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2
제552장 담판
천제현은 비비안과 남궁혜를 보며 말했다.
“남궁 아가씨, 저랑 같이 다녀와요. 큰아가씨랑 서련 아가씨, 비비안 공주님은 성에서 사태를 진정시켜 주시고요.”
공화련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전기성은 예전의 그린캐슬과 달라. 백여 년간 전란이 일어나지 않아서 쇠약해질 일도 없었고 병력도 많지. 그들이 무슨 음모를 꾸몄을까봐 걱정돼.”
“대주국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요더 선지자도 한동안은 돌아오지 못하잖아요. 현재 기적성에는 이렇다 할 고수가 없어요. 아니, 설령 화령 고수가 있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진 못할 거예요. 정면 대결을 하면 별 이득이 없으니 협상 테이블에라도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천제현은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큰아가씨, 안심하세요. 저한테는 공간능력도 있고 귀환 두루마리도 있잖아요. 협상이 여의치 않아도 별일은 없을 거예요.”
“그건 그래.”
공화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비안이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공화련 언니가 있는데 내가 성에 남아서 뭘 하겠어? 나도 너랑 같이 갈래.”
“나도 갈래!”
공서련도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초록괴물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거야!”
그러나 천제현은 고개를 저었다.
“초조해할 것 없어요. 두 사람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사령유적의 사령탑 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돼요. 자금이나 인력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되도록 빨리 완성해 주세요. 이 일은 서련 아가씨에게 맡길게요.”
천제현은 여기까지 말한 뒤 잠깐 생각을 하고 다시 말했다.
“비비안 공주님의 임무는 아공간의 기운을 뽑아내는 장치를 만드는 거예요. 공간창고와 비슷한 거죠. 제가 설계도와 제작방법을 전달할게요. 큰아가씨는 자금과 인력 지원을 맡아주고요. 이것 역시 되도록 빨리 완성해야 해요.”
‘아공간의 기운을 뽑아낸다고? 설마 천제현이 생각하고 있는 게…….’
비비안의 눈이 반짝였다.
“알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완성시킬게!”
“큰아가씨는 귀찮겠지만 천벌호 급의 기적비행선 두 대를 가시꽃마을 상공에 배치해 주세요.”
“천벌호 급의 기적비행선 두 대라고?”
그 정도면 산 하나도 평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지난날, 올드만 마을을 습격하려던 약탈단도 이 무시무시한 무기로 박살을 내지 않았던가.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기적상회의 기술은 더욱 발전한 상태였다.
기적상회의 차세대 마력과 무기는 날로 개선되고 있었다. 천벌호 비행선의 고공폭탄 역시 개량과 교체를 거쳐 더 강력하고 엄청난 위력을 지닌 무기로 변모해 있었다. 그런 비행선 두 대를 협상 장소 상공에 배치시켜 달라니, 전면전을 준비하겠다는 말 아닌가?
공화련의 표정을 본 천제현은 헤헤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만일을 위한 조치일 뿐이에요. 전기성주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모이면 한 방에 쓸어버릴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우두머리를 잃은 전기성이 우리를 어쩔 수 있겠어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모두 올 리가 없잖아? 게다가 전부 쓸어 버린다고 쳐. 황야고원의 보복은 어쩌고? 그건 기적성을 점령할 명분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나 공화련은 천제현의 명령을 거절하진 못했다.
“어쨌든 비행선은 배치해둘게. 냉정하게 판단하길 바라.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라고. 문제가 생기면 여태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명심해. 기적성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거야.”
그 말을 들은 천제현은 상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큰아가씨, 그렇게 오래 제 옆에 있었으면서도 몰라요? 이쯤 되면 제가 꽤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눈치챘을 텐데요.”
‘믿을 만한 사람 좋아하시네!’
공화련은 그를 한 번 흘겨봤다.
천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그럼 모두 준비하도록 하죠.”
