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1
제571장 대치
너무 갑작스럽게 등장한 목소리였다. 클로, 썬더, 데스윙은 모두 엘프 외의 생물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혼돈의 숲에서 별다른 세력을 갖추지 못한 인간종족은 주로 외부인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더욱이 이렇게 보잘것없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 따위.
거물들의 극렬한 대치 순간에.
갑자기 파충류가 주변을 지나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벌레가 맞이할 결과가 무엇이겠나? 밟혀 죽는 것뿐이리라.
“보잘 것 없는 놈이 감히 어딜 나서! 죽어라!”
사나운 발톱이 날아가며 수 장 높이의 선홍빛 회오리를 일으켰다. 발톱은 땅을 종잇장처럼 찢으며 파죽지세로 천제현을 향해 날아왔다. 클로가 되는대로 던진 공격의 위력은 천제현 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클로에게 있어 인간 하나를 죽이는 건 벌레 한 마리 밟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클로, 성질은 여전하군.”
랜슬로드가 숲의 지팡이를 휘두르자 천제현 주변의 땅 속에서 순식간에 수많은 나무줄기가 솟아 올라왔다. 손가락 정도 굵기의 나무줄기들은 언뜻 유약해 보였으나, 불가사의한 힘과 속도를 보이며, 번개처럼 발톱들을 막아냈다. 그러자 회오리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제 달갑지 않은 표정이 된 건 클로와 썬더였다.
이번 엘프왕이 왕좌에 앉은 지 겨우 백 년이다. 영원의 숲은 오랫동안 분쟁에 끼어들지 않았기에, 랜슬로드도 다른 거물들과 정면으로 맞설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엘프왕의 실력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숲의 지팡이는 영원의 숲의 귀한 보물 중 하나다. 그 위력은 지팡이 소유자의 실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 엘프왕은 자신의 힘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숲의 지팡이 힘만 갖고 아주 기묘한 수법을 써서 클로의 공격을 사라지게 하고 자신은 감쪽같이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엘프왕의 마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숲의 지팡이는 본래 고대 생명수의 나뭇가지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 생명수의 힘이 뒤덮인 곳에 있는 지금, 숲의 지팡이 위력은 당연히 더 강해진다. 엘프왕은 숲의 지팡이 위력만 가지고 숲의 최고 고수 한 명과 맞섰다. 만약 그의 능력까지 더해진다면, 혼자서 두 사람도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오거스트까지 합류한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오히려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엘프왕은 클로의 흉악한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제현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엘프왕 폐하, 감사합니다.”
천제현은 시종일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사대 거물 가운데로 걸어간 그는 저 대단한 용의 위엄 앞에서도,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타이탄 앞에서도, 무시무시한 베헤모스 앞에서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거물들이 도리어 의아해졌다.
그다지 강하지도 않은 인간이 거대한 위압감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니, 원래부터 그렇게 타고났거나 간이 크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엘프왕, 베헤모스, 타이탄, 거룡 모두 인간종족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생명체다. 단순히 실력 차이에서만 오는 위협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을 직접 건드리는 일이다.
새끼 양은 멋모르고 건장한 물소를 건드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담하고 용감한 새끼 양이라 해도 사자와 호랑이 앞에 섰을 때, 그 영혼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공포는 간이 크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공포가 아니다.
더욱이 타이탄, 베헤모스, 거룡이 아닌가.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온 포악한 생물 앞에서, 인간은 어쩌면 새끼 양 수준도 못 된다.
고차원 생명체가 밑바닥 생명체를 적나라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눈빛 속에서도 천제현은 태연자약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는 이 인간의 실력이 강하든 약하든지 간에, 최소한 그 내면, 영혼 속에 강자가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감히 거룡과 대화하는, 심지어 그에게 도전하려는 강자가 말이다.
썬더는 이 인간이 조금 달리 보였다.
“너는 누구냐?”
“이 땅의 주인, 기적성 성주 천제현입니다!”
“천제현?”
데스윙의 가느다랗고 음습한 짙은 금색의 눈동자가 그를 주시했다. 개구리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독사 같은 그 모습은, 잠잠한 가운데 오싹한 한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니까 내 수하들을 해치운 게 네 녀석이렷다?”
“그 리치 말인가요? 아뇨, 아뇨, 존경하는 용의 영주님, 잘못 아신 겁니다.”
천제현은 이 흑룡이 뿜어내는 기운에 전혀 겁먹지 않고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기는요, 지금도 잘 살아 있는데요. 그저 전업을 했지요. 제로, 네 옛 주인이 오셨으니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니?”
데스윙은 어리둥절해졌다.
“존경하는 용의 영주이자 용성의 주인 데스윙 폐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가 구석에 있는 나팔을 통해 들려왔다.
“성주님께서 제게 새 생명을 주셔서 전 지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데스윙 폐하께서는 염려마십시오.”
데스윙은 안색이 변해 바로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에 있는 게냐?”
“제로는 기적성의 관리자라서, 기적성의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죠.”
천제현은 데스윙에게 이런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매우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제로는 이미 신령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죠.”
“온통 허튼소리만 하는 인간이군!”
클로가 앞으로 한발 내디뎠다.
“황야고원 샤먼교의 그린 분파도 네놈이 없앴지?”
