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
제525장 인공지능(2)
여우족 제사장들은 이제야 궁금증이 풀린 듯했다.
‘우리를 데려온 이유가 이거였구나.’
‘영체 형태의 망령들을 모으려는 거였어.’
현재 기적성에서 그들만큼 숙련된 영혼보존 기술을 지닌 부족은 없었다. 그 기술이야말로 그들이 시전하는 소환술의 근본이기도 했다.
새끼여우는 가장 강한 망령을 완전히 제압했고, 소환수와 천제현, 공서련은 다른 망령들을 막았으며, 요괴신 제사장들은 괴이한 주문이 가득 새겨져 있는 작은 병을 꺼내 그들만의 신비한 비술로 영체 형태의 망령들을 담기 시작했다.
주변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적응된 공서련은 더 이상 겁을 내지 않았다. 망령들의 수가 엄청나긴 했지만, 당장 그들을 어쩌지는 못했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손에는 귀환 두루마리가 있으니 크게 걱정될 일도 없었다.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대체 이 많은 망령들로 뭘 하려는 거야?”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고 하라는 일이나 계속 하세요!”
망령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튀어나왔다. 일행은 그들과 반시간 넘게 싸웠으나 망령들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았다.
“성주님, 봉혼병이 가득 찼습니다. 더는 담을 수 없어요!”
요괴신 제사장 십여 명이 들고 있는 병들은 전부 보라색 영혼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 안에서 그 힘이 날뛰면서 금방이라도 병이 깨질 것 같았다.
“됐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천제현은 일행과 함께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괴이한 무덤을 빠져나가기 직전, 그의 눈이 먼 곳의 무언가를 포착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여긴 누가 봐도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이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고대의 엄청난 능력자가 만들어놓은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럼 저 안에 봉인되어 있는 건 대체 뭘까?’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 유적은 기적성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나중에 다시 와서 탐색해도 무방하리라.
천제현이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번 모험의 수확은 톡톡했다. 봉혼병 십여 개에 백 개가량의 강력한 영체를 봉인해온 것이다. 그가 봉혼병을 들고 실험실로 들어가자 하프엘프들은 화들짝 놀랐다.
클라크가 먼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성주님, 이건…….”
그러나 천제현은 설계도 하나를 불쑥 그에게 내밀 뿐이었다.
“너무 많이 알려고 들지 마시고, 일단 여기 적힌 대로 준비를 좀 해주세요.”
그 말을 들은 하프엘프들은 지체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서련은 천제현을 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묻지 말고 지켜보세요. 하여튼 말이 너무 많다니까.”
“그래, 나 말 많다! 나빴어!”
“매를 벌죠!”
천제현에게 엉덩이를 한 대 얻어맞은 공서련은 화가 치밀어 손톱을 세우고 천제현에게 달려들었으나 신혈강시들에게 대번에 제압당했다. 언제나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천제현 아니던가. 공서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화가 나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돌아가면 남궁혜 언니랑 비비안을 불러다가 같이 혼내줄거야!”
‘바보 같기는.’
남궁혜와 비비안의 실력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 둘은 천제현을 신처럼 숭배하지 않는가. 그녀들이 천제현에게 손을 쓸 리 없었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하프엘프들은 준비를 마쳤다.
클라크는 지표면에서 보라색 빛을 내는 마력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여러 개의 진법으로 이뤄진 이 마력진은 영혼 속성 진법이 틀림없었다. 이 시대에 영혼 속성 진법을 본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프엘프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지켜봤다.
이윽고 진법 중앙에 봉혼병 하나가 놓였다.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병뚜껑이 날아오르고, 그 안에서 흉악하게 입을 벌리고 손톱을 세운 악령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천제현은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진법을 가동하세요!”
하프엘프 제사장들이 급히 진법을 가동시키자 눈부신 빛이 악령들의 온몸을 꽁꽁 묶었다. 그들은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영체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원혼이며 악령들로 원념과 증오, 살육 등의 부정적 마력이 너무 강했다. 그러나 천제현의 진법이 그들을 죽이지 않고 하나씩 정화시키고 있었다.
클라크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원혼의 힘은 원념과 증오이다. 그래서 정신공격에 능한 특징을 갖고 있다. 만약 부정적 마력을 정화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형체까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천제현은 원혼과 악령들을 정화하면서 그들을 순수한 영체 형태로 잡아두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정화를 거쳤으므로 별다른 힘은 없는 놈들이었고, 빈껍데기 같은 영체만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이 영체들은 공격성을 잃고 안정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영체는 영혼의 힘과 정신마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두 가지는 사고능력의 근원 같은 것이죠.”
천제현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 영체들을 약간만 개조하면 간단한 사고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인공지능체가 되는 거죠.”
‘인공지능이라고?’
모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인공지능 개념은 시대를 초월하는 혁신적인 것으로, 클라크나 공서련과 같은 구시대 사람들은 이해조차 하기 힘들었다.
인공지능이란 인조 지능체를 말하는데, 생명체도 아니고 100% 망령이라고 볼 수도 없는, 사고 능력을 갖춘 도구이다.
