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3
제553장 폭격
천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그건 협박인가?”
“우린 분명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었다. 좋은 말로 해서 안 되면 무력을 쓰는 수밖에!”
남궁혜가 깔깔거렸다.
“겨우 2만 명이서 기적성을 치겠다고? 어디 한 번 해보든지!”
“허세 부려봐야 안 먹혀. 이 마을에 발을 디딘 그 순간 너희 목숨줄은 우리 오크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다! 살고 싶으면 복종해라. 정 싫다면야 네놈들 목을 친 뒤 곧장 기적성으로 진격하면 그만이다.”
고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금고를 탈탈 턴 돈을 몽땅 주변 부족들에게 빌려줬다더군. 2만 명이 성을 함락하기에는 부족한 숫자라고 쳐도 외곽 공장지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할 것 같은데. 투자금을 모조리 날리고 나면 우리가 다시 쳐들어갈 것도 없이 기적성은 저절로 붕괴하겠지!”
“못생긴 개구리 같은 것들이!”
남궁혜가 펄쩍 뛰며 노발대발했다.
“어디 손만 대봐, 그 순간 너희 전기성 녹색 개구리 놈들은 다 날아가는 거니까!”
분노한 고르가 소리쳤다.
“네까짓 게 감히 우릴 모욕해? 우매한 인간 따위가 명예로운 오크 전사들을 능멸하다니. 성주님이 뭐라고 하시든 저 계집은 죽여 마땅하다!”
카룬다가 차갑게 말했다.
“고르, 도끼를 들고 전사의 명예를 증명해 보여라!”
남궁혜가 우두둑우두둑 손가락을 꺾으며 외쳤다.
“한판 붙자고? 좋아!”
“협상은 결렬인 것 같네요.”
천제현이 남궁혜를 향해 말했다.
“얼마나 걸리겠어요?”
고르를 쓱 훑어본 남궁혜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저까짓 놈은 10초면 충분해.”
“알았어요, 10초!”
천제현이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 몇 개를 누르자 곧장 제어센터가 연결됐다.
“천벌 1호, 천벌 2호, 10초 뒤에 천벌을 발동하라. 반복한다, 10초 뒤에 천벌을 발동하라.”
“명령 인식, 카운트다운 시작, 10…….”
오크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10초 만에 고르를 쓰러뜨리겠다고?’
‘저렇게 어려 보여도 고르는 진령 4성급 실력자라고!’
기적성에서 온 인간 계집은 고작 진령 3성이었다. 숫자 하나 차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한 단계의 차이로 지령술사와 천령술사가 갈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카룬다를 덮쳐왔다.
“고르, 당장 끝내버려!”
통화를 끝낸 천제현이 무심한 동작으로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
육안으로 포착이 불가능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서 있던 자리에서 몸을 날린 고르가 번개처럼 남궁혜의 코앞까지 접근해 도끼를 내리쳤다.
콰앙!
고르가 마력을 끌어내자 발밑 땅이 움푹 꺼짐과 동시에 온몸이 가시로 덮인 괴물 형상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첫 공격의 여파로 공중에 붕 떠 있던 남궁혜는 정령이 날린 마력가시에 그만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압도적인 마력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남궁혜보다 훨씬 높이 뛰어오른 고르가 다시 육중한 도끼를 아래로 내리쳤다. 아니, 고르가 도끼를 휘둘렀다기보다는 도끼가 고르를 끌고 맹렬히 돌격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했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 산맥이라도 가루로 만들 듯 무차별적인 파괴력이었다.
“빠르군.”
천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고르 쪽을 확인한 카룬다가 손짓을 하자 진령급 전사 열 명이 동시에 정령을 불러냈다. 천제현이 손을 뻗어 등 뒤의 검 손잡이를 잡는 순간, 온갖 날 선 병기가 사방에서 그를 바짝 포위했다. 손끝 하나만 더 까딱해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자리에 앉은 카룬다가 미동도 없이 천제현을 응시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뒷일은 나로서도 보장을 못 할 것 같은데.”
“그러지.”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띤 천제현이 속으로 숫자를 셌다.
“9, 8…….”
이때 남궁혜의 전신에 맹렬한 화염이 피어오르더니 마력가시가 전부 튕겨 나왔다. 거의 동시에 불꽃에 휩싸인 그녀의 주먹이 고르의 도끼날을 향해 날아왔다.
“멍청한 계집!”
고르가 코웃음을 쳤다. 도끼가 희미하게 진동하면서 괴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성난 기령(器靈)의 포효였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주먹으로 불멸 혼기에 맞설 생각을 하다니!”
태생이 나약한 인간은 물론이고, 식인마가 오더라도 다진 고깃덩이 신세가 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불꽃 주먹과 도끼날이 충돌하는 순간. 공중에 세찬 폭음이 울렸다.