이번 일로 인해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던 도시 건설에 제동이 걸렸다. 공화련은 성의 모든 자원을 방어체계 구축에 쏟아 부었고, 특히 공서련의 사령탑 건설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남궁혜는 성안을 가지고 폐관에 들어갔고, 비비안은 밤을 새가며 아공간 장치 제작에 몰두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피해야겠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남궁혜는 성안의 힘을 흡수하여 단번에 진령 3성의 경지에 올랐다. 천제현은 그녀와 함께 가시꽃마을로 향했다.
***
혼돈의 숲 중부의 완만한 골짜기. 짙푸른 융단처럼 펼쳐진 수풀 사이로 꽃이 흐드러지고 온갖 산짐승이 노니는 가운데, 키 작은 관목림의 정중앙에 작은 마을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돌을 쌓아 지은 건물은 온통 초록색 이끼로 덮여 있었고 이끼 옷 위로 빽빽한 가시꽃 덤불까지 더해져 주변 숲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으니, 이곳이 바로 가시꽃마을이었다.
전기성과 기적성 사이에 위치한 가시꽃마을은 혼돈의 숲 전역에 드문드문 보이는 여느 마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주변 부족들의 물물교환을 위한 편의 장소 제공이 이 마을의 존재 이유였다.
크기로 따지든 인구로 따지든 가시꽃마을이 혼돈의 숲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최근 마을에 큰일이 터졌다. 어느 날 문득 사방 산비탈 위에 오색 깃발이 나풀거리는가 싶더니 수만 명에 달하는 늑대기병들이 검은 홍수처럼 밀려들어 마을을 포위해 버린 것이었다.
전기성에서 보낸 부대였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잔인한 죽음의 칼날이 드리웠다. 당시 마을에 있던 5천 명은 하나도 빠짐없이 몰살당했다.
도살자들은 잘라낸 시체의 머리를 뾰족한 나무 장대에 끼워 마을 입구에 나란히 전시했다. 잔혹한 의식의 일환 같기도,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깔아놓은 붉은 카펫 같기도 한 광경이었다.
검은 갑옷을 입고 두 줄로 도열한 전기성 정예부대의 머리 위로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주변 공기조차 끔찍한 위압감에 짓눌린 듯했다.
“흥, 그 겁쟁이들은 아직인가?”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은 오크 하나가 피바다가 된 마을 중앙에 앉아 있었다. 훤히 드러낸 상반신에는 흉터와 문신이 가득했고 발밑에서는 스산한 죽음의 기운을 품은 도끼 두 자루가 번뜩였다. 옆에는 표독스러운 인상의 젊은 오크가 서 있었는데, 꽤나 닮은 생김새로 보아 둘은 부자 사이인 듯했다.
둘의 뒤쪽으로는 머리 없는 시체들이 마치 기념사진용 배경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좌우에 미동조차 없이 도열한 오크 용사들의 눈빛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한기마저 느껴졌다.
“아버지, 나약한 인간 놈에게 여기 올 배짱이 있겠습니까? 기적성인지 뭔지, 성주님께 당장 쳐들어가자고 말씀드리지 않고요. 힘으로 눌러 버리자 이겁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고르.”
나이 많은 오크가 고개를 저었다.
“소문이 심상치가 않아. 공간능력을 이용해 인간 왕국에서 물품을 운송해온다는 소리까지 있던데, 소문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지만 첩자들의 보고로는 성 전체가 완전히 달라진 건 사실이라더구나. 게다가 형님께서는 놈들이 가진 불가사의한 기술력에 아주 관심이 많으시다. 무식하게 쳐들어가기보다는 우리 꼭두각시로 만드는 편이 나아.”
고르라는 오크의 질문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오크 하나가 끼어든 탓이었다.
“나타났습니다.”
가시꽃마을에 도착한 천제현과 남궁혜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을 사람 전체를 학살하고도 모자라 정예군을 2만이나 대기시켜두다니!’
전기성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살벌한 광경이었다. 협상을 앞두고 이런 풍경을 마주한다면 과연 어느 누가 차분한 마음으로 대화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까.
마을은 전기성 최정예 부대에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였다. 참새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철통같은 경비 태세였다.