지능이 있으면 사고가 가능하고, 사고를 할 수 있으면 학습이 가능하며, 학습을 할 수 있으면 진보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과 일반적인 꼭두각시의 차이점이다.
“영체 등급이 별로 높지 않은 관계로, 초보적인 수준의 지능체밖에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천제현은 개조에 성공한 십여 개의 인공지능체를 보며 말했다.
“이 영체들이 지능이 있다고는 하나 자아정체성을 갖추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지능형 도구가 될 수 있는 거죠. 영원히 지치지도, 짜증을 내지도, 겁을 내지도 않는 도구요. 인공지능체는 미래에 대량으로 제조되어 광범위한 분야에서 사용되며 산업 효율성을 크게 높여줄 겁니다!”
하프엘프들은 전율을 느꼈다.
‘자체적인 학습을 통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인공지능의 잠재력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도시 관리뿐 아니라 실험실에서의 연구에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리라.
인공지능은 감정은 없고 지능만 있는 존재기에 사고는 하지만, 자아는 없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공정성과 냉정함, 객관성을 지닐 것이다.
천제현이 장난처럼 손 몇 번 놀려 이렇게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낼 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을까.
공서련은 생각이 깊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인공지능을 개발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인공지능을 갖게 됐다는 건 피로를 느끼지 않으므로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학자들을 손에 넣었다는 것과 같았다. 운문연구소의 연구 개발 효율도 이로써 엄청난 개선을 이루리라.
클라크는 급히 물었다.
“성주님, 연구기지에 이런 인공지능들을 배치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초급 인공지능체를 만드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죽음의 유적에는 망령이며 원혼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니 몇 개를 원하든 전부 만들어낼 수 있죠!”
여기까지 말한 천제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저것들을 어떻게 훈련시키느냐 하는 겁니다. 인공지능이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초급 인공지능체의 지능에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학습 속도도 매우 느리답니다. 저것들에게 언어와 각종 기술을 가르치려면 최소 5년은 걸릴 테고, 필요한 지식을 전부 습득하게 하려면 수십 년, 심지어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하프엘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수명은 수백 년에 불과하지만, 영체의 수명은 무한하다. 아무리 학습능력이 떨어지더라도 하프엘프들이 대대로 훈련을 시키면 수천 년 후에는 대륙 최고의 현자급 존재로 거듭나지 않겠는가.
천제현이 그들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이론적으로 인공지능의 수명은 무한하지만, 기억공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초급 인공지능체는 말하는 법과 일상 교류만 배워도 대단한 거고요. 그 외에는 기초지식 정도나 습득할 수 있을까요? 그러다 기억공간이 다 차 버리면 더는 학습이 불가능해지겠죠.”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클라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해결 방법이 있을까요?”
일상 교류와 인사 정도만 할 수 있다면 기껏해야 육체노동이나 기본적인 정신노동에나 활용할 수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더 이상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더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체를 만드는 거죠.”
천제현이 클라크에게 뭔가를 던지듯 건네며 말했다.
“받으세요. 그리고 이걸 정화해 보십시오.”
“이건 리치의 혼불!”
클라크는 단번에 그게 뭔지 알아봤다.
그것은 천제현과 리치의 결전 이후 드라코리치의 유해 속에서 찾아낸 리치의 영혼의 불이었다. 그 안에는 리치의 모든 기억과 지식이 담겨 있었다. 천제현이 그것을 챙길 때 클라크는 그 이유를 궁금해 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 혼불로도 인공지능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혼불은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천제현은 십여 개의 망령을 분해 한 후 진법을 이용해 놈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리치의 혼불을 정화시켰다. 그 리치는 2천 년 이상 살아온 존재로 이미 오래전에 감정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자의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러나 천제현에겐 자의식을 갖고 있는 인공지능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래서 정화의 과정이 필요했다.
“자, 시작하세요.”
진법이 가동되고 리치의 혼불이 점차 정화되기 시작했다. 이전의 낮은 영체들 때와는 다르게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리치의 혼불이 정화가 완료되고, 천제현은 미리 준비해놓은 꼭두각시에 정화된 리치의 혼불을 넣었다.
그러자 꼭두각시는 빠르게 본래 있던 리치의 모습으로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큰 망토가 전신을 가리고 있었고, 망토에 달린 모자 안에서 붉게 번들거리는 두 눈이 보였다. 원래의 리치와 다른 점이라면 영체화되는 과정에서 리치의 힘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기억과 지능은 그대로였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제로(Zero)다!”
“네, 성주님!”
제로의 주변 공기가 진동하면서 만들어진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때렸다. 기계처럼 무미건조한 그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이나 의식도 느낄 수 없었다.
방금 전에 만든 영체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것은 높은 지능을 가진 고급 인공지능으로, 축적 가능한 지식의 용량이나 학습 잠재력 등이 초급 인공지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천제현이 물었다.
“클라크 장로님,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신묘한 기술입니다!”
클라크는 아부를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천제현이 리치를 지능체 꼭두각시로 만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 리치가 2천 년 동안 쌓아온 지식과 기억은 전부 천제현을 위해 사용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