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8
제528장 겸사겸사
남하국 국민이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천제현을 은인으로 여겼다.
기적상회는 이제 단계적으로 터전을 옮기겠지만 기적상회의 흔적만은 영원히 이곳에 남을 것이다. 수많은 공장과 실험실이 앞으로도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왕국의 발전을 이끌어 가리라.
흥에 겨워 연신 잔을 부딪치는 사이, 공서련, 남궁혜, 비비안은 어느덧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한잔 더!”
“우리 여기 끝나면 영화관으로 갑시다!”
“좋지, 얼마 전에 신작 개봉했다던데.”
남궁혜와 공서련은 중주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중주에서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공서련의 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다.
“다시는 못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전송탑 덕분에 아무 때나 놀러 올 수 있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진짜 너무 좋아요!”
“그러게!”
남궁혜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 회장, 역시 대단하다니까!”
비비안도 덩달아 재잘거렸다.
“이제 거리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안 돼. 언제든 내키면 훌쩍 돌아와서 물건도 사고 밥도 먹고 영화관에서 영화도 한 편 볼 수 있는 거지. 생각만 해도 신나! 회장 진짜 최고야.”
기적성에서 막 불려온 델로리스는 처음 구경하는 인간들의 도시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여기가 바로 부성주님이 살던 곳인가요? 보아하니 높은 지위에 계셨던 것 같네요.”
공화련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공화련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위는 무슨, 1년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몇 백 리 떨어진 소도시에서 보잘것없는 장사치로 살고 있었어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듯 가슴 졸이는 나날이었죠.”
“그럴 리가요?”
델로리스의 목소리가 커졌다. 놀란 탓이었다.
“이렇게 큰 상회에 작위도 높고, 게다가 머리까지 비상하신 분이 보잘것없는 장사치라니요? 말도 안 돼요!”
“인간 사회는 숲보다 훨씬 복잡한 곳이에요. 그때는 힘도 배경도 기술도 없었으니 그냥 그렇게 버티는 게 고작이었죠.”
공화련의 눈빛이 문득 아련해졌다.
“1년 사이에 모든 게 바뀌었어요. 기적상회가 생겨나 발전해온 과정은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1년 사이? 기적상회가 생긴 지가 겨우 일 년이라고?’
떡 벌어진 델로리스의 입은 한참이나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이 모든 게 공화련이 아니라 기적성주가 만들어낸 걸작이었다니, 이름 그대로 기적 같은 사내가 아닌가.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 공표할 사안이 있소.”
남하왕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신하들이 교지를 올렸다.
“오늘 운몽후를 운몽군으로, 남궁혜를 봉황후로, 공서련을 서후로 봉하노니, 비록 국토의 협소함으로 영지를 내리지 못해 명목상의 작위에 그치나 이로써 나라의 은인인 기적상회와 굳건한 우호를 다지고자 하노라!”
남궁혜와 공서련이 어디 작위에 연연할 인물이던가. 두 여인의 손에는 한낱 작위 따위에 따라오는 부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만큼의 자원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명목뿐인 작위를? 하지만 조국에서 작위를 받는다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분 좋은 일임이 틀림없었다.
축하 분위기가 한창이던 그때.
남하왕의 통신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휴대용 통신기는 중주에서 더 이상 낯선 기계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이들에게는 이미 필수품이 된 지 오래였다. 국왕이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서야 되겠는가.
통신기를 통해 몇 마디 말이 채 오가기도 전에 남하왕의 미간이 무섭게 구겨졌다.
“북방 전선에 또 문제가 생겼다는군, 아무래도 먼저 일어나봐야 할 것 같은데.”
“네? 마수령이 또 쳐들어왔단 건가요?”
남궁혜가 탁자를 뒤집어엎을 기세로 벌떡 일어섰다.
“아니, 대체 언제쯤에나 포기할 셈이죠!”
“전면전까지는 아니고.”
남하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작은 소란 정도에 불과하네.”
“그간 여기 없었으니 모르겠지만.”
한쪽에 있던 운천학이 말했다.
“대융국이 국경을 넘보는 것도 벌써 대여섯 번째라네.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가긴 했어도 우리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지. 기껏해야 습격을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네. 남하국에는 아직 대융국에 반격을 가할 만한 힘이 없어. 일단은 국경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네.”
천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대융국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사주호 전투에서 송곳니 왕의 군대가 전멸한 후 대융국은 견융초원에 새로이 정예 30만을 집결시켰네. 거기에 장응전국에서 보낸 지원병력 30만이 합류해 현재 요새에 주둔 중인 병력은 60만에 육박해. 주둔군 수가 계속 늘어나는 동안에도 공격의 규모는 커지지 않았네. 아직은 힘을 비축하는 중이라는 얘기겠지. 군단이 일정 규모에 이르면 분명 또다시 남하를 향해 마수를 뻗칠 걸세.”
“머리맡에 시한폭탄을 두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군요.”
천제현이 공화련을 돌아봤다.
“온 김에 겸사겸사 놈들도 정리하는 게 어떨까요?”
‘온 김에 겸사겸사?’
국왕을 비롯한 좌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겠다는 사람의 말투로는 도저히 들리지 않았다. 어지간한 건배사도 지금 천제현의 말투보다는 비장함이 넘칠 것 같았다.
공화련의 반응 역시 상식 밖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연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그녀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기적상회 소유 산업체가 집중된 중주 땅을 적의 칼날 아래에 내버려 둘 수야 없는 일이니까. 손톱 밑에 박힌 가시는 빨리 뽑는 편이 좋아. 동방전 대장군과 다른 호국 영령들의 한도 풀어줄 겸.”