거칠 것 없던 고르의 기세가 돌연 꺾여 버렸다. 바닥으로 추락한 남궁혜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을 치기는 했지만 다친 곳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전신을 감싼 화염 역시 그대로였다.
‘이게 대체?’
‘인간의 몸으로 고르의 도끼를 막아내다니?’
고르의 도끼는 전기성에서도 이름난 불멸 혼기요, 고르 본인은 진령 4성, 그러니까 천령 초기의 실력자였다. 지령 후기의 인간이 감히 당해낼 상대가 아니었다.
광염에 휩싸인 채로 붉은 머릿결을 나부끼는 남궁혜는 흡사 분노한 불의 여신처럼 보였다.
“겨우 이 정도야? 난 아직 몸도 다 안 풀었는데, 다시 덤벼!”
분을 이기지 못한 고르가 야수처럼 포효했다. 그에게 남궁혜의 깔보는 듯한 눈빛은 단순한 도발 정도가 아니라 모욕이었다. 육중한 도끼가 그의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각가의 손에 들린 조각도처럼 민첩하면서도 대장장이의 쇠망치처럼 무자비하게 바람을 가르던 쇳덩이가 수백 개의 도끼날이 모여 피어난 연꽃 형상을 그려냈다.
“꽤 봐줄 만한걸!”
화염을 딛고 솟구쳐 오른 남궁혜가 무서운 속도로 양 주먹을 연속해서 내질렀다. 화려함이나 기교와는 거리가 먼, 오로지 힘과 속도에만 기댄 움직임으로 그녀는 고르의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쳤다. 도끼의 위력은 평범한 술사쯤은 이미 곤죽으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남궁혜는 백 차례가 넘는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내고도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상식을 뒤엎는 광경이었다.
고르의 도끼가 회전 속도를 높일수록 남궁혜가 주먹을 내지르는 속도 또한 점점 더 빨라졌다.
어떠한 기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순수한 힘과 힘, 속도와 속도의 충돌이었다. 이 대결에 개입하는 요소는 딱 두 가지, 실력과 마력뿐이었다.
동급 간의 대결이라면 그래도 납득이 갈지 모르나 고르는 남궁혜보다 월등히 높은 마력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불멸 혼기까지 쓰면서도 지금껏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다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야수화!”
고르의 육체가 정령과 결합하면서 본래 녹색이던 피부가 삽시간에 흑색으로 변했다. 등과 팔뚝에는 갈고리처럼 휘어진 가시까지 빽빽하게 돋아났다. 사실 외형만 바뀐 게 아니었다. 이 비술의 핵심은 속도와 마력을 몇 배로 높여 전투력을 대폭 끌어올리는 데 있었다.
“흑령, 힘을 개방해라!”
주인의 부름을 받은 기령이 강렬한 흑색 섬광을 발했다.
원래도 묵직하던 도끼가 다섯 배 이상 커졌다. 이제 그 도끼가 뿜어내는 것은 산맥과 강줄기의 위용, 해와 달의 광휘처럼 만물 위에 군림하는 압도적 힘이었다.
이것이 바로 고르의 필살기였다.
“좋아! 이래야 붙어볼 맛이 나지!”
남궁혜는 미친 듯이 날아드는 도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은커녕 짜릿하다는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그녀는 고르의 일격을 맨손으로 받아내려는 자세를 취했다.
고르의 도끼날이 한층 더 날카롭게 번뜩였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게로구나!”
고정된 형태 없이 해일처럼 휘몰아치는 도끼날은 애초에 남궁혜가 생각하는 식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체 없는 무형의 기운이 손에 잡힐 리가, 세찬 급류와도 같은 마력이 남궁혜의 몸을 후려치자 입고 있던 옷이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갔다.
이 정도 위력이면 인간이 아니라 마수라 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지만 고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검은 도끼를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괴력이 수만 개의 가시로 변해 상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고르는 남궁혜를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릴 심산이었다.
바로 그때.
남궁혜의 짧은 외침이 들려왔다.
“불멸체!”
옅은 청색 성광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더니 빗발치는 가시를 튕겨냈다. 미약하던 성광은 순식간에 강렬해졌고, 남궁혜는 고르의 맹렬한 공격에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얼굴색이 변한 고르가 곧장 달려들어 도끼를 크게 내리쳤다.
콰앙!
남궁혜가 튕겨낸 맹렬한 힘에 도끼가 쩌적 바스러져 내리는 동시에 고르의 몸이 저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고작 그깟 실력으로 이 몸을 노려?”
남궁혜가 허공을 딛고 족히 5장을 단숨에 솟구쳐 올랐다. 그녀 주위에서 한층 더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한 광염이 마치 붉은 장막처럼 하늘을 온통 뒤덮는가 싶더니 강렬한 마력으로 인해 뒤틀린 공간 사이로 위엄 넘치는 봉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내 차례로군!”
