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7
제567장 엘프왕의 등장
칼의 마력과 실력은 혼돈의 숲에서도 일류 고수 수준이다. 그렇기에 성주 자리에 오른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실력자가 상대의 습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상대의 공격이 자신에게 미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시 말해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방금 그 공격으로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지?
칼을 죽일 이유가 없거나, 아주 손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절호의 기회도 아닌 지금 이 틈에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던 게다.
모두가 지켜보는 사이, 화원에 어느 새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했다.
온화하고 기품 있는 중년 엘프였다. 엘프족에서도 흠 잡을 데 없는 준수한 외모, 몸에서 어떤 마력 파동도 느껴지지 않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긴 녹색 도포 차림에 화려하지 않은 왕관을 썼고, 오른손에는 긴 지팡이를 쥔 채 등 뒤로 은백색 망토를 휘날리고 있었다.
천제현 일행의 머릿속에 전설 속 이름이 떠올랐다.
엘프왕 랜슬로드.
영원의 숲에서 엘프왕의 진짜 얼굴을 본 이는 드물다. 천제현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비안이 이야기한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랜슬로드가 틀림없다.
방금 엘프왕이 발휘한 힘은 바로 손에 쥔 ‘숲의 지팡이’에서 나왔다. 혼돈시대 고대 생명수 나뭇가지로 만든 이 지팡이는 아주 신비롭고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혼돈의 숲에서 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 엘프왕 외에 누가 있으랴.
엘프왕의 첫인상은 제왕이라기보다는 책을 많이 읽는 학자나 매력적인 음유시인 같았다.
칼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위험한 냄새를 맡은 야수처럼 이마 위로 핏줄이 불거져 나와 인상이 흉악해졌다. 살짝 수축된 두 눈동자로 살의가 아닌 긴장감이 묻어났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을 마친 사냥꾼 바지 주머니에 누가 시뻘겋게 타는 숯을 집어넣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엘프왕은 매끈하고 흠 없는 옥 조각 같았다. 별 다른 장식도 없는 수수한 지팡이가 땅에 꽂혔다. 별다른 마력 파동 하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화원 전체가 이미 이 강자의 영역이 되었음을, 언제 어디서든 그 힘이 표출될 수 있음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널 죽이지 않을 테니, 물러가라.”
엘프왕의 말투는 위협이라기보다 오래된 친구를 달래며 간곡히 부탁하는 것 같았다.
칼의 눈은 줄곧 천제현을 향했으나, 그 신식과 정신은 엘프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제현 일행은 이미 구경꾼이 됐다.
순간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화원 속 시간마저 멈춘 듯 했다.
엘프왕의 정체를 알아챈 이는 칼 뒤에 있던 지누뿐이었다. 지누는 전기성 사람이 아니다. 젊은 시절, 혼돈의 숲을 유랑하며 떠돌던 중 엘프족과 왕래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엘프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전설 속 생명 지팡이도 알아챈 것이다.
지누는 식은땀이 나고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까딱 잘못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엘프왕이 놓아주겠다고 말했으니 오히려 큰 짐을 던 셈이다. 엘프왕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모르지만, 나타난 이상 이미 전투는 의미가 없어졌다. 지누가 칼에게 후퇴해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 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하필 이때, 지누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어어어!”
순간 칼이 소리장벽을 여러 개 형체로 변신시켜 천제현 일행을 덮쳤다.
이 엘프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영원의 숲과 관련 있거나 이 신수 때문에 온 것이겠지.
신수를 손에 넣기는 어려워졌다.
허나 최소한 이 놈들이라도 잡아가야겠다.
그렇지 못하면 이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칼이 어찌 여기서 만족하랴.
상황을 지켜본 엘프왕은 숲의 지팡이를 가볍게 땅 속으로 좀 더 깊이 집어넣었다. 그러자 엄청난 힘이 땅 전체로 퍼지고, 푸른 나무 덩굴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초음속 상태의 칼을 아주 쉽게 결박해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수십 개의 나무덩굴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종이를 뚫고 나가듯 칼의 몸을 순식간에 관통했다.
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네놈이 나를 죽이다니, 마수왕 폐하가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엘프왕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 랜슬로드 홀로 감당하겠다.”
랜슬로드.
이 이름을 듣는 순간, 칼의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두 눈은 죽은 물고기처럼 변했다. 그제야 이 처절한 패배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엘프왕이었단 말인가? 그래. 그의 손에 죽는다면, 억울하지는 않다!’
찢기는 소리와 함께 오크 성주는 산산조각 났다. 칼처럼 강한 인물도 엘프왕 앞에서는 한낱 벌레나 다름없이 일격에 완전히 끝장났다.
“저희는 엘프왕이신 줄 몰랐습니다!”
지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서둘러 몸을 굽혔다.
“저희는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퇴각하겠습니다!”
엘프왕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들은 큰 은혜라도 입은 듯 서둘러 도망쳤다.
남궁혜는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이대로 놓아주시는 건가요?”
상대는 엘프왕이었지만, 비비안과 아주 친하게 지내는 남궁혜로서는 그녀의 아버지를 대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적성을 엉망으로 해 놓은 녀석들을 이렇게 쉽게 보내는 건 너무 봐주는 것 아닌가?
물론.
기적성에게는 가장 좋은 결과였다.
