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9
제509장 해골룡
좌중은 깜짝 놀랐다.
요더 선지자의 실력이야 의심할 바 없었다. 그가 비룡으로 변신하면, 화령기의 술사와도 겨루어봄 직했다. 그런데 천제현은 일개 진령술사에다 진령 1성에 불과했고, 새끼 여우까지 저리 바쁜 상황에서 리치에 대항할 능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천제현은 더는 긴말하지 않고, 화살처럼 빠르게 사령탑으로 날아갔다.
‘사령탑을 무너뜨려 번개 덩어리의 힘을 잃게 하려고?’
‘불가능해!’
사령탑들은 막강한 마력이 보호하고 있어 천제현의 능력으로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 다들 의아해 하던 그 순간 천제현의 몸에서 엄청난 힘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마력의 기운이 하늘 높이 뻗어나갔고, 천제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이 모습을 본 리치가 중얼거렸다.
“사령의 힘? 너에게도 사령의 힘이 있는 건가!”
천제현의 주변에서 잿빛 안개가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사령탑으로 스며들었다. 천제현이 낮고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파괴하라!”
꽈르릉! 사령탑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이 균열은 사령탑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가더니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델로리스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죠?”
“사령탑이 지어진 목적은 죽음의 힘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오. 성주님은 신통한 능력뿐만 아니라 사령의 힘까지 가진 듯하오.”
요더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사령탑은 가까이 오는 모든 힘을 밀어내지만, 오직 죽음의 힘만은 배척하지 않는다오. 성주께서 죽음의 힘으로 사령탑 내부의 균형을 깨뜨려 제 기능을 못 하게 하려는 것이오.”
상공에 떠 있는 상태로 거의 응집을 마친 번개 덩어리가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울퉁불퉁해지기 시작했다. 균형을 잃고 만 것이다.
“조심! 방어 태세를 갖추시오!”
좌중은 서둘러 호신 마력을 발동했고, 거대한 번개 덩어리는 이내 공중에서 폭발했다. 폭발하는 순간, 빛도 열도 발산하진 않았지만,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협곡 전체를 순식간에 덮어 버렸고, 천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졌다.
번개 덩어리는 미완성 상태였고, 사람들은 멀리서 호신 마력으로 방어를 했지만 마력이 약한 자들은 중상을 입고 말았다. 이 공격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때 암흑의 기운이 어떤 기류에 휘말리듯 사람들의 몸에서 분리되어, 이내 새끼 여우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제현은 제단에 있는 리치를 응시했다.
“또 다른 재주가 있나?”
리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제현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수밖에.
순간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강렬한 원념이 대지의 깊은 곳에서 빠져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땅의 갈라진 틈 사이로 잿빛의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면서 무언가가 뚫고 올라오는 듯 지면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먼저 거대한 회색 날개가 땅에서 뻗어 나왔고, 이어서 거대한 몸과 발톱이 보였다.
“해골룡?”
천제현이 깜짝 놀랐다.
“땅 밑에 용의 무덤이 있었어?”
해골룡은 말 그대로 용족의 유해가 변화한 망령을 말한다.
용족은 거대한 생명체로 거룡, 교룡과 같은 고등 용족과 지룡, 공룡과 같은 하등 용족이 있다. 지금 천제현 앞에 나타난 이 해골룡은 용족 최강인 거룡은 아니지만 거룡에 버금가는 용족이 망령화 된 것이었다.
고등 용족이 망령이 되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리치의 능력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천령기 마력에 불과해 100년 동안 공을 들인다고 해도 이런 수준의 해골룡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해골룡 사체는 이미 오래전에 이곳에 묻혀 있었고, 극단적인 환경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머리뼈 안에는 죽음의 힘이 가득했고, 최상의 망령 재료가 되었으므로 특별한 방법으로 이것을 각성시키기만 하면 살벌하기 그지없는 망령괴수가 될 수 있다.
해골룡을 소환한 후, 제단에서 유영하던 리치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뻗어 나갔다. 그의 몸은 불타는 나비처럼 푸른 화염이 되어 타올랐고 엄청난 속도로 타들어 가더니 잿빛 마력으로 휘감겨 있는 거대한 해골룡 몸으로 떨어졌다.
“뭐 하는 거지?”
“제물 주술!”
천제현은 리치가 펼친 주술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다.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몸을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혼불과 정신을 모조리 해골룡의 몸체에 주입해 한 몸이 되는 것이지요. 이제 리치는 본래 육신에서 벗어났습니다.”
용의 유해는 강력한 원념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영혼이든 이를 감당할 수 없으나 리치는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해골룡의 거대한 몸을 제 것으로 만들려면 해골룡이 가진 사고의 파편을 정제해야 하기에, 미리 해골룡과 한 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악!”
해골룡이 부활을 알리려는 듯 하늘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해골만 남은 몸 안에는 푸른 화염으로 가득했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몸통에서 날개까지 잿빛의 얇은 막이 감싸고 있었다. 이 얇은 막 안에는 청백색의 화염이 휘돌고 있었는데, 이는 모두 리치의 힘이었다.
해골룡이 눈으로 보랏빛 광선을 쏘았다.