대융국은 명실상부한 대국이요, 견융초원은 거주민 전체가 전사들이었다. 멸한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뭐 얼마나 오래 남하국을 떠나 있었다고 새삼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지. 천제현은 그렇다 쳐도 공화련은 또 어느새 같은 부류가 되어서는.
“국력을 차츰 회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현재 병력으로 반격은 무리네.”
국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융국 주력부대를 처치한다 쳐도 광활한 견융초원에는 수천만에 달하는 마수령이 남아 있겠지. 게다가 견융초원의 뒤에는 장응전국이 버티고 있어!”
사실이었다.
이름에 전국이 붙는 나라를 우습게 보는 건 미친 짓이었다.
고수의 숫자와 전투력만 놓고 보면 혼돈의 숲보다는 못했으나, 어쨌든 장응국은 15억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거대 국가였다. 더군다나 마수령들의 나라가 아닌가.
마수령 국가와 인간족 국가는 질적으로 달랐다. 인간족 국가의 특징이 풍족함과 번영, 수준 높은 문명이라면 마수령 국가의 특징은 분산성과 야만성, 호전성이었다. 서로 비슷한 급끼리 맞붙었을 때 인간족 국가가 군사력으로 마수령 국가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고작 인구 수천만의 견융초원이 대융국을 잉태했다. 대융국은 수천만 밖에 안 되는 인구 내에서 백만 정예군을 키워냈다. 인구 몇 천만의 대융국이 인구 2만의 남하국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전사들로 똘똘 뭉친 마수령 국가의 힘이었다.
장응국 인구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15억, 그 정도면 대륙에서도 큰 나라에 속했다. 게다가 마수령 국가는 대부분 인구 중에서 군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국경 주변이 온통 전쟁터인 전국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장응국이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예군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전쟁을 생업으로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는 그들은 어딜 가나 먹이사슬의 최강자로 군림했고, 부속국이 바친 공물은 그들이 더 많은 군대를 키워내는 데 밑바탕이 되어줬다.
최근 몇 년간의 적극적인 정벌전쟁에 힘입어 장응국은 점점 더 부강해지고 있었다. 부단히 세력을 넓혀가는 중인 장응국에 있어 남하국은 수많은 정벌 대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장응국은 여러 주변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느라 전투력을 한쪽에만 집중시킬 수 없는 처지에요. 남하국 하나 치겠다고 병력 전체를 동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공화련은 장응국의 공격을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남하국을 칠 만한 병력이 있었다면 지난 반년간은 왜 숨죽이고 지냈겠는가?
지금껏 미적거리면서 대융국에도 겨우 병사 30만밖에 지원하지 않았다는 건 장응국도 그다지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북방을 손에 넣으면 완충지대가 생기는 셈이에요. 매 순간 마수령의 공격을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천제현이 탕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기왕 마음먹은 거 끝까지 가봅시다! 견융초원을 정복하고 북융국을 세우는 겁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대융국이 그리 간단히 멸할 수 있는 국가이던가. 견융초원 정복은 또 어떻고.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초원에서 바람처럼 움직이는 유목 마수령 수천만을 상대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는 말이다.
이때, 공화련이 대뜸 작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차세대 마력 무기의 성능 실험도 해보면 되겠네요. 동방호연 장군에게 연락해서 남주에 대기시켜 둔 광전사들을 이쪽으로 데려와야겠어요.”
고천추가 끼어들었다.
“두 분, 이건 신중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주 주둔 병력을 키우는 데 기적상회가 쏟아부은 자금이 무려 금화 십억 냥이에요. 전쟁에 돌입하면 보급품에 포상금에, 또 지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운천학도 거들고 나섰다.
“전쟁 물자 대느라 기적상회 전체가 발목을 잡힐 수도 있네. 이럴 게 아니라 때를 기다렸다가 훗날 왕국과 손을 잡고…….”
“기적상회가 그 정도 자금도 못 내놓는 집단입니까!”
천제현의 결심은 누구도 흔들 수 없었다.
“중주성은 개입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적성 병력만으로도 보름이면 끝날 싸움이니까요. 그리고 두 달 안에 견융초원을 통일할 겁니다!”
남하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천제현의 입에서 황당한 소리를 듣는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천제현이 저런 말을 할 때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공화련은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절대 허튼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저 둘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정말로 사태를 해결할 방도가 있기에 나오는 것이리라.
“좋네! 두 사람이 이미 결심이 섰다는데 왕 된 자가 어찌 뒤에 숨어만 있을 수 있겠나?”
현임 국왕은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다.
“기적상회의 지원만 바라며 손 놓고 있는 건 이 나라를 나약하게 만드는 짓이겠지. 병력 15만을 이끌고 함께 출정하겠네!”
솔직히 말해 천제현은 중주성 병력의 합류가 그리 반갑지 않았다.
혼돈의 숲에서 지내다 온 그의 눈에 남하국 군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남주성은 그 자체로 기적상회 소유의 거대한 병영이었다. 남주에 주둔 중인 야만족 광전사 3만이면 남하국 정규군 15만쯤은 기에 눌려 찍소리도 못 내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핀 기사나 지룡 기병 같은 왕궁부대쯤은 되어야 광전사 앞에서 겨우 어깨를 펼 수 있을까.
그러나 왕궁부대 육성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핀 기사나 지룡 기병이 2~3만 명만 됐어도 아마 남하국은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기적성의 전투력은 단순히 특수부대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그토록 강력한 부대가 위력적인 장비까지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마력 무기가 손에 있는 이상 내로라하는 전국(戰國) 최정예 부대가 와도 두려울 게 없었다.
기적상회 군대는 선왕의 아들이자 현재의 무안군인 동방호연이 이끌고 있었다. 지난 반년간 동방호연 역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아직 대규모 전투를 지휘해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이번 전쟁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