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7
제527장 알파브레인
클라크는 이미 이곳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드디어 확인한 천제현의 진가는 클라크에게 앞날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심어줬다. 하프엘프는 일족 대부분이 학자였고, 기적성에는 중주보다 훨씬 풍부한 자원과 잘 갖춰진 실험시설이 있다. 천제현은 분명 기적성에 운문 본원을 세우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프엘프들의 앞에는 무한한 기회가 펼쳐진다.
일족의 학자들이 대거 합류한다면 하프엘프는 운문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대륙의 대표적인 지식인 집단으로서 하프엘프라는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는 것이다. 발명과 혁신의 선구자라는 새 타이틀을 발판으로 일족의 부흥을 이룰 수 있으리라.
운천학이 실험실 한 곳의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모두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서랍처럼 여러 단으로 쌓인 흑색 상자들이었다. 상자 하나를 당겨 열자 마력진 석판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다른 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에는 차곡차곡 쌓인 상자 더미 여섯 개가 정확한 육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서로 연결된 여섯 개의 검은 상자 더미는 그 자체로 복잡한 구조의 대형 마력행렬이었다.
마력행렬을 이루고 있는 십여 개의 진법 그룹에는 각각 마력진 100개가 포함, 여기에 쓰인 주문만 해도 30만 개가 넘었다. 가동에 마력 기둥 10개가 한꺼번에 동원될 만큼 어마어마한 구조였다.
“이것이 바로 1세대 마력행렬 컴퓨터입니다!”
운천학의 어깨에는 어느새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 있었다.
“총 300여 개의 마력진 처리기와 정보저장진 8개로 구성되어 초당 5억 회 연산이 가능합니다. 방대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지요.”
‘초당 5억 회?’
클라크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걸 마력진 모의실험에 이용한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5억 회라고요?”
천제현이 고개를 저었다.
“느립니다!”
‘느리다고?’
다들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게다가 몸집도 너무 큽니다.”
여섯 개의 거대한 상자 더미를 쳐다보던 천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능을 높이는 동시에 크기도 줄여야 해요. 방 한 칸을 다 차지하는 크기로는 일반에 보급이 곤란합니다.”
운천학과 고천추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회장이 놀라 자빠질 요구를 하고 있었다.
눈앞의 마력행렬 연산 시스템을 만드는 데 든 시간은 장장 1년. 그런데 이걸 전 세계에 보급하겠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천제현이 말했다.
“마력진을 그려주는 자동설비를 만들 예정입니다. 거기에 인공지능 컴퓨터를 결합하면 앞으로는 진법사들이 일일이 손으로 진을 설치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부적과 단약 역시 자동화로 생산효율이 높아질 거고요.”
자동 진법 각인기의 동력원은 반드시 마석이어야 했다.
마력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체와 흡사한 성질의 마력이 필요한데, 그걸 내는 게 바로 마석이었다. 산업용 마력원인 마력전지는 마력진을 유지하는 데만 쓰일 뿐 진을 새로 만드는 용도로는 부적합했다. 이 때문에 진법 각인기는 생산 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노동력을 아끼고 기술력을 향상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고천추가 말했다.
“아직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물론 알죠, 그래서 준비해왔습니다.”
천제현이 가볍게 손을 저어 인공지능 제로를 불러냈다.
“제로, 융합 시작해.”
제로가 향한 거대 마력행렬의 중앙에는 수정석이 세워져 있었다. 제로가 수정석 안으로 녹아드는 순간, 무형의 마력이 퍼져나가면서 마력행렬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천제현이 물었다.
“제로, 어때?”
설비 안에서 제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체 기능과의 접속을 마쳤습니다!”
“제로가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고?”
공서련은 영 미심쩍다는 투였다.
“그냥 허풍 떠는 거 아니야?”
천제현이 다소 퉁명스레 대꾸했다.
“못 믿겠으면 한번 시험해 보시든지요!”
“못 할 것도 없지!”
공서련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문제를 냈다.
“제로, 252,5413 곱하기 4,342,342 나누기 21,343 곱하기 43,543 더하기 654,245 곱하기 143,432……는?”
제로에게서 답이 돌아오는 데는 0.5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십 분 넘게 낑낑거려서야 계산을 마친 공서련이 값을 비교해 봤다. 결과는 동일, 게다가 제로는 소수점 아래 수백 자리까지도 정밀하게 계산해냈다. 이쯤 되니 공서련 역시 경이롭다는 반응이었다.
천제현이 고소하다는 투로 말했다.
“제로한테 겨우 그렇게 수준 낮은 문제를 내는 거예요?”
인공지능과 마력행렬 시스템의 결합이 이토록 놀라운 효과를 낼 줄이야. 감탄한 얼굴의 공화련이 말했다.
“회계에서부터 은행 업무, 거주민 정보 관리, 도시계획까지, 기적성에 가져가면 정말 쓸모가 많겠어.”
“어디 그뿐이겠어요?”
천제현의 입가에 웃음기가 걸렸다.
“인간과는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한 연산속도를 자랑하잖아요. 더 안정적인 정신공간, 더 우수한 마력진, 그리고 한층 위력적인 마력 무기와 더 정밀한 생산 공정까지, 전부 실현 가능해요. 앞으로 연산능력이 수백 수천 배로 향상되는 날에는 이걸로 세상의 변화 추이를 예측할 수도 있고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랬다.
