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504화 (504/729)

# 504

제504장 죽음의 유적(2)

성주 집무동.

새끼 여우가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의정실에 들어섰다.

가장 상석에는 천제현이, 그 왼편에는 클라크가 앉았고 새끼 여우를 받쳐 든 델로리스는 천제현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인원은 단상 아래에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병자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해낸 권능을 목도한 지금, 여우족은 이전보다도 한층 더 새끼 여우를 숭배하게 됐고 하프엘프들 역시 녀석을 흡사 구세주 보듯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린캐슬에 입성하자마자 성주 권한대행보다도 더 높은 신망을 얻은 것이다.

“여우 너 못 본 사이에 살찐 것 같다?”

천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새끼 여우를 훑어봤다.

“여우족도 네 녀석 식탐에 골치를 썩고 있겠어.”

새끼 여우가 카악 하고 천박하게 침을 뱉더니 천제현을 향해 가운뎃손가락, 아니 정확히는 발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 몸은 이제 만인의 추앙을 받는 요괴신님이시란 말이다. 공물도 간절히 들이미는 성의를 봐서 받아주는 거라고, 네놈이 뭘 알아!

천제현은 순간 관자놀이가 지끈했다.

여우 녀석이 점점 더 건방져지고 있었다. 이제는 주인마저 우습게 보는 듯했다.

“쓸데없이 티격태격할 시간 없어, 네가 해줄 일이 많아.”

새끼 여우를 한 번 노려본 천제현이 말했다.

“리치가 술법을 벌이는 장소가 남쪽 숲인 것만은 확실해. 정확한 위치를 찾아줘.”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고 나서 몇 차례나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소.”

주저하는 듯한 클라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말 찾을 수 있겠소?”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신의 눈동자를 꺼내 신식을 주입한 새끼 여우가 숲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천제현의 눈도 서서히 옅은 금빛으로 물들어갔다. 신식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천제현은 의식의 연결을 통해 현재 새끼 여우가 보는 화면을 똑같이 보는 중이었다.

그린캐슬 남쪽의 광활한 숲은 온통 누렇게 말라붙은 나뭇잎과 헐벗은 나뭇가지 투성이었다.

오래된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말라죽었다. 마수며 토착민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정체 모를 마력에 노출되어 망령생물로 변이하는 중으로, 망령군단의 일원으로 거듭날 순간을 목전에 둔 상태였다.

이런 규모의 재앙을 하루아침에 불러들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사령술사들은 아마 오래전부터 이날을 준비해왔으리라.

“잠깐, 방금 거기!”

천제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분지, 결계가 깔려 있어. 아무래도 저기 같아, 안쪽을 보여줘!”

천제현이 분지 하나를 지목했다.

결계에서 수상함을 느낀 탓이었다.

결계에 가려 시야는 모호했으나, 안쪽에서 풍겨 나오는 죽음의 마력을 놓칠 천제현과 새끼 여우가 아니었다. 새끼 여우가 손아귀에 든 신의 눈동자를 움직여 결계 내부를 비추자 빽빽하게 늘어선 회색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제단들이 거대한 마력진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회색 로브를 입은 인물 수백 명이 그 위에서 펄쩍펄쩍 뛰며 술법을 시전하는 중이었다.

제단이 세워진 자리는 아마도 유적지였던 듯싶었다.

그렇다면 강력한 마력의 출처가 설명되는 셈이었다. 유적지가 품고 있던 힘을 그린캐슬 공격에 이용한 것이었다.

“리치의 본거지를 찾아냈군.”

천제현의 눈동자에 예사롭지 않은 빛이 스쳤다.

“보아하니 의식이 벌써 막바지인 것 같아. 며칠 내로 그린캐슬 전역이 죽음의 마력에 잠겨 영영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썩어 들어갈 거야. 주변 지역 역시 영향을 받을 거고, 시간이 없어.”

옆에서 듣던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했을 줄이야.’

단순히 그린캐슬을 파괴하려 했던 샤먼 주술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령술사들은 한술 더 떠 이곳에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을 몰살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린캐슬을 죽은 자들만의 땅으로 만들 작정이란 말인가?’

그린캐슬 전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둥지가 엎어지면 그 안의 알도 무사할 수 없는 법. 하프엘프 군대만이 아니라 토착세력의 도움도 필요했다. 루츠 일당도 참전시켜 지난 과오를 보상할 기회를 준다면 좋을 것이다.

‘저 분지 안에 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천제현은 죽음의 마력을 발산하는 근원이 오래된 유적지임을 감지했다. 리치의 결계에 기틀이 되어준 것도, 그린캐슬에 주입할 죽음의 힘을 제공한 것도 그 유적지였다.

절대 평범한 장소일 리가 없다. 그곳에서 발산되는 죽음의 마력은 만시고묘보다도 몇 배는 더 농도가 짙었다. 그러하기에 광활한 그린캐슬을 망가뜨릴 무기로 선택된 것이다.

이때 천제현의 통신기가 울렸다.

“네, 비비안 공주님. 무슨 일로?”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천제현이 말했다.

“지금은 바빠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잠깐만, 천제현.”

통신기에서 비비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화련 언니가 그러던데 통에 넣어뒀던 강시들의 제련이 끝났대. 올드만 마을에야 어차피 필요도 없고, 회장 혼자 그린캐슬에 있으려면 힘들 것 같아서 공간창고를 통해 보내주려고. 이따가 확인해 봐.”

“네?”

예상 밖의 소식에 멈칫하던 천제현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필요하던 참인데, 잘됐네요!”

