 뚜렷했다.
“헛소리!”
“천검문은 만 년을 이어져 내려온 대주국 최고 문파다! 장응국에 붙을 리가 없다고!”
천검문 제자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천제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검문은 순식간에 공분의 대상이 될 것이고, 그럼 자기들한테도 날벼락이 떨어질 게 뻔했다.
천제현이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믿든 말든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소. 다시 한 번 반복하겠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용서를 받겠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가차 없는 응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지금부터 10초 안에 모든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그게 싫다면야 여기 있는 종주와 장로들부터 황천길로 보내주고 당신들도 곧 따라가게 해주리다!”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던 제자들이 결국 하나둘 무기를 내려놨다.
그 모습을 본 천제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해결이 난 것이다. 천제현이 곧장 음무극을 향해 말했다.
“저들을 모조리 포박하세요. 다쳤거나 중독된 자들은 치료해주고요. 절대 죽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이로써 현음종의 위기는 무사히 해결됐다.
손에 들어온 포로의 수만 해도 무려 30만 명 이상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예방하고자 현음종 전원이 나서 이들의 감시역을 맡기로 했다. 천제현이 대주국에 온 건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풍부한 인재와 절묘한 지정학적 위치, 풍요로운 자원과 드넓은 미개척 시장. 그가 대주국에 발을 디딘 건 이러한 조건들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이 땅을 발전시키러 온 천제현에게 살육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곧장 상회에 치료약과 해독제, 충분한 식량을 조달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포로들의 목숨부터 살리는 게 먼저였다.
“들어가! 들어가랬지! 썩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라고! 꿇어!”
남궁혜가 주먹질에 발길질로도 모자라 쇠망치까지 휘둘러가며 사대 종파 장문들을 거지 떼 몰듯이 몰아 천제현 앞으로 데려왔다.
“확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까보다!”
“제가 몇 번을 말해요. 뭐든 폭력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니까요.”
아까와는 생판 다른 사람이 된 듯, 천제현이 짐짓 점잖은 말투로 남궁혜를 꾸짖었다.
“배운 사람들끼리 왜 이러실까. 상대의 마음은 폭력이 아니라 덕을 베풀어 얻는 거라니까요.”
남궁혜가 불만스러운 듯 눈을 흘겼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 불찰로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군요.”
천제현이 네 사람 앞에서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가씨, 사죄의 뜻으로 얼른 가서 차라도 좀 내와요!”
남궁혜가 도끼눈을 떴다.
“사죄라니 지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당장 고자를 만들어놔도 시원치 않을 판에!”
원진남을 비롯해 대주국을 대표하는 네 고수는 순간 사타구니 사이로 섬뜩한 한기가 지나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천제현이 못 말린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 자, 긴장하지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나 나눠보죠. 저는 대주국 왕실을 다시 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심빙우 공주를 여왕 자리에 앉힐 생각입니다. 그 일만 도와주시겠다면야 지난 과오는 모두 없던 셈 치고 지금 당장 돌려보내 드릴 수도 있고요.”
“네가 무슨 권리로!”
금규가 푸르딩딩하게 멍든 얼굴을 들고는 핏발 선 눈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이방인 주제에 무슨 권리로 대주국 일에 끼어드는 거냐!”
“혈기가 넘치는 게 역시 사나이 대장부다우십니다.”
반달처럼 휜 눈으로 사람 좋게 웃던 천제현이 남궁혜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신호를 받은 남궁혜가 곧장 금규를 바닥에 눕히더니 구둣발로 사타구니 사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신장 7척에 달하는 거한이 곰처럼 울부짖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금규를 거칠게 잡아 일으켜 세운 남궁혜가 이번에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 들었다.
“방금 건 경고였어. 대접 좀 해준다고 또 주제 모르고 설치면 그때는 다리 사이에 달린 방울 두 개를 썰어서 목구멍에 쑤셔 넣어줄 줄 알라고!”
금규가 악을 썼다.
“그럴 배짱이 있거든 차라리 죽여라! 이런 치욕을 당하느니 현무교의 명예를 지키고 죽겠다!”
“아, 그러셔?”
남궁혜가 막 단도를 놀리려던 때였다.
“아가씨, 아가씨, 당장 그만둬요. 아까 한 말을 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거예요? 배운 사람은 폭력이 아니라 덕으로 상대의 마음을 얻는 거라고 했잖아요.”
천제현이 황급히 남궁혜를 말렸다.
“참 대쪽같은 분이신데, 존경은 못 할지언정 난처하게 만들지는 말아야죠.”
천제현이 이번에는 나머지 인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 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영허동의 고연산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긴말이 필요할까, 여기서 굴복한다면 우리를 믿고 만 년 역사의 종파를 맡기신 선대 어르신들을 볼 낯이 없지.”
“옳소!”
약왕곡의 옹천운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협박과 회유를 동시에 쓰다니 영리하군. 하지만 우리가 굴복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신기당 원진남은 노기충천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죽이든 살리든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하나같이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자들이었다.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다.
남궁혜의 눈썹이 꿈틀대며 그녀의 대폭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 번 흠씬 두들겨 패주면 알아서 고분고분해지리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그리 뻣뻣하게 굳어계실 것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