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1
제541장 린지아
관 뚜껑이 세차게 열리면서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소녀의 얼굴은 백 년 동안 햇빛을 못 본 것처럼 창백했다. 작은 체구에 커다란 붉은 도포를 걸친 모습은 얼핏 보기에 인형 같았다. 그러나 현음종 종주의 검붉은 눈동자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무척 깊어 보였다.
“나는 현음종 18대 종주인 린지아다. 전대 종주님의 뒤를 이은 지 벌써 15년째다!”
“종주님을 뵙습니다!”
“종주님을 뵙습니다!”
“종주님을 뵙습니다!”
현음종 술사들이 하나씩 머리를 조아렸다. 어린 소녀처럼 보이지만 현 종주는 사실 대단한 실력자로 천 년 역사를 지닌 현음종에서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이다.
그녀는 종문의 삼대 전승 무공인 현음마공과 시마대법, 구유통명결을 신기의 경지까지 연마했다. 게다가 본인에게 적합한 새로운 무공을 창시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음령경이라고 명했다.
이 무공은 6대 명산의 전승 무공에 뒤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현음종 종주는 6대 명산의 종주 중 가장 어렸지만 당대의 가장 뛰어난 천재였다.
그러나 천제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열 살 남짓한 소녀로 보이지만 종주는 사실 심빙우와 비슷한 연배로 아직 마흔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종주는 특별한 무공을 연마했거나 특이한 혈통 혹은 체질 때문에 열 살 정도의 소녀로 보이는 것이다.
강시요괴들이 하나씩 일어나 종주의 곁으로 돌아왔다.
린지아의 자그마한 몸이 마치 공기처럼 강시요괴들 가운데로 떠올랐다. 린지아는 방금 크게 한 방 먹은 탓에 면목이 없었던지 앳된 얼굴로 독한 표정을 지었다. 린지아는 어린아이 같은 가냘픈 목소리로 위엄을 보이려 기를 썼다.
“신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째서 태음산을 들쑤시고 우리 현음종 사람들을 인질로 잡았느냐?”
천제현이 린지아의 실력을 파악했다. 진령 4성의 마력으로 천령급 실력이었다. 만만찮은 상대였다. 게다가 천제현은 린지아가 매우 괴이하면서도 엄청난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러 종류의 오래된 전승 무공을 신기의 경지까지 연마하여 클라크 같은 토착 부족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을 지닌 것 같았다.
천제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음무극이 끼어들었다.
“저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대주 왕족의 공주입니다. 대주 왕족의 복수를 하러 온 게 틀림없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공격하십시오.”
공서련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대주 왕족의 복수라니?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대주 왕족? 대주국에는 왕족이 없었다. 대주 왕족은 6대 명산에서 속세를 통치하려고 내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어. 그런데 그 허수아비들이 뜻밖에도 혈맥의 힘을 지니고 있었지. 놈들은 암암리에 힘을 키우며 진짜 왕족이 되려고 했어. 대주국의 일곱 번째 세력이 되어 속세를 장악하려고 했다고!”
린지아가 과거를 회상하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주왕은 거의 성공할 뻔 했지. 18년 전 대주 왕족은 6대 명산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니게 되었어. 몇 안 되는 인원으로 그 정도까지 해냈으니 대단하다고는 할 수 있지. 혈맥술사를 가볍게 보면 안 돼!”
‘그런 거였군.’
천제현은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6대 명산은 우두머리인 천검산의 지휘 하에 대주 왕족을 협공했다. 그때 현음종 종주는 내 사부님이셨지. 그때의 토벌 작전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대주 왕족이 멸망한 건 6대 명산의 잘못이 아니야. 대주 왕족은 스스로 자멸한 것이야!”
린지아가 노인네 같은 말투로 말했다.
“주제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6대 명산에 맞서려 했으니 죽음을 자초한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심빙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18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흐릿했다. 그녀는 6대 명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기에 이 일을 가슴 깊이 묻었다. 부모형제가 잔인하게 살해당했기에 원한이 사무쳤지만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놈들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천제현은 심빙우의 사연을 전혀 몰랐다.
린지아가 경고했다.
“저 여자가 대주 왕족의 마지막 공주라고 해도 왕족이 전멸했으니 넌 아무것도 건질 수 없어! 네놈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저 여자를 위해 6대 명산을 적으로 돌리는 건 미친 짓이야!”
천제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부종주와 장로들, 대주 공주를 넘기고 벌로 팔 한쪽을 잘라라. 그러면 종주의 이름을 걸고 너희를 용서해주겠다!”
“꿈 깨시지!”
공서련이 외쳤다.
“심 선생님을 넘기는 일은 없을 거야. 재주 있으면 잡아보시지!”
린지아가 버럭 화를 냈다.
그녀로서는 엄청나게 양보한 셈이었다.
“정말 무례한 놈들이구나!”
천제현이 눈알을 굴렸다.
“강시요괴 열 명을 호위로 거느리다니 강시 연마 실력이 뛰어나군. 저 강시요괴들의 실제 전투력은 어느 정도지?”
“흥, 버러지 몇 놈쯤이야 쓸어버리고도 남지!”
“그렇다면 내기나 하자고.”
천제현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강시를 연마할 수 있어. 내가 연마시킨 강시와 종주가 연마시킨 강시를 붙여보자고. 종주가 이기면 아무 조건 없이 인질을 풀어주지. 종주가 지면 대주 공주의 왕족 재건을 도와. 물론 거절해도 돼. 그래 봤자 인질 몇 명 죽는 게 다일 테니까. 어때?”
린지아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을 들은 것처럼 배를 쥐고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현음종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10대 강시요괴가 눈앞에 있었다.
