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8
제578장 태음산 전투(2)
한편 태음산에서 전세를 관망하던 천제현은 갑작스러운 알파브레인의 경고메시지를 전달받았다.
“성주님, 강력한 신호가 접근 중입니다. 회피 또는 차단 조치할까요?”
“고맙게도 제 발로 찾아와주는군.”
천제현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둬.”
“캬오오!”
분지 중앙에 수십 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강력한 3급 비행마수 무리였다. 마수 위에는 망토를 두른 인물들과 5대 영산의 지도자들이 타고 있었다. 천제현을 노리고 전장을 빙 돌아 접근한 것이었다.
진령급 고수들은 독안개 속에서도 상당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기에 분지 상공에 나타난 인물 대부분은 멀쩡한 상태였다.
“쥐새끼 같은 놈, 죽어라!”
가장 선두의 검독수리에 탄 능응이 수백 미터 밖에서 거대한 검기를 날렸다. 수많은 칼날이 모여 수십 미터 길이의 커다란 검으로 뭉친 형태였다. 위협적인 살기가 천제현을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다.
“엄청난 검기로군!”
“검법으로는 대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더니, 역시 꽤 하는걸!”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남궁혜가 검기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화염에 휩싸인 그녀의 몸에서 봉황이 솟구쳐 올라 거대한 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충격으로 가루가 된 검기의 편린이 화염을 뚫고 남궁혜를 덮쳤지만, 그녀는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치기만 했을 뿐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능응이 코웃음을 쳤다.
“이곳 사람도 아니면서 왜 대주국 일에 관여하는 거지? 공주인지 뭔지도 네놈들이 만들어낸 것이렷다!”
천제현이 여유로운 웃음으로 응수했다.
“현음종을 통해 대주왕국에 힘을 실어주려는 우리가 그래도 장응전국과 결탁해 대주국을 분열시키려는 천검문보다는 백번 나은 것 같은데.”
“뭐라?”
원진남을 비롯한 각 종파 장로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천제현의 시선이 망토를 두른 천검문 공봉들에게로 옮겨갔다.
“이쪽은 장응전국에서 온 장수들 같군요. 여러분, 천검문은 장응전국의 끄나풀이 된 지 오래입니다. 나라 잃고 뒤늦게 땅을 치느니 현음종처럼 기적성과 손잡고 번영을 이룩하는 게 어떻습니까?”
‘천검문이 데려온 공봉이 장응전국 놈들이었다고?’
장응전국은 영토 확장의 야욕으로 똘똘 뭉친 거대세력이었다. 장응국의 입김이 대주국 안까지 미치고 있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기계갑옷 안에서 흘러나온 원진남의 음성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능응, 사실이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헛소리입니다!”
능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잘들 보십시오. 쓰는 무기만 괴상한 게 아니라 수하들도 하나같이 이종족이 아닙니까. 십중팔구 혼돈의 숲에서 왔을 겁니다. 인간도 아닌 것들이 무슨 꿍꿍이일 줄 알고!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 틈을 타 망토를 두른 자들이 마수를 조종해 공격을 개시했다.
천제현 일행은 전부 숲에서 내놓으라 하는 고수들이었지만, 수적 열세 탓에 이대로 맞붙었다가는 크게 피를 볼 판이었다.
바로 이때 새끼 여우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뛰어나왔다. 여우의 앙증맞은 몸집이 거대하게 부푼 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 순간 장응국 장수들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마수들이 돌연 통제를 벗어나 날뛰는 것이었다. 새끼 여우의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강력한 마수 수십 마리를 동시에 조종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으나 마수들을 흥분해 날뛰게 하는 것쯤은 그간 급속도로 성장한 새끼 여우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캬오오!”
급기야 마수들이 서로 물어뜯고 할퀴며 싸우기 시작하자 능응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마수를 포기하고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돌격!”
능응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천제현 역시 불타는 유명검을 뽑아 들고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맞부딪친 두 개의 칼날은 삽시간에 서로의 힘을 상쇄시켰다.
