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2
제572장 위기 해결
숲의 수호자, 세나리우스. 그를 잊고 있었다니.
세나리우스는 혼돈의 숲 최고 고수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이끄는 엔트족 또한 어떤 세력보다도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다만 일족 전체의 수가 많지 않은데다가 백 년 가까이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고, 다른 부족과 마찰을 빚는 일도 극도로 드물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잊혀졌을 뿐이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엔트족이 엘프들의 편에 설 것이라는 건 누구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두 종족은 공통점이 아주 많았으니까. 엔트족과 엘프족은 모두 고대 생명수를 지고지상의 신물로 여겨 왔다. 생명수의 힘에 의해 그들의 선조가 태어났고, 힘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엘프족과 엔트족이 힘을 합쳐 싸운다면 승률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어쩌면 몇 년이 지나도 전투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숲 전체가 전쟁의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영원의 숲이 오랫동안 지켜온 이미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사악해서 툭하면 다른 이를 침략하는 호랑이와, 똑같이 힘은 세지만 현실에 만족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코끼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둘이 싸운다면 주변에선 누굴 돕겠는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양측의 힘이 비등해서 승부가 나지 않게 되면, 여태까지 중립을 유지해왔던 숲의 부족들은 100% 영원의 숲에 붙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힘에 있어서도 열세에 처하게 된다.
클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엔트족들은 가뜩이나 숫자도 적지 않은가. 괜히 전투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멸족할 수도 있다. 그것이 두렵지 않은가?”
“모든 엔트족들은 생명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
세나리우스의 말은 몹시 느리고 반응도 둔한 편이었으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해 봐도 좋다.”
그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엔트족은 허풍이란 걸 모르는 종족이다.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엔트족은 감정조차 거의 없는 벽창호들이었다.
또한, 생명수에 대한 엔트족의 숭배는 나무 엘프족보다도 강했다. 생명수는 엔트족의 아버지이자 신이었으니까.
현장의 분위기가 일시에 경색되었다.
“좋소. 천 년 동안 꿈쩍도 안 하던 세나리우스까지 나타났으니 체면을 세워줘야겠지.”
데스윙이 먼저 입장을 밝혔다.
“나는 기적성의 독립을 지지하오.”
데스윙이 이렇게 말한 마당에 클로와 썬더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물론 그건 진심으로 기적성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잠시 숨 돌릴 틈을 얻고자 내놓은 계략에 불과했다. 생명수가 영원의 숲에 완전히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엔트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진짜 까다로운 상대는 나무 엘프족이었다.
한편, 오거스트는 이 상황이 매우 불만스러웠다. 한참을 아웅다웅했는데도 생명수 회수는 고사하고 기적성의 독립만 확실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엘프왕 랜스로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엘프족도 동의하겠소.”
“폐하!”
“이게 최선이오.”
엘프왕이 오거스트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의장께서도 혼돈의 숲이 피바다로 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거라 믿소만!”
그 말은 맞았다.
이게 최선이리라.
삼대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수가 완전히 영원의 숲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만회할 여지가 있었고, 엘프족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수를 손에 넣진 못했지만 전송탑이 생겼으므로 언제든 원할 때 기적성에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세나리우스가 기적성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엔트족은 엘프족과 매우 가까운 종족이다. 그러니 언젠가 엘프족에게 기회가 생길 것이다.
양측이 한 걸음씩만 물러서면 혼돈의 숲은 종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대치한다면 둘 모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엘프왕은 더 멀리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기적성을 통해 엘프족의 개혁을 계획 중인 그에게는 계기가 필요했다.
“좋소!”
썬더가 세나리우스를 보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세나리우스 님이 증인이 되어 주시구려. 엔트족은 맹세를 어기지 않는 종족이라 들었소.”
그러자 세나리우스가 결연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우리 엔트족은 숲의 수호자의 이름으로 기적성이 영원히 중립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할 것이며, 기적성주 천제현을 지킬 것이다. 엘프, 거룡, 타이탄, 베헤모스를 포함한 숲의 종족 그 누구라도 감히 기적성을 침략하거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수단으로 생명수 또는 기적성을 점유하려 할 때는 엔트족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엔트족은 맹세를 어기지 않는다.
하물며 세나리우스 같은 인물이 한 맹세임에야.
그의 맹세는 어떤 계약보다도 효력이 강했다. 이제 기적성이 엘프족의 손 안에 들어가는 것만은 저지한 셈이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졌기에 각 종족은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고,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해결방법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랜스로드, 약속을 지키기를 바라오!”
“그럼 이만!”
데스윙, 클로, 썬더는 허둥지둥 기적성을 떠났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기적성에 온 그들이었고, 계약도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기 위해 맺은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으로 돌아가 기적성과 생명수 처리 문제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볼 심산이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 엘프의원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고, 다른 세력들도 봐주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겨우 일이 일단락 났건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약소세력인 기적성만이 어부지리를 취했을 뿐. 상황의 변화가 어찌나 빠른지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흥!”