‘저놈은 눈이 멀었나?’
‘감히 종주님과 강시 연마술을 겨루겠다니 설마 10대 강시요괴보다 더 대단한 강시가 있단 말인가?’
공서련과 심빙우는 천제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잠시 멈칫했다. 심빙우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천제현을 바라봤다.
대주 왕족 재건이라니? 농담이겠지!
“내기를 받아주지. 네 강시는 어디 있지?”
“서두르지 마. 여기 있으니까!”
천제현이 작은 두루마리 열여덟 개를 꺼내 땅에 늘어놨다. 이것들은 공간탑을 짓고 난 후 남은 재료들로 만든 공간저장 두루마리였다. 신혈강시 열여덟 명이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오너라!”
공간두루마리가 자동으로 펼쳐지면서 압축되었던 공간이 순식간에 커졌다. 금빛 피부를 지닌 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천제현이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신혈강시들이었다.
린지아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저 강시들은 무엇이지?”
천제현이 소환한 신혈강시는 린지아가 가지고 있던 강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엎었다. 이론상 강시 등급은 흑색 강시, 백색 강시, 강시요괴, 강시왕으로 나뉜다. 강시왕 단계가 아니면 강시의 몸은 털로 뒤덮여 있다.
‘저놈의 강시가 전부 강시왕 단계는 아니겠지?’
천제현의 강시들은 몹시 괴상해 보였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전해지는 힘은 강시요괴 수준이었다. 심지어 강시요괴보다도 약해 보였다.
“강시들을 어떻게 단련시켰지?”
“배우고 싶어?”
“그런 엉터리 방법을 배워서 뭐하게?”
린지아가 코웃음 쳤다.
“음령경으로 지휘하는 강시요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보여주마!”
그녀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10대 강시요괴는 스스로 앞으로 걸어나왔다.
천제현은 린지아가 신식으로 이 강시요괴들 조종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전 신식이 공격을 받자 린지아는 강시요괴들을 조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건 강시들의 대결이야!”
린지아는 조금 전의 일이 되풀이될까 걱정스러웠다.
“신식으로 내 조종을 방해하면 이번 내기는 바로 무효가 되는 것이야. 그때는 널 가만두지 않겠다!”
신식으로 강시를 조종하면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신식을 사용하기에 신식 공격에 능한 고수는 강시 조종술의 천적이다. 린지아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신식을 이렇게 강하게 연마한 것이다. 대주국에서 신식으로 그녀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은 천제현이 처음이었다.
천제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비겁한 짓은 절대 안 해. 재주껏 덤벼보라고!”
린지아가 손으로 빠르게 수인을 짓자 강시요괴의 몸에 주인이 떨어졌다.
“음령인, 신외화신!”
강사요괴들에게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주입된 것 같았다.
“흡!”
강시요괴들이 강력한 힘을 방출하며 모두 정령을 불러냈다. 이번에는 천제현도 깜짝 놀랐다.
“뭐…… 뭐지? 강시요괴에게도 정령이 있단 말이야?”
린지아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
10대 강시요괴가 아주 특별한 정령들을 불러냈다. 모두 해골 형상의 망령으로, 바람, 불, 물, 어둠, 천둥 등 저마다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장거리 공격에 능한 정령도 있고, 육박전에 강한 정령도 있었다.
린지아의 힘이 극에 달하자 정령이 나타났다.
천제현은 지금까지 별의 별 신기한 정령들을 많이 봐 왔다. 공화련의 천서 정령, 공서련의 거울 정령, 동방가문의 무장 정령 등, 모두 진귀한 정령들이다. 그 외에도 산, 강, 숲, 해와 바다까지 정령으로 나타나는 걸 보아왔다. 자신처럼 신마가 정령이 되기도 했다.
진귀하고 요상한 정령을 익숙하게 봐 온 천제현이다. 그런데 린지아의 정령을 본 순간, 천제현은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린지아를 중심으로 한 토목공간에 어두움이 스며들자 묘비들이 하나씩 쑥쑥 솟아나와 어느새 죽음의 기운이 잠식한 공동묘지로 변했다.
하지만 진짜 공동묘지는 아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공동묘지다. 이것이 바로 린지아의 정령이다.
‘묘지 정령이라니!’
천제현은 지금껏 묘지로 된 정령은 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정말 별의 별것이 다 있구나.’
린지아의 묘지 정령에 있는 10개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묘지 정령에서 나온 10개의 부정령이 강시 몸속으로 들어가 강시에게 정령의 힘을 준 것이다.
모든 강시가 린지아와 연계되어 있다.
린지아의 아바타가 된 이들 속에는 정령이 들어 있어 무공도 사용할 수 있다. 린지아가 익힌 모든 능력이 정령을 통해 강시에게 들어갔으니 모든 강시는 신기 경지의 무공을 갖게 됐다.
“이게 바로 내가 만든 음령경이다!”
미친 듯이 웃고만 있는 린지아를 대신해 강시요괴 10명이 동시에 입을 열어 말했다.
“네 강시는 무엇으로 나와 맞서겠느냐?”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큰소리치지 마시지.”
“좋다, 그렇다면 패배의 쓴 맛을 보여주지!”
10대 강시요괴가 마기를 내뿜으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몸에서 나온 무수한 망령들이 이리저리 오가다가 결국 두 손 위에서 거대한 검은 법인으로 뭉쳐졌다.
“현음대수인!”
신혈강시 18명은 공격할 기회조차 없었다.
현음대수인이 열 차례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 신혈강시들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줄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버렸다.
이 광경을 본 공서련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맙소사, 이 강시요괴들, 이렇게 높은 수준의 비술까지 쓴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