빽빽하게 늘어선 잿빛 첨탑 한가운데 원추형의 기이한 제단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래는 뾰족하고 위로 갈수록 둥글어지는 제단은 언뜻 땅에 박힌 거대한 송곳을 연상케 했다. 전체적인 재질은 흑색 수정으로, 표면에는 선홍색으로 새겨진 각종 주문과 진법이 뚜렷했다.

제단 상공에는 회색 로브를 걸친 사령교 제사장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팔을 벌린 채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제단에 새겨진 마력진이 번쩍하고 암홍색 광채를 내뿜는가 싶더니 대지로부터 울컥울컥 막대한 마력이 뽑혀 올라왔다. 송곳처럼 생긴 구조물을 거쳐 사방으로 퍼져나갔던 마력은 최종적으로 죽음의 탑에 저장됐다. 탑을 가득 채우고 넘쳐 나온 마력이 곳곳에서 서로 충돌하며 검은 번개를 일으켰다.

수백 개에 달하는 죽음의 탑에 저장된 마력의 양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사령교 제사장이 높이 쳐들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은 마치 말라붙은 나뭇가지 같았다. 로브에 덮인 얼굴은 수분이 다 빠져나간 시체의 그것이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보라색 살가죽이 해골에 겨우 붙어 있는 가운데 뻥 뚫린 눈구멍에는 짙푸른 사령화염이 이글거렸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의 정체는 리치, 결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리치의 말라비틀어진 얼굴에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상 표정을 짓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리치에게는 정서의 기복이랄 게 없었다. 희로애락이 무엇인지조차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이천 년이라는 세월은 평범한 생명체에게도 고역이거늘, 하물며 그게 촉감도 냄새도 모르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욕구라고는 전혀 없는 리치라면? 살아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생명체로서의 본능은 리치가 된 그 순간부로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영혼 깊숙이에 낙인처럼 찍힌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성공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었다.

이천 년을 살아온 리치는 생명체였던 시절의 흔적을 모조리 잊은 채 끈덕진 집착만을 붙잡고 있었다.

허공에 뜬 리치의 몸체가 달과 정확히 겹쳐지는 순간, 그의 입에서 복잡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주변에 늘어선 죽음의 탑이 덜덜덜 흔들리면서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죽음의 탑 백 개가 마치 용암을 토해내는 화산처럼 하늘을 향해 죽음의 마력을 뿜어냈다. 첨탑 상공이 새카만 먹구름 모양의 마력 덩어리로 뒤덮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엄청난 마력을 품은 유적입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군요.”

사령교 제사장 한 명이 리치에게 속삭였다.

“어느 정도 모이면 단번에 그린캐슬에 쏟아 붓는 겁니다. 멍청한 하프엘프들이 죽고 나면 그린캐슬은 어르신의 영지가 되겠지요. 그때는 누구도 감히 우리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할 터! 이 힘으로 망령들을 잔뜩 만들어내 이곳의 패주로 군림하는 겁니다!”

“그 인간족이 찾아올 것이다.”

리치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로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리치의 몸에 남아 있는 장기들은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 성대를 떨어 목소리를 내는 일 따위는 불가능했다.

지금 리치는 마력을 이용해 주변 공기를 진동시킴으로써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는 노련한 마력 제어능력이 필요한 기술로, 일반 술사들은 수십 년을 연마해도 제대로 익히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한한 수명을 지닌 리치에게 시간만 들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애초에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의 음성은 생명체가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기계가 서로 마찰하며 내는 거친 소음에 가까웠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롭고도 거북한 소리였다.

사령교 제사장이 가소롭다는 투로 말했다.

“고작 인간 따위를 신경 쓰십니까? 유적의 힘이 우리 손에 있는 이상 쳐들어와 봐야 놈들은 죽은 목숨입니다!”

리치는 그 인간족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천 년을 살아온 존재에게 그 정도 판단력이 없을 리가 없다.

“전원 출정해서 그린캐슬 군대를 막아라. 의식이 완료될 48시간 후까지 그 누구의 방해도 없게 하라.”

“예!”

리치의 권위는 사령교 제사장들에게 절대적이었다. 제사장 중 누구도 리치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

새벽녘, 그린캐슬 중앙의 초원에는 십만 병력이 운집해 있었다.

하프엘프 대장로 겸 그린교 대제사장 클라크, 요괴신 제사장 델로리스, 미노타우로스 아르놀트, 샤먼 제사장 루츠, 거기에 토착세력 족장들까지 필요한 인원은 모두 모였다.

병력을 더 소집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하지만 전투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건 어차피 군대의 규모가 아니라 질이었다. 이들 십만 명은 혼돈의 숲 한복판을 누비던 전사들, 상대가 남하국이라고 가정하면 이 숫자만으로도 왕역 주둔군 전체를 몰살시키고도 남으리라.

“저희는 준비가 됐습니다!”

“대제사장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현장 분위기는 자못 비장했다. 이건 그린캐슬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수백 리에 달하는 숲의 운명이, 그리고 여기 모인 일족들의 생사가 오늘 전투에 달려 있었다. 외부인인 천제현은 숲 속 지형이나 각 부대의 특성에 밝지 못했기에 이번 전투의 총지휘는 클라크가 맡았다.

클라크가 찌푸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주 권한대행은? 안 오고 뭐 하는 거지!”

“왔습니다, 왔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커먼 덩치 열여덟 명을 거느린 천제현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도와줄 녀석들을 데려오느라 늦어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기다리던 이들이 일순 흠칫했다.

‘항상 혼자 다니지 않았었나? 뒤에 있는 자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자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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