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4
제554장 적대관계
폭격 두 시간 후, 전기성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정예 2만을 이끌고 위풍당당 기세도 등등하게 출격했던 부성주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전기성에서야 멀쩡히 있다가 귓방망이 얻어맞은 기분일 수밖에.
기적성에 이런 힘과 배짱이 있을 줄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만약 이토록 파괴적인 공격이 전기성에서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기성 정예부대를 지상에서 지워 버린 이번 폭격으로 기적성은 혼돈의 숲 중부에서의 영향력을 한층 확대할 수 있었다.
토착민 부족들은 누군가 턱 아래에 날 선 칼끝을 겨누고 있는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무리 큰 부족도 기적성이 마음만 먹는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도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이번 폭격은 혼돈의 숲을 향한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과거의 나약했던 그린캐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기적성은 이제 숲의 모든 도시를 굽어볼 자격과 능력, 패기를 갖추었다고. 기적성을 계속 겁 많고 힘없는 토끼쯤으로 봤다가는 전기성 정예부대와 같은 꼴을 당할 것이라고.
진짜 전쟁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치명타를 입은 오크들은 단체로 충격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성 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칼은 용의 뼈로 조각된 성주 전용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주위는 장군들과 부족 족장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전멸이라니, 살아 돌아온 자가 하나도 없다고? 기적성 놈들, 아주 미쳐 버렸군!”
“대체 무슨 수로 그게 가능했는지 조사는 된 건가?”
“기적성에 언제부터 그런 힘이 있었지?”
격분한 오크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성질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막상 그러자니 정체불명의 공격무기가 겁났다.
“다들 그만 닥쳐!”
칼이 천천히 눈을 뜨자 암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의 눈빛에서는 걱정도, 곤혹스러운 기색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한텐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정예 2만이 몰살당했는데 나쁜 일이 아니라니?’
‘자기 동생 역시 가시꽃마을에서 희생당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얘기를 감히 입 밖에 내는 자는 없었다. 다들 조용히 성주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
칼의 입가에 냉혹한 웃음이 걸렸다.
“덕분에 절호의 기회를 얻었어. 죽은 2만 명을 구실로 기적성을 쳐서 놈들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번에는 엘프왕도 할 말이 없겠지!”
“성주님, 기적성 놈들이 어떤 무기를 쓰는지 보셨지 않습니까? 그런 폭격은 어느 부대도 못 당해냅니다. 기적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군대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 수도 있어요!”
듣고 있던 다른 오크들도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성에는 지금 당장 전기성에 쳐들어오고도 남을 힘과 무기가 있었다. 현재 시급한 건 놈들이 사용한 무기의 정체를 알아내 대응책을 세우는 일이었다. 침공이라니, 무슨 수로 침공을 한단 말인가. 대규모 병력이 집결하는 징후가 확인되자마자 놈들이 성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과 같은 공격은 기적성 놈들한테도 상당한 부담이 될 거다. 무한정 쓸 수 있는 무기였다면 겨우 2만 명으로 끝낼 게 아니라 곧장 이곳 전기성을 노렸겠지.”
칼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대규모 군단을 보낼 필요도 없다. 정예 중의 정예만 엄선해서 유격부대 수십 개를 조직한 뒤 생활시설과 생산설비를 파괴하는 거야. 경제가 무너지면 저들도 투항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현명한 작전이었다.
기적성과의 정면대결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첫째, 기적성에는 강력한 공대지 무기가 있었고 둘째, 전기성이 탐내는 건 폐허가 된 기적성이 아니었다. 폭격 능력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침략을 감행하기란 너무 위험했다. 최정예들만 뽑아 수십 명 단위로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는 게 최선이었다.
전기성에서는 발에 채는 게 고수였다. 기적성 놈들은 분명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다른 의견이 나오길 기다리기도 전에 칼의 명령이 떨어졌다.
“공군은 전기성 상공을 24시간 감시하고 방어결계는 언제든 작동할 수 있도록 전투 대비 태세로 전환한다. 그리고 각 부대에서 백부장 이상급 용사를 선발해 3천 명 규모의 유격부대를 조직한다. 작전은 빠르고, 정확하고, 가차 없이 전개할 것! 기적성 부대와의 정면충돌은 엄금한다. 치고 빠지는 식의 게릴라 전술로 생활시설과 생산설비를 파괴하여 적들을 두려움과 혼란에 빠뜨린다!”
***
한편 기적성에서 초조하게 협상 결과를 기다리던 공화련은 천제현이 폭격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협상이 이미 결렬됐다는 뜻이었다.
“제로, 성 안팎의 모든 생산활동을 중지하고 전체 부대를 소집해서 전기성의 기습에 대비해!”
“네, 부성주님!”
빈틈없이 지시를 마친 공화련은 성안 전송탑으로 복귀했다.
천제현과 남궁혜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공화련을 본 천제현이 너스레를 떨었다.
“큰아가씨, 제 불꽃놀이 어땠어요?”
“대체 어쩔 생각이야?”
공화련은 벌레 씹은 얼굴이었다.