엘프왕이 강해도 홀로 백만 명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전투가 조금이라도 더 계속됐다면, 기적성은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엘프왕이 칼을 제거한 것은 적군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칼의 죽음은 사대성 연합군 최고 우두머리의 부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지누가 이 소식을 전하려면 후퇴할 수밖에 없다.
엘프왕의 명성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칼이 죽고, 지누가 전기성 부대를 긴급 후퇴시켰다는 소식이 퍼지자, 군 전체가 엘프왕의 출현 소식을 알게 됐다. 그리고 각 성 군대들은 즉각 후퇴에 동참했다.
엘프왕은 혼돈의 숲 최강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출현은 영원의 숲이 관여했다는 소리다. 영원의 숲에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등장하겠는가. 게다가 영원의 숲 수준까지 갔다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전투가 아니다.
“랜슬로드 폐하, 직접 오실 줄 몰랐습니다!”
꽃의 엘프들이 기뻐하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꽃의 엘프족은 엘프족과 사이가 좋았고, 무한한 생명을 가진 루루 일행은 당연히 역대 엘프왕도 본 적이 있었다.
엘프왕 랜슬로드는 생명수로 다가가 감탄의 눈길로 3척 정도 되는 신수를 바라봤다.
“이것이 바로 고대 생명수인가? 정말 성공할 줄이야!”
“폐하, 이 모든 것은 다 천제현의 공로입니다!”
꽃의 엘프 루루가 말했다.
“천제현이 씨앗을 살려내지 못했다면, 저희가 아무리 공을 들였어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지 못했을 거예요.”
엘프왕은 천제현 일행을 훑어보았다.
공화련, 공서련은 다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영원의 숲 통치자이자 엘프족 중에서도 최강자인 엘프왕은 혼돈의 숲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강자 중 하나다. 공화련이라 해도 이런 인물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번 방법은 너무 위험했네.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도망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생명수는 어찌 됐을지 몰라.”
엘프왕의 눈은 다시 고대 생명수에게 향했다.
“이 나무는 너무 많은 이의 관심을 끌게 됐네. 영원의 숲으로 옮겨 심는 게 어떤가. 영원의 숲에서는 태양의 우물물로 성장시키면서 영원의 숲 결계로 보호해 줄 수도 있네.”
천제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엘프왕 폐하, 그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수는 일단 싹이 나면, 그 뿌리가 주변 천리에 있는 영맥과 연결되어 대지와 하나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옮겨 심으면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엘프왕 폐하.”
루루 일행이 바로 덧붙였다.
“고대 생명수는 한 번 뿌리를 내리게 되면 쉽게 옮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생명수 씨앗은 수많은 세월을 잠들어 있다가 이제야 어렵사리 깨어났습니다. 여전히 아주 약한 상태기 때문에 지금 빼내 옮기면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천제현 말만 들었다면 엘프왕은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이 교활한 녀석이 무슨 말을 꾸몄을 지 어찌 알겠나? 하지만 이제 꽃의 엘프족까지 그렇게 말하니 믿지 않을 수 없다. 대륙 최고의 정원사인 꽃의 엘프는 순진하고 선량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엘프왕을 속일 리 없기 때문이다.
엘프왕이 얼굴을 찌푸렸다.
“곤란하게 됐군!”
“어찌됐든 간에, 엘프왕께서 직접 구해주러 오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천제현은 엘프왕에게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다만 지금 기적성 상황이 엉망이라, 저희는 상황을 수습하러 가야 해서요, 모시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세요.”
그 말이 끝난 후, 천제현은 엘프왕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눈짓을 보내 몇몇을 데리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기적성이 지어진 이래 최대 참사다. 현재 그 손실이 얼마나 되는 지도 알 수가 없다. 성 내부 상황은 그래도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 해도, 외부 쪽은 상황이 좋지 않다. 토착민 부락 손해가 심각하고, 많은 공장이 파괴됐다.
공화련이 간단히 계산에 나섰다.
이번 전쟁으로 기적성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게다가 많은 물건들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그 직접적인 피해 규모는 10만 마석에 달했다. 게다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줘야 하고, 공로를 세운 병사들에게는 포상금을 줘야 했다. 안 그래도 빠듯한 재무 상황에 큰 압박이 되었다.
“이 정도만이면 그래도 다행이죠.”
델로리스는 울상이 되었다.
“기적은행은 부족들에게 금리를 절반으로 줄여줬고, 사후 복구 작업까지 맡아야 해서 이번 대출로 버는 게 없어요. 오히려 큰 손해만 입게 생겼어요.”
누구라도 우울할 만한 일이었다.
기적은행은 본래 손실 없이 안정적인 이윤을 남기는 사업만 진행했따. 하지만 그것도 정상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하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밑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걱정 마세요, 앞으로 얼마간은 어렵겠지만, 다 지나갈 거예요!”
천제현은 오히려 낙관적이었다.
“이번 일로 기적성이 아주 유명해졌으니, 앞으로 혼돈의 숲 중앙에서 날로 순조롭게 발전하게 될 겁니다.”
‘그럴까? 그러기만을 바래야지.’
사실 기적성은 많이 힘든 상황이다.
공화련은 계속 얼굴을 찡그린 채 생각했다. 천제현은 너무 낙관적이다. 이번 전투로 혼돈의 숲에서 기적성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영원의 숲과 같은 거대세력이 기적성을 주목하게 된 상황에서 앞으로 어려움 없이 발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