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7
제547장 공화련의 마음
어쨌거나 이건 작은 일이 아니었고, 종주라고 해서 당장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천제현에게 수락을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신과 현음종을 위해 더 큰 이익을 얻어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으니 기적성에서 며칠 머물면서 주변을 좀 둘러봐. 심심하지 않게 사람을 한 명 붙여줄게.”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던 천제현의 눈에 나서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비비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동안 성주 집무동에만 있느라 답답해 죽을 것 같았던 그녀다. 이렇게 콧바람 쐴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다.
“비비안 공주님, 공주님이 안내해주세요. 공주님은 공간능력이 있으니까 움직이기가 편하겠죠. 식대와 활동비는 전부 공금으로 올리시고요. 그럼 재미있게 놀고 오세요!”
“알았어!”
입이 함지막하게 벌어진 비비안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양 벌떡 일어나 린지아를 보며 말했다.
“린지아, 가자!”
그녀의 말을 들은 린지아는 못마땅한 듯 되물었다.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하하하, 그야 난 인간들 나이로 70살이나 먹었으니까. 네 할머니뻘이라고. 그러니까 반말해도 되지?”
비비안이 나이를 들먹거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말에 린지아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빨리 가자!”
비비안이 공간의 힘을 사용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언니, 난 남궁 언니랑 시련장에 좀 다녀올게.”
“응, 갔다 와.”
남궁혜와 공서련은 시시덕거리며 사라졌다. 공서련은 줄곧 시련장에 큰 흥미를 보였다. 그녀에게 시련장들은 일종의 놀이공원 같은 느낌을 주었고, 놀기 좋아하는 두 사람은 시련장 도전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큰아가씨, 우리도 가죠!”
천제현의 눈동자가 흰색으로 변하자 폭풍과도 같은 공간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 힘은 순식간에 공화련의 몸을 덮쳤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주 집무동 안으로 이동되었다.
공화련의 아름다운 두 눈에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보니 네 공간능력도 비비안에 뒤지지 않잖아!”
천제현은 성주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제가 가진 능력 중에 약한 게 하나라도 있던가요? 어쨌든 새로 보고할 상황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대하국 실험실이 순조롭게 성과를 내고 있어. 자동진법기도 벌써 제작됐고.”
공화련은 천제현에게 엘프족의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둘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공화련은 천제현이 성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놓았다. 그녀가 회의실의 전영경을 가동하자 기적상회의 중주공장 상황이 화면에 떴다.
연구원 몇 명이 투명한 수정에 새겨진 부적설계도 수정판을 꺼내고 있었다. 그들이 설계도를 기계에 넣고 마석슬롯에 마석을 삽입하니 기계가 가동되었다.
마석에서 순수한 결정이 걸러져 나와 수정붓으로 들어가자 수정붓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략 2분쯤 지났을까? 부적 한 개가 완성되었다.
테스트를 진행해 본 결과, 그렇게 만들어진 부적은 수공으로 만든 것과 큰 차이가 없었고 조금의 오차나 결함도 보이지 않았다.
기적상회가 산업화 단계에 진입했음을 의미하는 이정표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초월 마력행렬컴퓨터를 제작할 때도 그렇게 큰 공을 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샘플 하나만 있으면 자동진법기를 몇 백 대도 가동할 수 있을 테니까. 향후 이 기계의 부적 생산속도는 인간의 제작속도를 크게 앞지를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운문학자들은 번거로운 반복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적상회의 상품 생산속도와 생산량은 모두 대폭 증가할 것이며, 기밀 누출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단순 노동에서 해방된 학자들은 마력행렬의 개선에 더욱 집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건 그야말로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일이다.
“이것 말고도 중요한 사안이 하나 더 있어.”
또 다른 전영경을 켠 공화련이 화면을 바꾸며 말했다.
“이것 좀 봐!”
화면에는 리치와 결투를 벌였던 분지가 나타나 있었다. 그 분지에는 꽤 많은 회색첨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서 죽음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수백 구의 해골들이 물건 운반, 채석, 벌목 등을 하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령탑? 저건 리치의 사령탑이잖아? 대체 저걸 언제 만든 거람?’
“제로는 리치의 기억과 지식을 거의 완벽하게 지니고 있잖아. 그 소중한 것들을 낭비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어?”
공화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음의 유적에서 나오는 죽음의 마력 때문에 기적성이 궤멸될 뻔했다며? 난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때 얘기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더라. 어쨌든 그 힘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 리치도 할 수 있는 걸 우리라고 못 하리란 법은 없잖아?” 저 해골들은 사령탑의 힘으로 움직여. 바람처럼 빠른 놈들이라서 궂은일에 적격이라고 할 수 있지.”
공화련은 해골병사 얘기를 하면서 점점 더 신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아무리 더럽고 힘든 일도 푸념 한 마디 없이 해낸다니까. 이런 일꾼을 마다할 상인은 없을걸? 이 해골병사 몇만을 보유하고 있으면 광산 채굴처럼 힘들고 위험한 일도 쉽게 해낼 수 있어. 아주 많은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겠지.”
‘망령들을 이용한 노동력 보충, 염가 경제. 큰아가씨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대단해요, 정말 대단합니다. 큰아가씨는 역시 기적성의 대들보예요.”
