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1
제511장 기적성
이 끔찍한 전쟁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직 새끼 여우만이 분지 안에서 죽음의 힘을 빨아들이며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나자 그린캐슬의 대군이 도착했다. 그들은 초토화된 분지를 보고는 어리둥절했다.
거의 지형까지 바꿔 버린 전대미문의 전쟁이었다.
이러한 수준의 전쟁은 최정상급 진령 술사조차도 겪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는 천제현이 실려 나왔다. 상처가 매우 심각했으나 의식만은 멀쩡했다. 그는 최대한 간결하게 클라크에게 분부를 내렸다.
“지금 당장 분지를 봉인하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세요.”
클라크는 더는 천제현을 무시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성주님!”
천제현이 그린캐슬로 옮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무용담은 성 전역으로 퍼졌다.
천제현 혼자의 힘으로 그린캐슬 전체를 살린 것이다. 그는 그린교와 하프엘프족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그린캐슬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제 앞으로의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사흘째가 되었다.
그린교의 하프엘프 장로회에서 성 전체에 천제현이 그린캐슬의 성주가 되었음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제 그린캐슬의 모든 사람들은 천제현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천제현은 결국 성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천제현이 성주가 된 후 선포한 첫 번째 일은 성의 명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기적성.
천제현이 정식으로 성주가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그린캐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명칭부터 변화를 주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그린캐슬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기적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전설을 쓰게 될 것이다.
혼돈의 숲 중앙에 위치해 지리적 이점을 지녔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도시.
기적성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기적성에는 수습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내부의 급한 불은 껐지만 대외 상황은 여전히 심각했다.
샤먼교에서 일으킨 대기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사령교에서 오염시킨 엄청난 면적의 남부 숲도 정화해야 한다. 기적성의 입지는 매우 특수하다. 힘이 약한 현재로서는 주위의 여러 큰 세력들과 마찰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통치자까지 바뀌었으니 성 내부에서도 일정기간 불협화음이 일 것이다. 상단들은 거의 성을 떠난 상태여서 기적성에는 뾰족한 수입원이 없었다.
델로리스는 천제현의 병상 앞에서 꼬박 한 시간 동안 성의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했다.
“그만. 이제 충분해요!”
천제현이 몸을 고쳐 앉았다. 대엿새 푹 쉬어서 많이 호전되었으나 천제현은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다.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있으니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요. 클라크 님은요? 클라크 님을 불러주세요!”
델로리스는 말문이 막혔다.
‘성주가 뭐 이래?’
클라크가 성에 도착하여 천제현에게 두 손을 모으고 예를 표했다.
“보고할 게 있습니다. 예상대로 분지에 지하와 연결된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고대 생물들의 유해가 가득했고 수많은 망령과 괴물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그렇게 강한 죽음의 마력이 방출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너무 위험한 곳이라 정찰 부대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지요.”
천제현은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가 떠올랐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일단 좀 놔두죠. 제가 직접 가서 봐야겠어요.”
클라크가 검정 수정석을 건넸다.
“리치용의 해골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리치용의 혼불 같은데 이걸 없애는 게 좋을까요?”
리치는 여우에게 먹힐까 봐 비술로 자신이 지닌 영혼의 불을 봉인시켰다. 바로 이 봉인 때문에 혼불은 최후에도 소멸하지 않았다.
천제현이 수정석을 건네받았다.
“2천 년 된 리치의 혼불이니 꽤 귀한 거잖아요. 없애기엔 너무 아까워요. 제게 쓸 데가 있어요.”
영혼의 불은 망령의 심장이자 영혼이다.
망령의 힘은 대부분 혼불에 봉인되어 있다. 지혜로운 망령의 기억과 사고 능력 역시 혼불의 파동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혼불은 망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몸 일부가 없는 건 괜찮아도 혼불은 필요하다.
이번에 발견한 리치의 혼불은 분명 손상되었다. 리치의 자의식은 완전히 소멸되었을 것이다. 이 혼불은 대뇌가 손상된 식물인간처럼 사고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천제현은 적당한 자극을 통해 혼불을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천제현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제가 부탁한 일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공간속성 수정석이 매우 귀하긴 하지만 다행히 하프엘프족이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성주님의 도안과 방법에 따라 일을 마쳤지요.”
클라크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공간속성 재료가 몹시 귀한 건 사실이나 딱히 쓸모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런 괴상한 탑을 세우려고 하시지요?”
공간속성 재료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공간속성 재료는 주로 장비를 저장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시대는 공간 분야를 연구하기에 한계가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공간속성 재료는 값이 매우 비싸고 희귀했다. 천제현은 사흘 전 클라크에게 도안을 주며 하프엘프와 함께 도안 속의 물건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고작 그것을 하나 만드는데 기적성이 보유하고 있던 공간속성 재료를 절반이나 썼다. 하프엘프는 속이 몹시 쓰렸다.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천제현은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소리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지금 바로 보러 가시죠.”