오거스트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영원의 숲으로 돌아가 회의를 진행합시다!”
엘프왕 부녀를 제외한 나머지 엘프들이 하나씩 기적성을 빠져나갔다.
“하하, 정말 위험했습니다!”
천제현은 세나리우스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에게선 간신히 위기를 넘긴 후의 긴장감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천제현은 시시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때 나타나 주셔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 자리가 위태로워질 뻔했습니다!”
“생명수의 싹을 틔운 그대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세나리우스의 말은 몹시 느렸으나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엔트족은 온 힘을 다해 생명수의 성장을 도울 것이며, 그대가 마땅한 권리를 누리도록 지켜줄 것이다.”
공화련이 확인 차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숲의 수호자님,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몇 명의 엔트족이 기적성을 지켜주실 것인지요?”
“엔트족 모두가 올 것이다.”
“모두라고요?!”
“단, 엔트족은 맹세를 지킬 뿐, 기적성의 명령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엔트족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적성 주변 산맥에 수만 엔트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강력한 방어막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적성은 더 이상 외부의 침입자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대 세력 중 하나가 다시 못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누군가 기적성 안쪽까지 들어오는 일은 없으리라.
“큰아가씨, 서련 아가씨, 뭘 멍하니 있어요?”
천제현이 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엔트족 친구분들을 위해 살 곳을 마련해 드려야죠!”
“아, 응!”
세나리우스는 엔트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으므로 기적화원에 거처를 마련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하면 생명수는 물론이고 화원에서 자라는 각종 진귀한 약재들까지 보호 받을 테니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엔트족은 기적성 안팎에 고루 거처를 마련해 주되, 성 주변 숲에 집중 배치했다. 엔트족은 몇 십 년, 심지어 몇 백 년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서 살 수 있는 종족이다. 그렇게 정적인 종족이기에 강력한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기적성에는 생명체탐지레이더까지 있으니 이제 적이 육해공 어느 곳에서 침입한다 하더라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엘프왕이 비비안을 데리고 기적성으로 다가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그대의 성주 자리를 위협할 숲의 세력은 없을 것 같군. 그대도 두 발 편히 뻗고 잘 수 있겠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근근이 목숨만 유지할 뿐이지요.”
“아바마마!”
비비안이 엘프왕을 재촉하는 투로 말했다.
“그 말씀을 하셔야죠.”
“뭘 그리 서두르느냐?”
엘프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후 천제현을 보며 말했다.
“비비안이 말하더군. 기적성의 은행에서 예금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이야. 맡긴 금액과 거치 기간이 길수록 이자가 길다고 들었네.”
비비안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엘프족에는 굴러다니는 마석이 아주 많아. 숲에 방치하느니 기적은행에 맡겨 이자를 받는 게 좋겠지. 아바마마는 그 옹고집 의장 때문에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만, 돈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로우시거든.”
천제현은 즉각적으로 비비안의 속내를 알아챘다.
‘기적성의 자금난을 해결해주려고 하는구나.’
“좋습니다. 얼마나 맡기시려고요?”
천제현은 한 마디 덧붙였다.
“엘프왕 폐하께서 직접 저희 서비스를 이용해 주신다니 최고 금리로 보답해 드려야겠죠. 손해 보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일단 마석 15만 개.”
비비안이 엘프왕 대신 입을 열었다.
“1년 동안 맡길게!”
그 말을 들은 천제현의 눈이 반짝였다.
‘엄청나군!’
사실 현재 기적성의 재정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마석 15만 개면 가뭄에 단비처럼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1년 만기로 50%의 이자를 제공하겠습니다.”
천제현은 엘프왕을 보며 말했다.
“사실 현재 기적성의 경제 상황이 몹시 좋지 않거든요. 한계에 이르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1년에 이자 50%라고?’
기적은행의 이자가 이렇게 높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엘프왕은 깜짝 놀랐다.
마석 15만 개를 1년 동안 거치하기만 하면 22만 5천 개로 불어나는 것이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거상들도 그 정도의 수익을 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놀고 있는 마석을 다른 곳에 잠깐 맡기는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이익을 거둬들일 수 있다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네.”
엘프왕이 신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자가 없어도 된다는 말일세.”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비비안의 표정을 본 천제현은 경계심이 들어 물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긴장할 것 없네.”
엘프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저 알파브레인 한 대를 사고 싶을 뿐이니까.”
‘알파브레인까지 알아? 기적성에 대해 모르는 게 없군.’
기적상회에는 이미 알파브레인이 네다섯 대나 있으니 한 대쯤 줘봤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마석 15만 개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게다가 엘프왕의 체면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엔트족의 보호도 약속 받고 엘프왕의 투자도 얻어내다니! 겹경사로구나.’
군사적 위기와 재정 위기가 한 번에 해결된 것이다.
이번에는 공씨 자매는 물론이고 남궁혜, 델로리스, 나아가 기적성의 모든 주민들이 기쁨을 금치 못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지 않는가. 이 엄청난 위기에서 살아남았으니 이제 그에 상응하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