천제현은 공화련을 크게 칭찬하며 말했다.
“하지만 사령탑의 용도는 망령 통제에 국한되지 않죠. 제로에게 설계도를 준비하라고 하세요. 제가 좀 더 연구해 볼게요.”
죽음의 유적에서 나오는 힘은 천제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기적성과의 거리 또한 그다지 멀지 않으므로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을 듯했다.
공화련은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둘 사이에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매일같이 여기저기서 널 위해 힘들게 일하는데, 넌 그런 날 계속 속이려고 하다니.”
천제현은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의 맑은 두 눈은 영혼마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천제현은 자기도 모르게 뜨끔했다.
“잘 알 텐데?”
공화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를 흘겨봤다. 다정하고 총명해 보이는 눈빛에 일말의 원망이 담겨 있었다.
기적상회에서 그녀는 줄곧 여걸의 이미지였고, 그녀의 지위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무정한 사내에게 버림받은 아낙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니. 천제현은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정말 잘 모르겠어요.”
천제현의 멍청한 표정을 본 공화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서련이와의 일 말이야!”
“앗, 그걸 어떻게?”
천제현은 화들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공화련에게 그 일을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초원에서 공서련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공화련의 마음을 알게 된 마당에 어떻게 그녀에게 그 일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벌써 알고 있었다니.
“서련 아가씨가 얘기했어요?”
“직접 말하진 않았지. 하지만 내가 그 정도 눈치도 못 챌 줄 알았어?”
공화련은 언짢은 듯 말을 이었다.
“나는 서련이의 언니야. 서로 못 할 말이 없다는 뜻이지. 게다가 어려서부터 내가 서련이를 키웠으니 부모님 대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서련이에게 변화가 생겼는데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
천제현은 민망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윽, 큰아가씨, 정말 눈치가 끝내 주네요!”
“두 사람 모두 날 속이려 들어?”
공화련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정말 너무들 해!”
천제현은 안절부절하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서련 아가씨랑 사귄다는 건 적당한 때에 모두에게 발표할 생각이었어요. 그전에 큰아가씨가 알아챌 줄은 생각도 못했고요. 용서해 주세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흥, 불쌍한 척하지 마. 내가 널 모를 것 같아?”
공화련은 두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일어났다. 성주로서, 그리고 회장으로서의 위엄이 쏟아져 나왔다.
“말해두겠는데, 사귀기로 했으면 잘해 줘. 우리 서련이 울리기라도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줄 알아!”
공서련은 지나치게 순수하다. 마음을 숨기는 게 애당초 불가능할 정도로. 그래서 그녀가 천제현을 좋아하는 걸 기적상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천제현도 공서련에게는 항상 특별하게 대했으니 둘의 관계가 이렇게 발전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공서련의 언니인 공화련이 동생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공화련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천제현의 눈빛을 느끼고 내뱉었다.
“뭘 봐?”
“정말 그렇게 화통하게 서련 아가씨를 제게 주는 거예요?”
“그럼 어쩌라고?”
천제현은 머뭇거렸다. 공서련은 큰아가씨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공화련의 담담한 모습을 보니 질투 같은 건 조금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다행이고요. 전 또 기적상회 안에서 ‘한 남자를 둘러싼 자매의 치정극’ 같은 게 일어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흥, 못하는 소리가 없네.”
공화련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래서 실망이라도 한 거야?”
천제현은 울적한 듯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조금?”
“이리 와 봐!”
“왜요?”
공화련은 두 팔을 뻗어 천제현의 목에 감고는 그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언제나 침착하고 정숙한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하다니, 천제현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저기요, 큰아가씨. 백주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렇게 못 참겠으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자고요. 여긴 보는 눈이 있잖아요.”
그 와중에 새끼 여우는 앞발로 눈을 가리며 자기는 못 봤으니 하던 거 계속 하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공화련은 두 눈을 감은 채로 가볍게 말했다.
“갑자기 피곤해져서 어깨 좀 빌렸을 뿐이야! 내가 이렇게나 많은 일을 처리해 주는데, 어깨 한 번 못 빌려줘?”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천제현은 입만 털 뿐이었다.
“아가씨는 기적상회의 둘째 주주잖아요. 기적성의 부성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일을 처리해 ‘주다’뇨?”
그러나 그녀는 못 들은 양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하국 변방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같이 도망치던 일 기억나? 그때 우리,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할 걸요. 저 정도 되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당하다니.”
“우리 같이 물속에 빠졌잖아. 넌 중상을 입었고 난 움직이지도 못했지. 죽기 일보직전이었어. 그때…… 충분히 혼자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왜 목숨을 걸고 날 뭍으로 보내준 거야? 넌 이미 최선을 다한 상태였어. 날 포기했더라도 누구도 욕하지 않았을 거야. 공화련 천 명이 있어 봤자 천제현 하나를 못 당할 텐데 말이야.”
“사람 목숨이 물건도 아니고, 효용가치로 평가할 순 없죠. 그건 사나이의 원칙 문제예요. 이유는 없어요.”
“난 이유를 알아. 네가 바보여서야!”
공화련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투는 오랜 친구와 한가로이 잡담을 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거 알아? 그때부터 나에겐 서련이 외에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 한 명 더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