기적성 가운데의 작은 산골짜기에 약 2장 높이의 첨탑이 들어섰다. 첨탑 옆에는 거대한 원반이 놓여 있었다. 그 원반에는 공간속성 수정석이 가득 박혀 있었다.
천제현은 첨탑을 자세히 점검한 후 별다른 문제가 없자 성안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세심하게 다듬어진 성안은 원래 크기의 3분의 2밖에 안 되었다.
성안을 탑의 중심 부분에 놓자 탑의 구조가 하나로 연결되더니 알 수 없는 마력이 첨탑과 원반을 에워쌌다. 이 마력에 괴상하게 생긴 첨탑이 가동되자 탑 꼭대기에서 별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공간마력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하프엘프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공간마력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난해 한 마력 중 하나이다. 그런데 천제현은 이런 공간마력을 안정적이고 질서정연하게 방출시켰다.
‘이 정도면 되겠지!’
천제현이 통신기를 꺼내 올드만 마을과 접속했다. 올드만 마을에서는 이미 한참을 대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천제현은 곧바로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천제현이 통신기를 끄고 뒤를 돌아보며 물러서라는 손짓을 보냈다.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천제현이 의미 없는 일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천제현은 클라크와 델로리스가 보는 앞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성안을 첨탑에 장착시켰다. 그의 행동으로 봤을 때 이 첨탑은 뭔가 범상치 않은 힘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탑이 밝아지면서 공간수정석이 마력을 방출했다.
모두 알 수 없는 힘에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눈부신 섬광이 스치더니 첨탑 옆의 비어 있던 원반에 한 무더기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천제현!”
빛이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천제현의 귓가에 잔뜩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가녀리고 부드러운 몸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공서련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천제현은 품에 달려든 공서련을 꼭 껴안았다.
“봤죠? 제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니까요!”
“정말 신기하다!”
공서련이 얼굴을 붉히며 곧장 천제현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는 분명 올드만 마을에 있었다고. 그런데 두루마리를 펼치자마자 여기로 오게 되었어!”
“이게 바로 전송탑의 힘이지요.”
천제현이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작품을 바라봤다.
“기적성에 대륙 최초의 전송탑이 생겼어요. 이제 세상 어디에 있어도 공간 전송 기술만 사용하면 순식간에 우리 기적성으로 올 수 있습니다! 제가 공간창고를 통해 보낸 두루마리는 성안 조각과 공간수정석 가루로 만든 거예요. 두루마리에는 기적성 전송탑의 공간 좌표가 적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한꺼번에 이쪽으로 오게 된 거랍니다!”
이번에 공간이동한 사람은 공서련뿐이 아니었다.
공화련과 남궁혜, 심빙우, 비비안까지 기적상회의 핵심 일원들이 전부 모였다.
“큰아가씨, 비비안, 남궁 아가씨, 오랜만예요!”
천제현은 자그마한 꽃의 엘프를 발견했다.
“루루, 너도 왔구나? 이거 정말 잘 됐군!”
꽃의 엘프 루루가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루루 역시 몹시 놀란 얼굴이었다.
공화련과 남궁혜, 심빙우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까지 올드만 마을에 있었는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기적성에 와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올드만 마을과 기적성은 수만 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순식간에 이렇게 먼 거리를 뛰어넘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가장 놀란 건 비비안이었다. 공간능력을 지닌 비비안이 한 번에 순간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최대 몇 백 리에 불과했다. 거리가 너무 멀면 공간을 고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에 수만 리가 넘는 거리를 순간이동한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궁금한 게 무척 많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우선 소개를 좀 해드리죠.”
천제현이 고개를 돌려 나무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는 클라크와 델로리스를 바라봤다.
“이분은 하프엘프족 대장로이신 클라크 님이시고 이쪽은 여우족 요괴신 대장로인 델로리스에요. 이쪽은…….”
클라크는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반갑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시죠?”
“이 아름답고 귀티 나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인간족 아가씨가 바로 기적상회 부회장이십니다. 이제 기적성의 부성주를 겸임하실 거예요.”
천제현이 다시 옆의 깜찍한 비비안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엘프족 아가씨는 더 엄청나요. 이 아가씨는 영원의 숲 엘프왕의 막내딸 비비안이에요. 이제부터 기적성의 부성주 직위를 맡을 겁니다.”
공화련과 비비안은 엘프왕이 임명장을 내린 부성주였다.
클라크는 공화련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비비안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었다. 비비안은 엘프왕의 자식 중 가장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클라크는 처음에 엘프왕이 어째서 자신의 막내딸을 성주 자리에 앉히지 않고 무명에 보잘것없는 인간족에게 이런 중임을 맡겼는지 몹시 의아해했다.
비비안의 실력이 아직 그리 강하진 않아도 이 인간족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비비안은 엘프왕의 막내딸이다. 비비안이 성을 지킨다면 외부 세력들은 엘프왕이 무서워서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제 클라크는 그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천제현의 지혜와 능력을 직접 보게 된 후 클라크는 어려 보이지만 누구보다 박학다식한 이 인간족을 더 이상 얕보지 않았다. 엘프왕의 안목과 용인술에 대해서도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