리치의 혼불이 해골룡 몸 안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이는 해골룡이자 드라코리치였다. 리치가 가진 강력한 힘과 해골룡이 가진 파멸의 힘이 하나가 되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기만 해도 주변을 모두 쓸어 버릴 것 같은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강력한 마력이 15장에 이르는 용의 전신을 감쌌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나 드라코리치가 막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옆에서 자신의 힘을 빨아들이는 엄청난 흡입력을 느꼈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새끼 여우였다.
격노한 드라코리치가 낮게 으르렁대더니 화염에 이글거리는 거대 발톱으로 새끼 여우를 내리쳤다. 그 위력이 어찌나 강하던지 주변 십여 장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델로리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요괴신님!”
천제현의 어깨 위에 잿빛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어느덧 새끼 여우가 돌아와 있었다.
드라코리치는 너무 강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의지가 없는 망령괴수와는 다르게 드라코리치는 리치의 기억과 지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고, 리치의 술법도 쓸 수 있었다.
리치는 이미 새끼 여우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모종의 비법으로 혼불을 봉인했다. 혼불이 꺼지지 않는 한 드라코리치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아까 빼앗긴 힘도 별거 아니었다.
반경 수십 장 안에만 있으면 사령탑에서 무궁무진한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까닭에 드라코리치는 그 정도 마력을 빼앗기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거대한 드라코리치가 하늘로 비상했다.
드라코리치로 변했지만, 의식은 중단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한 시간 이내에 그린캐슬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저지하라!”
클라크가 하프엘프를 거느린 채 앞장서 공격을 감행했다. 봉인 부적이 붙어 있는 십여 장 높이의 나무들이 땅 위로 우뚝 솟아오르더니 드라코리치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힘이 드라코리치를 옭아매기도 전에 드라코리치가 불을 내뿜어 순식간에 나무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화염이 지면을 뒤덮고 있는 해골에 떨어지자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삽시간에 불길이 사방을 뒤덮었다.
해골전사들은 화염에 휩싸였으나 타기는커녕 모종의 힘이라도 주입된 듯 속력과 힘 모두 몇 배로 강해졌다. 게다가 광기는 100배 이상 강해져 탐욕스러운 개미떼처럼 미친 듯 돌격했다.
“죽음의 망령이 되어라.”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드라코리치의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니,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령탑 수십 개가 그에게 힘을 공급했고, 드라코리치의 기운은 갈수록 커져갔다.
이때, 타오르는 망령의 바다 중앙에서 위협적인 용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요더의 왜소한 몸이 점점 거대해지더니 녹색용으로 변했다. 녹색용이 불을 내뿜자 앞에 있던 수백 명의 해골전사가 흔적도 남지 않고 타 버렸다.
“드루이드? 너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드라코리치가 급강하하더니 녹색용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 둘이 동시에 불을 뿜자, 화염 두 개가 서로 맞부딪혀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거대한 그림자 두 개가 부딪혔고, 드라코리치는 녹색용을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이 둘은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다.
녹색용은 몸집이 5장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드라코리치는 삼15장이 넘었으니, 체급 자체에서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거기다 요더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병이 있었지만, 드라코리치는 최상의 상태에다 아무리 소모해도 마르지 않는 힘까지 있었다.
절대 상대를 이길 수 없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용 두 마리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녹색용은 생명의 기운이 담긴 화염을 내뿜어 드라코리치의 날개 절반을 태웠으나 드라코리치는 죽음의 힘이 응집된 화염으로 공격했다. 녹색용의 복부와 등이 화염에 타 수축되었고, 검게 그을린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면서 마치 비가 내리듯 떨어져 나갔다.
녹색용의 생명력이 강했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생명체였다면, 아무리 거대한 생명체라 할지라도 이 화염에 바로 망령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망령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녹색용의 부상은 가볍지 않았다.
드라코리치의 왼쪽 날개를 덮었던 화염은 순식간에 검은 마력에 의해 소멸되고 말았다. 드라코리치는 거의 상처를 입지 않은 듯 보였다.
요더는 몇 분을 버티지 못했다.
다들 해골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공격받고 있는 터라 한동안은 그를 도울 수 없었다. 설령 그를 도울 기회가 있다고 해도 무한한 힘을 가진 드라코리치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을까.
“너무 약하군!”
드라코리치의 일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녹색용이 십여 장 이상 나가떨어졌다. 드라코리치의 몸에 생긴 미미한 상처는 사령의 힘으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너흰 그리캐슬에 어울리지 않아. 어둠과 죽음만이 너흴 영원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겼다고 생각하나?”
이 목소리를 듣자 드라코리치는 약간이지만 깜짝 놀랐다.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인간은 그와 드루이드의 싸움을 틈타 공간을 이용하여 제단으로 뛰어올랐다.
“뭘 하려는 것이냐?”
“그러게. 뭘 하려는 걸까?”
제단의 진법 통제구역 핵심에 선 천제현이 구안마신의 정령을 소환했다.
천지를 압도하는 기세가 드라코리치를 덮쳐왔고, 천제현의 눈동자는 죽음의 힘을 상징하는 잿빛으로 변했다.
“참으로 엉성한 진법이군. 대충 봐도 어떻게 제어하는지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