천제현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강력하신 백수의 제왕님, 전 샤먼교를 없애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발전시켰죠. 보잘 것 없던 그린캐슬의 샤먼 분파는 이제 숲 밖으로 뻗어나가 멀리 견융초원에 세력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이건 황야고원 종단도 하기 힘든 일이잖아요? 그러니 전 어떤 샤먼교도 없애지 않았어요. 도리어 샤먼교 발전에 이바지했다니까요!”
샤먼이 견융초원까지 발전해 나갔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 너무 좁은 안목을 가졌군요.”
천제현의 직언에 다른 사람들은 놀라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거물들을 향해 감히 안목이 좁다고 질책할 수 있는 인물은 온 숲을 통틀어 천제현뿐일 것이다.
“이 작은 혼돈의 숲 이익만 놓고 싸우다니, 설마 대륙에 이 숲 하나밖에 없겠어요? 여러분의 실력과 제 기술이면, 앞으로 대륙의 지배자가 되는 게 어렵겠냐고요!”
너무 지나친 말이다.
혼돈의 숲만 해도 아직 개발되지 못한 곳이 얼마나 많은데.
천제현의 말이 이어졌다.
“고대 생명수는 옮겨 심을 수 없고, 기적성은 넘겨줄 수 없다는 이 원칙은 변함없습니다. 누구도 바꿀 수 없어요. 물론, 여러분의 실력이면 쉽게 기적성을 탈취할 수 있겠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면 혼돈의 숲은 유례없는 대혼란을 맞을 겁니다. 생명 창조에 쓰이는 고대 생명수가 죽음과 전란의 도화선이 되도록 지켜보고 있을 건가요?”
오거스트가 반대하며 나섰다.
“고대 생명수는 엘프족 소유다. 공공연히 엘프족의 신물을 차지하려고 이런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건가!”
“틀렸어요!”
천제현이 대범하게 선포했다.
“기적성은 어떤 세력과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아요. 기적성의 안정, 천만 백성이 도탄에 빠지지 않는 것이 기적성의 존재 이유니까요. 여러분이 다들 한발만 양보만 해주시면, 기적성을 중심으로 혼돈의 숲에 공동발전특구를 만들 수 있어요. 기적상회 기술과 고대 생명수의 힘은 결국 모든 사람을 유익하게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의 숲에만 엄청난 이익인 게 아니라, 용의 고개, 타이탄산맥, 황야고원도 새로 태어나는 거예요!”
“용의 영주께서 기적상회와 협력하고자 하신다면, 기적상회의 유통경로로 앞으로 대륙 전체에서 돈을 벌게 됩니다. 재산은 지금의 열 배가 될 겁니다.”
“타이탄이 기적상회와 협력하면, 원하는 재료는 뭐든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도 따다 드릴 수 있어요. 거인들에게 더 넓은 궁전이 지어지겠죠. 그렇게 되면 거인은 지금의 열 배 이상 되는 자원을 얻을 걸요?”
“황야고원에서 기적상회와 협력하면, 대륙 최강의, 가장 선진화된 무기와 탄약을 판매하겠습니다. 혼돈의 숲을 넘어 온 사방을 쓸어 대적할 자가 없는 군대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영토는 지금의 열 배는 넘을 걸요?”
혼돈의 숲이 소식에 어둡다 해도, 이 정도 거물급 인물들은 다 비상한 수단을 가지고 있어, 최근 기적성에서 일어난 일들이며 기적성의 기술을 모를 수 없다. 최소한 일부라도 알게 마련이다.
만약 천제현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천제현은 해낼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런 거물급 인물들이 동의할까? 숲 속 중앙에 기적성을 중심으로 하는 특구를 건설한다는 건, 이 4개 세력 외에 또 하나의 세력을 직접 키우겠다는 것 아닌가? 만약 기적성 실력이 커져서, 도끼로 제 발등을 찍게 되면 어쩌나.
“특별구역 건립의견에 찬성하네!”
엘프왕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기적성은 중대한 이익과 갈등과 연관된 곳이니 모두 한걸음 물러나는 게 낫지. 엘프족은 기적성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이 되겠다!”
오거스트는 이 결정에 불만이었다. 엘프족이 이 인간종족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있을까? 천제현의 잠재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아직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닌데.
데스윙, 썬더, 클로는 더 불만이었다.
기적성과 영원의 숲은 원래 관계가 깊고, 기적성의 부성주 중 하나는 영원의 숲에서 왔다. 만약 기적성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천제현 일행에게 계속 고대 생명수 재배를 맡긴다면, 결국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건 영원의 숲이 아닌가?
“나는 천제현의 의견에 동의하네!”
세 거물들이 아직 입장을 밝히지 못한 이때, 땅에서 깊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나리우스!”
거물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이에 기적성 외부구역에 수백 명의 엔트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바로 ‘숲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엔트족 족장, 세나리우스였다.
천제현은 세나리우스가 나타난 것을 보고 한시름 놓았다.
“드디어 오셨군요!”
세나리우스가 천천히 굳건한 걸음을 내디뎠다.
“엔트족은 고대 생명수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네. 고대 생명수를 파괴하거나 해치려는 자는 모두 엔트족의 적이야! 천제현 성주의 의견에 찬성하네. 엔트족은 모두 기적성으로 이주해 지금부터 기적성을 위해 방어선을 구축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