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0
제510장 진법 제어
천제현이 힘껏 손뼉을 쳤다.
바람과 구름이 삽시간에 변했다. 거센 마력이 하늘에서 용솟음쳤고, 주변에 있던 사령탑도 잇달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요지부동한 드라코리치의 정신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이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럴 리 없어! 이 진법은 내가 유적에서 발견한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겨우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천제현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공중에 떠 있던 대진법이 변하기 시작했다. 기호들이 흩어져 재조합되었고, 진법의 형태도 변하여 완전히 새로운 마력진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끝없이 방출되던 힘이 불과 몇 초 만에 분지 쪽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동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드라코리치는 주변 사령에 대한 제어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라크 군단을 공격하던 해골들이 그 자리에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잠시 뒤 몸을 돌려 드라코리치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이 망령들은 본래 리치가 사령탑으로 조종했었다. 그런데 지금, 천제현이 사령탑의 제어권을 빼앗은 것이다.
드라코리치는 망령군단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클라크, 요더, 델로리스는 모두 아연실색했다.
리치에게서 제어권을 빼앗았다는 건 무얼 의미하겠는가. 가공할 힘만으로는 제단을 장악할 수 없다. 그보다도 죽음의 영역에 대해서 리치보다 더 깊은 조예가 필요했다.
드라코리치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울부짖었다. 그는 중상을 입은 녹색용을 놔두고 하늘로 날아올라 수백 명의 해골전사를 산산조각 내더니, 제단에 있는 천제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제단에 가까이 갔을 때 리치는 거대한 회색 결계에 튕겨져 나갔다.
천제현이 헤벌쭉 웃었다.
“네가 어렵사리 모은 힘을 안정화한 후에 공격했더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넌 사령탑을 보호하기 위해 제단을 포기했지. 본말이 전도된 완벽한 실수라고나 할까. 리치로 변한 후 총기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군. 이제야 네놈과 제대로 맞붙을 수 있게 되었어.”
천제현이 완전히 제단을 장악했다.
사령탑의 모든 힘은 제단에서 조종하는 것으로 제단은 정밀한 제어장치와도 같다. 리치는 자기 이외엔 누구도 제단을 제어할 수 없으리라 과신했다. 이제 그가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를 차례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이 분지의 주인은 리치였으니 지금 이 순간부터 천제현으로 바뀌었다.
사령 속성은 희귀 속성 중 하나이다.
대륙에서 사령 속성을 타고난 술사는 대단히 드물었고, 이 분야를 연구한 권위 있는 학자는 더더욱 없었다. 리치는 사령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할 만큼 출중한 인물이라 충분히 자신할 만했다. 그런 리치도 이 진법을 발굴한 후 오랜 시간을 거쳐 연구하고 개조한 후에야 다룰 수 있게 되었는데, 고작 외부인 주제에 어떻게 진법의 원리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를 과신한 탓에, 혹은 지나치게 이성적인 탓에, 고작 사령탑을 파괴하려는 천제현을 막으려 제단을 떠난 것이다.
제 꾀에 넘어갈 줄 누가 알았으랴.
제단을 빼앗긴 이상 해골룡과 한 몸이 되더라도 리치가 가진 우위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드라코리치는 제단을 장악하는 것이 곧 분지 전체를 장악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모아둔 모든 힘도 천제현에게 넘어갔으니, 그는 거의 무적 상태가 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천제현은 이제 막 제단을 점령했을 뿐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을 터, 리치는 이때를 노려 그를 처치해야만 전세를 뒤바꿀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드라코리치는 청록색 화염을 응집하여 제단을 향해 거센 불길을 날렸다. 그렇지만 이것이 제단에 닿는 순간 짙은 사령의 마력에 막혔다. 드라코리치의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
드라코리치는 절망했다.
전세가 천제현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이다.
그는 진법을 조종하면서 소리쳤다.
“이곳 제단을 제어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제 그만 항복하시지!”
드라코리치는 항복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 가득 찬 푸른색 화염이 돌연 해골에서 뿜어져 나와 불꽃처럼 폭발했다. 화염은 마치 촉수처럼 주변의 사령탑으로 떨어져 이를 하나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천제현도 흠칫 놀랐다.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군!’
리치는 자신의 몸을 직접 사령탑과 연결한 것이다. 이러면 제단의 제어권을 빼앗겼다손 치더라도 드라코리치는 사령탑에서 직접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어쨌든 사령탑은 리치가 직접 만든 것으로 내부 구조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겨우 몇 초 만에 드라코리치 체내의 불길이 10배 이상 강해졌다. 청록색의 화염이 마치 수정처럼 피부 표면으로 새어 나오더니 고체 형태의 껍질을 형성했다. 이 흉측한 해골룡은 짧은 시간에 온몸이 수정으로 조각된 거룡으로 변했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드라코리치한테 저런 능력도 있었어?’
이렇게 되면 천제현이 제단을 장악했어도 드라코리치를 공격할 수 없었다. 드라코리치는 다수의 사령탑에서 모은 힘으로 싸울 테니 그 강함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에 반해 약하디 약한 천제현이 어떻게 드라코리치를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쾅!”