오크들이 아연실색했다.
기껏해야 불의 정령이나 부리는 줄 알았던 계집이 무려 봉황을 불러낸 것이다.
정령이 지금에서야 등장했다는 건 남궁혜가 그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봉황 안으로 녹아든 그녀가 만신창이인 고르를 향해 공격을 퍼부으려 할 때였다.
“멈춰!”
포효와 함께 몸을 날린 카룬다가 도끼 두 개를 무섭게 휘두르자 십자 모양의 선홍빛 섬광이 남궁혜를 노리고 날아갔다.
카룬다는 화령기 술사, 설사 급박하게 이뤄졌다 해도 남궁혜가 얕볼 만한 수준의 공격은 아니었다.
카룬다의 도끼가 그리는 궤적은 남궁혜의 공격 노선과 정확히 맞물렸다. 기어코 고르를 처치하려 든다면 카룬다에게 당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공격을 피하는 쪽을 택하면 회심의 일격을 가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 카룬다가 아들을 구출해낼 것이다.
하지만 미치광이 남궁혜가 이것저것 다 따지고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결정을 내리는 데는 0.5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위험이고 나발이고. 봉황의 기운을 모은 남궁혜가 일격을 날렸다.
장렬하게 폭발한 고르의 몸뚱이는 타오르는 불꽃에 먹혀 재가 되어 버렸다.
한편 날아오던 공격에 당해 붕 떠서 나가떨어진 남궁혜에게로 카룬다의 도끼가 곧장 다시 쇄도해왔다. 남궁혜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으나 도끼날에 동강이 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시간 다 됐군.”
엷은 미소와 함께 천제현의 눈동자가 흰색으로 변했다.
오크들이 본 것은 허공의 일렁임이 전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들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천제현은 제자리에서 증발해 버렸다.
폭주한 카룬다가 남궁혜를 두 동강 내려는 찰나, 공중에 나타난 천제현이 남궁혜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수백 장을 순간이동했다. 카룬다의 세 번째 공격은 마을 한복판에 수십 장에 달하는 도끼 자국을 남겼다.
“괜찮아요?”
“응, 고마워.”
꽤 깊어 보이던 남궁혜의 상처는 온몸을 감싼 화염이 번쩍하고 빛나는 동시에 깨끗하게 회복됐다. 대열반경의 힘이었다. 다만 너덜너덜하게 헤진 앞섶만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남궁혜는 우윳빛 속살을 드러낸 채로 천제현의 품에 안겨 뺨을 붉혀야만 했다.
“일단 움직이죠!”
둘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겠다며 달려드는 카룬다의 기세가 무색하게도 천제현과 남궁혜는 눈부신 섬광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야? 어디 간 거야!”
아들을 잃은 카룬다는 지금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주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을 리가. 이때 오크 하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게 뭐야?”
새파란 창공에 빽빽하게 박힌 검은 점들이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고 있었다. 파멸의 기운이 지면을 엄습해왔다.
“위험해!”
오크들이 대책을 강구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1차로 투하된 폭탄이 순식간에 머리 위까지 도달했다. 오크 전사가 본능적으로 날린 일장에 채 땅에 닿지도 않은 폭탄이 폭발했다. 엄청난 빛과 열에 강력한 마력파까지 동반된 폭발로 오크의 반쪽 몸뚱이는 그대로 숯이 되어 버렸다. 나머지 반쪽 역시 심각한 화상을 입은 채로 수십 장 밖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도망치거나 방어할 여유는 물론이고 뭔가 생각이란 걸 할 시간조차 없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동시에 폭탄이 앞도 안 보이게 빗발쳤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열과 빛으로 이뤄진 버섯구름이 피어났다.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지역에 쏟아진 폭탄은 수천, 수만 개에 달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버섯구름이 모여 광활한 빛과 열의 바다가 만들어졌다.
파멸의 힘이 가시꽃마을을 집어삼켰다. 골짜기 전체가 평지로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분이었다. 강렬한 섬광은 백 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고 무시무시한 마력파동은 잠자던 숲 속의 흉수들마저 흔들어 깨웠다.
대지를 뒤흔든 진동은 지하 수천 미터 아래까지 전해져 지하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전기성 부성주와 정예부대 2만은 이미 흔적도 없이 소멸한 뒤였다.
마력파동이 가신 뒤에도 상공은 온통 짙은 연기와 잿가루였다. 아름다운 분지가 있던 자리에는 미처 불씨가 다 꺼지지 않은 거대한 구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이어질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기적성이 보여준 힘이 다시 한 번 숲 전체를 전율에 빠뜨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