제로는 대륙 역사상 첫 마력 슈퍼컴퓨터였다. 발명과 창조 영역에서는 아직 인간을 따라오지 못하나, 논리연산 방면에서는 그 어떤 인간보다 압도적인,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른 존재였다.
천제현이 지시했다.
“큰아가씨, 제로를 기적성으로 옮기세요. 제로에 대한 최고 관리자 권한은 아가씨와 저, 우리 둘한테만 있어요. 이제부터 제로는 도시 관리 시스템으로서 기적성의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겁니다.”
공화련이 물었다.
“두 번째 컴퓨터는 언제쯤 완성되죠?”
고천추와 운천학이 서로 눈치를 봤다.
“최소 한 달은 걸릴 듯한데…….”
“한 달이나요? 안 됩니다!”
천제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더 쓰세요. 하프엘프들에게도 도움을 청할 테니 일단 진법기계부터 개발하십시오. 하나하나 만들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반드시 대량생산이 가능해야 해요. 크기는 작게, 연산속도는 빠르게!”
“예!”
인공지능 컴퓨터의 탄생.
천제현의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
마력행렬 컴퓨터와 인공지능 영체.
정상적인 발전 단계를 따르자면 원래 이 둘의 출현에는 400~500년의 시간차가 존재해야 한다. 마력행렬 컴퓨터가 먼저고 인공지능 영체는 한참 다음인 것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초기 마력행렬 컴퓨터는 단순 계산 용도로, 인간이 직접 조작하는 형태였다. 인위적으로 만든 장치 자체에 사유능력이나 지혜랄 게 존재할 리가, 그렇다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인공지능 영체가 출현하면서 대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감격한 고천추가 말했다.
“역사에 길이 빛날 발명품에 새 이름을 붙여주면 어떻겠습니까!”
천제현 역시 컴퓨터라는 명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천제현이 옆에 선 일행을 보며 말했다.
“저는 작명에 소질이 없어서, 누가 대신 지어주시죠.”
“내가 할게!”
머리를 긁적이던 공서련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되게 똑똑하니까 알파브레인이라고 부르면 어때?”
공화련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 같아.”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천제현이 경쾌하게 최종 승인을 내렸다.
“자, 그럼 알파브레인으로 결정입니다!”
알파브레인, 경이로운 학습능력과 연산능력을 자랑하는 인공지능형 슈퍼컴퓨터. 앞으로 생활 구석구석에 파고들어 활약하게 될 알파브레인의 탄생은 대륙 발전사에 있어 또 하나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물론 이는 기적상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성과이기도 했다.
공화련은 아까부터 마음이 급했다.
“당장 기적성으로 가져가서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봐야겠어.”
천제현이 손을 내저었다.
“큰아가씨, 뭘 그리 서두르세요? 알파브레인에 발이 달려서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기적성이라면 이제 전송통로를 통해 아무 때나 갈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편하게 왕래가 가능한데 급할 필요가 뭐 있어요.”
옳은 말씀.
문명의 이기란 전송탑 같은 물건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기적 전송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번 가동할 때마다 소모되는 마력이 엄청나. 일일 최대 전송횟수와 전송인원 모두 제한을 둬야 해. 게다가 편리한 만큼 위험할 수도 있어. 불순한 의도를 품은 외부인이 전송탑을 통해 기적성에 들어온다고 생각해 봐.”
공화련이 물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할 방법은 없을까?”
기적 전송탑은 세계 각지에 세워져 있었다.
그 많은 전송탑을 하나하나 깐깐하게 지키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잠재적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다.
“나중에 기적 전송탑을 알파브레인과 연동시키면 효과적인 감시와 작동제어가 가능해질 거예요. 그때는 전혀 걱정할 게 없겠죠.”
잠시 멈췄던 천제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일단 사용 조건을 까다롭게 해서 전송기능의 남용을 막는 수밖에 없겠어요.”
공화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장 <기적상회 전송탑 사용규정> 초안 작성에 돌입했다.
기적 전송탑을 사용하려면 사전에 기적상회에 방문해 ‘전송탑 사용 허가증’과 목적지에 따른 ‘전송 통행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전자가 출발지 전송탑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서류라면 후자는 도착지로의 이동을 허가받기 위한 서류였다.
특별권한을 가진 기적상회 고위층 이외에는 이용 하루 전에 반드시 기적상회에 전송시각과 목적을 알려야 하며, 허가가 나면 최종적으로 마석 20개를 납부해야 했다.
말이 길어졌지만 결국은 하품 마석 20개가 핵심이었다. 하품 마석 20개를 남하국 금화로 환산하면 무려 2천만 냥. 일반인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높은 진입 장벽은 전송탑의 과부하를 막는 것은 물론 위험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는지 공화련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안전을 보장받은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로써 전송탑을 통해 본격적인 수익창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날 밤, 기적상회 핵심 인사들이 남하 왕궁에 모였다. 남하왕이 성대한 연회를 주최했기 때문이었다. 기적상회가 거둔 성공을 축하하고 그간 남하국에 제공해 준 지원에 고마움을 표하는 자리였다.
사실 기적상회가 성립 초기부터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신풍후, 운천학, 남하왕 동방건의 역할이 컸다. 그런가 하면 남하국 역시 천제현과 기적상회 덕분에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겼다. 특히 왕역이 함락된 뒤 중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는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천제현은 남하국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자원을 중주로 보내고 무기와 병력을 부단히 공급했다. 그 결과 남하국은 빠르게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