드라코리치의 피부 표면에서 거의 고체화된 화염 마력이 계속 응집되고 있었다. 파란색은 점점 짙어지더니, 곧이어 회색으로 바뀌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망령괴수가 탄생한 것이다.
드라코리치 아래에 있던 해골들은 천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볏짚 쓰러지듯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해골전사의 머리뼈 안에 있던 혼불이 죽음을 의미하듯 완전히 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리치가 여러 날 하늘에 주입한 죽음의 힘이 다시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치 거대한 번개처럼 천제현이 있는 제단으로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졌다.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무수히 많은 암회색 마력이 광폭하게 떨어졌다. 리치는 지난 수일 간 준비한 그린캐슬을 파괴할 힘을 한꺼번에 회수하였고, 이 힘은 곧장 제단 주변을 덮어 검은색 불바다를 이루었다.
“후퇴하라!”
검은 파도가 용솟음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겁했다. 이제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죽음의 바다에 침몰당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망령괴수로 변하는 까닭에 다들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분지는 검은 액체가 가득 담긴 거대한 대야 같았다. 모든 것이 침몰되어 사라졌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때 검은 바다에서 광폭한 포효성이 들려왔다. 암회색 수정으로 만든 것 같은 망령용이 웅장한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으로 비상했고, 그 주위로 무수히 많은 원혼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자 주변의 마력이 빠르게 한 데 모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지름이 3~4장이나 되는 검은색 마력공이 만들어졌다.
검은색 마력공은 폭발할 듯 팽창했고 무수히 많은 번개가 주변을 수놓고 있었다.
이 공격은 리치가 사령탑으로 만든 일격에 필적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클라크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이 괴물은 화령술사가 와도 상대하기 힘들 것이오. 성주가 위험하오!”
천제현이 그린캐슬을 위협할 마력을 모조리 소모시킨 덕분에 그린캐슬의 안전은 확보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무시무시한 망령용이 있는 한 그린캐슬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까?
하프엘프들은 벌써 몇 대째 화령술사를 배출하지 못했다. 만약 이번에 직격탄을 받게 되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을 게 뻔했다.
현재로서는 저 망령괴수를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천제현 밖에 없는 듯했다.
천제현이 패배하여 드라코리치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린캐슬도 재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클라크와 하프엘프들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줄곧 인정하지 않았던 인간이, 무시로 일관했던 인간이, 줄곧 기피했던 인간이 그린캐슬의 존망을 결정할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그린캐슬의 유일한 희망이 된 것이다.
드라코리치가 날개를 퍼덕이자 블랙홀 같은 마력공이 분지 중앙을 향해 발사되었다. 마력공이 스쳐 지나가자 주변이 요동치니,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기세가 대단했다.
이때 검은색 검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더니 마력공을 반으로 갈랐다. 이윽고 검은 바다가 중앙으로 빠르게 모여들더니 거대한 그림자를 형성했다.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선 십안마신 같았다. 가운데 아홉 개 눈은 감긴 채 오로지 암회색 눈 하나만 떠져 있었다.
그는 우람하고 장대한 몸집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검은색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심연의 영역에서 온 전쟁의 신과 같았다.
“저건 뭐지?”
사태가 여기까지 치달을 것이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드라코리치는 마신의 힘을 가진 이 괴물이 진법의 힘을 빌려 사령의 마력으로 모습을 바꾼 천제현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드라코리치조차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드라코리치는 지난 2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이토록 무섭고 가공할 무공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드라코리치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이 무공이 신마구변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신마가 낮은 소리로 포효하자 검이 천천히 올라갔다. 주변에는 검은 기운이 자욱했고, 검기는 거룡을 겨누고 있었다. 마침내 검이 하늘로 용솟음치는 화염으로 바뀌었다.
천제현은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어 회심의 일격으로 승패를 결정짓고자 했다.
껍질이 딱딱하게 굳은 드라코리치의 육체가 다시 끓어오르더니 화염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몸집은 곱절로 커졌고, 마치 심연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검은 봉황처럼 전신이 이글거렸다. 이 불타는 몸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산했다.
그러자 신마가 검을 쥐더니 검은 봉황 쪽으로 묵직한 일격을 가했다. 이번에 휘두른 마력은 충격파를 발생시켜 수십 리나 떨어진 곳까지 폭풍이 일었다.
“죽어라!”
신마검이 휘두른 파멸의 힘은 무궁무진한 죽음의 마력과 결합하여 폭발적인 힘을 뿜어냈다. 파멸의 힘이 검은 봉황의 머리를 뚫고 꼬리로 빠져나옴과 동시에 신마검 역시 분열되어 폭발했다.
천제현은 이 충격에 바닥으로 튕겨나갔다.
천제현의 상처는 매우 심각했다. 정신과 마력에 모두 심각한 타격을 입어 적어도 보름 이상을 치유해야 간신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코리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 나 버렸고, 모든 힘도 사라지고 말았다. 죽음의 비술로 엉겨 붙은 용의 유해가 하늘 높이 솟아올라 분해되었고, 분해된 조각은 10리 멀리까지 날아갔다.
죽음의 분지를 잠식한 죽음의 힘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짧은 순간,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누군가가 의아해 하며 말했다.
“끝났어? 다 끝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