“달랑 둘이라고?”
오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기성은 정예 2만을 끌고 왔는데 기적상회에서는 겨우 두 명이 나왔다. 비율로 따지면 10,000:1, 기함할 노릇이었다.
천제현은 누가 봐도 성주 같은 차림이었다.
“그쪽이 기적성 성주인가?”
나이 많은 오크가 헛웃음을 흘렸다. 소름 끼치게 일그러진 표정에 뒤쪽의 피바다와 시신 더미가 더해져 몹시도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연출됐다.
“난 성주이신 칼 형님을 대신해서 나온 부성주 카룬다라고 하오. 이쪽은 내 아들 고르요!”
천제현이 상대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남궁혜는 꼿꼿하게 뒷짐을 진 자세로 천제현의 뒤에 가서 섰다.
두 사람 주위로 쫙 깔린 오크들 중에는 진령 경지만도 최소 열 놈이었다. 카룬다는 진령 7성의 화령급 고수였고 아들 고르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천제현과 남궁혜는 태연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천제현이 다소 불쾌하다는 투로 말했다.
“칼 성주의 요청을 받고 와봤더니 정작 성주는 온데간데없고 보좌관만 하나 덜렁 나와 있는 상황이라, 오크들은 예의라는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크르르!”
천제현의 말에 주변을 에워싼 오크들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도끼를 빼 들려는 아들 고르를 저지한 카룬다가 흥 코웃음을 쳤다.
“하프엘프들이 왜 성을 내줬나 했더니 꽤 기백이 있으시군그래. 양쪽 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 성미인 듯하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천제현이 자세를 느슨하게 고쳐 앉았다.
“어디 들어나 봅시다.”
“기적성이 요즘 지나치게 남의 이목을 끄는 건 아실 테고, 일찌감치 줄을 잘 서지 않으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길 거요.”
잠시 뜸을 들이던 카룬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기적성의 친구가 되어주겠소. 전기성과 혈맹을 맺으면 기적성에 군침을 흘리던 세력들도 단념할 수밖에 없을 거요. 서로 힘을 합쳐서 세력 범위를 넓힐 수도 있고.”
이 순간 카룬다는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조력자의 얼굴이었다. 습격 따위는 애초에 없던 일이라는 듯이.
천제현이 툭 질문을 던졌다.
“조건은?”
“오크 정예 10만 명을 평화유지군으로 기적성에 주둔시켜 적들이 허튼 생각을 못 하도록 해주겠소.”
카룬다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성주 자리 보전은 걱정이 없을 거요. 그 대신, 성에서 발생하는 수익 절반을 주둔 비용으로 전기성에 납부하는 한편 우리가 파견하는 인물을 부성주에 앉혀야 하오. 성주를 잘 보좌하도록 능력 있는 인물을 보내도록 하리다.”
“군대를 들이고 조공을 바치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실권까지 가져가겠다?”
남궁혜가 눈을 부라렸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보자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쳐 돌았나!”
“건방진!”
고르가 도끼를 감아쥐었다.
천제현은 피식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칼 성주와 부성주의 염려와는 달리 우리 힘만으로도 기적성을 지키기는 충분하오. 게다가 영원의 숲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이 혼돈의 숲에서 누가 감히 우릴 건드리겠소.”
카룬다가 요란하게 웃어젖혔다.
“지금 누구 앞에서 수작질을, 영원의 숲 고지식한 작자들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자기들 땅을 침범당하지 않는 한 꿈쩍도 안 할 자들이지. 도와주러 달려오기는커녕 기적성 같은 분쟁지역은 어떻게든 피해 보려 용을 쓸걸?”
순간.
카룬다의 목소리가 돌연 싸늘해졌다.
“톡 까놓고 얘기하지. 정예병 2만이 장식으로 보이나? 여기서 기적성까지는 400리가 채 안 되는 거리, 두 시간이면 상황 끝이라고! 방어 결계도, 강력한 군단도, 충분한 병력도 없는 기적성이 과연 기습을 버텨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