“다짜고짜 폭격부터 퍼부으면 어쩌자고! 분명 나랑 얘기 했잖아. 상대방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일단은 수용하는 척 기적상회에 시간을 벌어주기로. 마력폭탄을 생산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더 필요한데 벌써 판을 깨 버리면 뒷감당은 누가 하는데!”
“그놈들이 얼마나 열 받게 굴었는지 언니가 몰라서 그래요!”
남궁혜는 벌써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저는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자식들은 죽어도 싸다고요!”
공화련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잠깐 통쾌하자고 불러온 뒤탈이 적어도 셋은 돼. 첫째, 천벌급 비행선의 위력이 너무 빨리 노출된 탓에 전기성 기습은 이제 물 건너갔어. 둘째, 영원의 숲에서 말이 많을 거야. 지원군 파견은 고사하고 엘프왕 개인이 나서는 것마저도 막으려 들겠지. 셋째, 전기성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어. 전쟁이 예상보다 앞당겨질 테고, 우리는 그만큼 불리해질 수밖에 없어.”
그간 전기성이 선뜻 기적성에 마수를 뻗치지 못한 건 배후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영원의 숲은 유명무실한 존재라고 쳐도, 도시를 넘겨주고 자기 딸까지 부성주로 앉혀준 걸 보면 최소한 엘프왕 개인은 천제현을 도울 의지가 있었다.
그건 전기성이 기적성을 침략할 경우 딸 비비안 때문에라도 엘프왕이 의회를 거치지 않고 곧장 지원사격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엘프왕은 영원의 숲 전체를 통틀어도 대적할 상대가 없는 최강자, 혈혈단신으로 나타난다 해도 전기성에는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 폭격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지난 습격 당시 기적성은 상대가 전기성이라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
거기다 이제는 동맹을 맺겠다고 나온 전기성 병사 2만 명을 몰살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전기성에 침략의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다.
비열한 기적성 성주의 함정에 빠져 정예 2만에 부성주마저 잃고 만 전기성.
이 얼마나 그럴듯한 구실인가.
엘프의회는 고지식한 작자들의 모임이었다.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엘프군 파견은 물론이고 엘프왕의 참전 역시 결사적으로 막아설 것이다. 언뜻 통쾌한 한 방으로 보이는 이번 폭격은 실상 기적성을 아슬아슬한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이제는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
“이번 폭격으로 전기성은 최소 2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어요. 당연히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요. 첫째, 치명적인 타격으로 전기성 놈들의 콧대를 꺾어놨어요. 당분간 대규모 군사행동은 엄두를 못 낼 거예요. 둘째, 기적성의 사기가 크게 올라갔어요. 덕분에 주위 토착세력들도 다시 우리를 신뢰하게 됐고요. 셋째, 앞으로 기적성은 혼돈의 숲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될 거예요. 특히 중소형 세력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톡톡히 보여준 덕에 전기성은 이제 주변 세력 포섭에 어려움을 겪게 되겠죠.”
공화련은 천제현과 백날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미 떨어진 폭탄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전기성 성주라도 이번처럼 전격적인 공습을 당한 후에는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엄두는 못 낼 거야. 하지만 소규모 정예부대로 기습을 시도할 수는 있겠지. 뭔가 대응책이 없을까?”
기적성은 바로 얼마 전 전기성의 반짝 습격으로도 꽤나 고생을 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일이 진짜 커졌다. 전기성이 한층 더 맹렬히 덤빌 확률이 100%이다. 기적성은 모든 생산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생산시설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앞에서 돌진해오는 창은 피하기 쉬워도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당해내기 어려운 법.
차라리 전면전이라면 공화련도 겁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숲에서 게릴라식 습격을 완벽히 막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서련 아가씨 쪽 일은 어떻게 되어간대요?”
“사령탑이라면 이미 완공이야.”
“잘됐네요, 어디 구경 한번 가보죠.”
공서련은 요 며칠 사령탑 건설에 매진 중이었다. 도면은 천제현이, 자원은 공화련이 댔고 공서련은 죽음 속성 정령을 복제하는 능력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천제현의 설계는 리치의 사령탑을 기반으로 하되 전체적인 배치에 꽤 많은 변화를 준 형태였다. 중앙탑만 사령유적의 핵심부에 남겨두고 나머지 탑들은 기적성 주위에 분산 배치했다. 중앙탑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지하 영맥을 통해 다른 탑들에 전달되는 구조로, 이로써 기적성은 주변을 한 바퀴 빙 두른 방어선을 갖게 됐다.
솔직히 방어력 자체는 썩 기대가 되지 않았다.
너무 드문드문하게 세워진 탑의 위치 탓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성을 한 바퀴 둘렀다고 말하기에도 사실 민망했다. 공화련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이보다는 차라리 처음에 리치가 했던 대로 사령탑을 한곳에 모조리 집중시킨 뒤 마력을 하늘로 쏘아 올려서 광역타격 효과를 노리는 편이 나을 듯했다.
하지만 공화련은 그 당혹감을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천제현의 손에서 나온 설계가 아닌가. 천제현의 손을 거친 사령탑이 리치가 세웠던 것보다 못할 리는 절대로 없었다. 분명 나름의 의도가 숨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