“아오, 이것들이 누굴 만만하게 보고!”
남궁혜가 숲의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나를 따르라!”
대주국 최강 종파의 부종주 능응은 진령 4성급, 린지아와도 근소한 차이밖에 나지 않는 고수였다. 게다가 천검문은 수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검술 종파였다. 무공이건 비술이건 대륙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수준을 자랑했다.
이런 인물을 상대하는 게 어디 쉬울 리가 있겠는가.
능응이 쓰는 무공은 정통 어검술이었다. 한때 중주를 주름잡았던 천재 천성하 역시 비슷한 어검술을 썼으나 천검문 쪽의 초식이 훨씬 더 위력적이면서도 자유분방했다.
천제현은 대하국을 떠난 이후로 제대로 된 적수와 붙어보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한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을 쓰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니겠는가?
능응이 팔을 뻗어 검광을 흩뿌렸다. 천제현을 표적으로 기민하게 날아드는 수십 개의 칼날은 하나하나 강력한 검기가 뭉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속도!
천제현이 순간적으로 유명순염을 시전하며 물러서자 목표물을 놓친 칼날들이 서로 맞부딪쳐 얽히더니 거대한 검 한 자루로 합쳐졌다. 무섭게 쇄도하는 칼끝에 천제현도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감췄던 신형을 드러낸 천제현이 양손으로 검을 들어 능응의 공격을 받아냈다.
발밑의 지면이 쩌저적 갈라지며 내려앉았다.
칼날을 통해 전해지는 무지막지한 압력에 천제현 역시 땅속까지 짓눌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검!”
천제현의 나지막한 외침에 신마검이 위용을 드러냈다. 검의 위력을 열 배나 올려 겨우 막아냈다 싶었는데, 그 순간 상대의 칼끝이 다시 무수한 갈래로 펼쳐지더니 거대한 그물처럼 천제현을 포위했다.
‘이건…… 검기로 짜인 그물?’
능응이 손바닥을 가슴 앞으로 모으자 그물이 촘촘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금강역사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물론 검기가 제아무리 조여들더라도 불멸체의 방어력을 뚫을 수는 없었으나 진짜 그물에 걸린 것처럼 천제현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건 가능했다. 천제현은 무슨 수를 써도 이 빽빽하게 얽힌 백색 검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 모든 마력을 태울 수 있는 유명화가 있었다.
곧장 그물에 유명화를 갖다 댔지만 검기가 타들어 가는 속도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고작 그 실력으로 천검문의 검술에 도전해? 네놈 따위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다. 죽어라!”
경멸의 눈빛으로 천제현을 쏘아보던 능응이 오른손으로 재빨리 검을 거둬들이면서 왼손으로는 인을 맺었다.
“소무상공검지!”
능응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콰앙!
천제현의 몸 위에서 강렬한 검기가 폭발을 일으켰다. 성광불멸체마저 일순간 확연히 어두워질 만큼의 충격이었다. 폭발력에 밀린 천제현은 저만치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능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숨이 붙어 있다니! 세상에 소무상검을 막아내는 방어무공이 존재했단 말인가!’
돌연 맹렬하게 기세를 더한 유명화가 천제현의 몸을 휘감은 검기를 태워 끊어냈다. 일렁이는 화염 속에서 몸을 일으킨 천제현은 아까보다 체격이 커진 것처럼 보였다. 갑옷처럼 전신을 둘러싼 불꽃 탓에 지금 그의 모습은 흡사 화염의 악마를 연상케 했다.
“훌륭한 검결이지만 시전자의 수준이 아쉽군 그래.”
“버러지 주제에 감히 천검문의 절학 소무상검을 논하다니! 장문 사형과 같은 대성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어도 너 따위를 해치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럼 어디 해보시지!”
눈 깜짝할 사이에 여섯 명으로 늘어난 천제현이 필살기를 시전했다.
“받아라, 유명분신참!”
“소무상공검지!”
능응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공격 궤적을 채 포착해내지 못한 여섯 명의 천제현은 동시다발적으로 검기에 적중당했다. 분신 다섯은 그 자리에서 파괴됐고 본체는 아까처럼 붕 날아가 내동댕이쳐졌다. 몸을 일으킨 천제현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염마변 태세마저 해제된 상태였다.
‘강하다!’
이토록 종잡을 수 없는 검법은 처음이었다.
소무상검.
그림자도 없고 형태도 없기에 절대 예측불허인 무색무상의 검. 이름 그대로가 아닌가.
능응의 검결은 언뜻 간결해 보이지만 사실 마력 소모가 엄청났다. 자신에게도 부담인 무상검을 두 번이나 연속해서 시전한 건 오로지 천제현을 없애겠다는 일념 탓이었다. 그런데 천하무적이라 불리는 천검문의 절학이 저 새파란 애송이 하나를 처치 못 할 줄이야.
소무상검은 그 자체로도 당대 최고의 절학이었다.
게다가 시전자의 마력 역시 상대보다 한참 위였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야 누구도 지금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으리라.
사실 천제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궤적이 읽히지 않는 무공은 소무상검이 처음이었다. 시전과 동시에 곧장 목표물의 신체에서 폭발하는 듯한 공격이었다.
원래 능응의 공검지에 당하면 몸이 안쪽에서부터 터져나가 죽게 된다.
천제현은 성광불멸체를 신기 경지까지 익힌 덕에 세포 하나하나가 방어력을 띠고 있어 공검지의 위력이 몸 안에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성광불멸체를 제외하면 그 어떤 방어 비술로도 이 무색무상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대주국과 이 시대, 천제현은 둘 다를 너무 얕잡아봤다.
“소무상공검참!”
능응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폭발적인 살기와 함께 검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맹렬한 공격이 곧장 쇄도했다.
역시 이번에도 궤적이 읽히지 않았다.
‘위험하다!’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천제현이 급하게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형태 없는 검기가 그를 강타했다. 불멸체의 힘조차 일부 날려 버렸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비틀거리며 물러서던 천제현의 입가에 한줄기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불멸체로도 충격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해 볼 셈인가?”
능응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지만, 기세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이었다. 그의 검이 천제현을 겨눴다.
“너는 내 검을 피하지도, 내 곁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그런 주제에 계속 싸우겠다는 거냐!”
“후후, 허세는.”
천제현이 입가의 피를 슥 문질러 닦아냈다.
“날 죽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쓸데없는 소리는 왜 늘어놓고 있는 거지? 회복 시간을 벌어보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 날 처치할 만큼 그 검법을 제대로 익히기는 한 건가?”
마치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한 듯 능응의 두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천제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천검산에서 썩게 두기는 아까운 검결이군. 차라리 이 몸이 익혀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해줄까 싶은데, 어때?”
“죽여 버리겠다!”
마력을 응집시켜 검결을 다시 시전하려던 찰나, 능응은 천제현의 눈에 반짝하고 빛이 스치는 것을 봤다. 돌연 등골을 타고 불길한 예감이 번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땅바닥이 폭발하듯 갈라졌다.
땅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열여덟 개의 암황색 그림자였다.
신혈강시!
수차례 강화를 거치면서 신혈강시들은 이제 진령 3성에 도달했다. 게다가 상대는 예상치 못한 이들의 가세에 극히 당황한 상태, 지금이라면 100% 능응을 처치할 수 있었다.
“소무상공검참!”
능응이 재빠르게 19개 목표물을 향해 검을 날렸다. 소무상검은 무상무형의 변화무쌍한 검술, 한 번에 여러 개의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단지 대상의 수가 늘어날수록 위력이 약해질 뿐이었다.
열여덟 신혈강시가 모두 저만치 튕겨 나갔다.
그러나 천제현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천제현이 흩뿌린 검기가 기다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 능응을 정확하게 반으로 갈랐다.
“네놈이…….”
능응의 사지가 분하다는 듯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