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503화 (503/729)

# 503

제503장 죽음의 유적

증오귀를 처치한 후.

천제현의 다음 임무는 전염병 해결이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든 전염병으로 그린캐슬 주민 4~5만 명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병자 대부분은 하프엘프로, 어린아이들과 마력이 비교적 약한 성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감염자들은 신체가 검푸르게 변하면서 사지에 힘이 빠지는 증상을 보였고, 열에 아홉은 혼수상태였다. 누가 봐도 평범한 병은 아니었다.

하프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마력이 탄탄한 종족이었다. 일반적인 질병으로는 이처럼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될 리 없었다.

신전에서 천제현이 구해낸 건 클라크 한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하프엘프 정예 수천이 천제현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난 편견과 오해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이제 클라크는 천제현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이 인간족이 가진 힘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린캐슬의 성주가 될 만한 자격은 이미 충분했다. 어쩌면 전염병을 해결할 능력도 있는지 몰랐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시에 병에 걸렸다는 건 확실한 감염원이 있다는 뜻이죠.”

신전에서 겪은 아찔한 경험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클라크는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했다.

“즉시 물과 식량을 확인했으나 오염된 흔적은 없었소. 단순 접촉만으로도 전염되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은 상황이오. 감염자 수는 나날이 늘고 있는데 원인은 도통 오리무중이라오.”

천제현이 아무 말 없이 환자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환자는 천제현의 허리께까지도 안 올 법한 여자아이였다. 혼수상태에서도 이빨을 갈며 까득까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본래 새하얀 피부 아래로 검푸른 혈관이 비쳐 보였다.

높은 체온, 빠른 심장박동.

천제현이 소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체내의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역시 처음 생각대로 미생물이 아닌 어둠의 마력이 일으킨 증상이었다. 체내에 침투한 암흑마력은 생물체에 지속적인 영향을 줘 변이를 촉발한다. 소위 말하는 마화. 단, 이번 건은 완전한 마화라기보다는 미리 설정된 체계에 따라 서서히 생리적인 변화를 유발하는 형태였다. 마치 일종의 저주처럼.

천제현이 즉석에서 휘갈겨 쓴 부적을 소녀의 이마에 붙였다. 그러자 시커먼 기운이 즉각 소녀의 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클라크가 황급히 물었다.

“뭔지 알겠소?”

“구울의 기운입니다.”

천제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이틀 안에 정화하지 않으면 감염자 대부분이 구울로 변할 겁니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음모인 것 같군요.”

경악한 클라크가 되물었다.

“뭐? 구울로 변한다니?!”

구울은 살아 있는 동물이 변해서 된 반쪽짜리 망령괴물로, 힘이 세고 포악한 데 비해 지능은 낮아서 제어하기가 손쉬웠다. 이런 이유로 사령술사를 비롯해 특수 무공을 익힌 술사들은 구울을 잔뜩 만들어 끌고 다니기를 선호했다.

구울은 스켈레톤이나 일반 좀비보다 훨씬 쓸모가 많았다. 힘쓰는 일에도, 전장에서의 화살받이로도 안성맞춤이었으니까.

동족 수만 명이 구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클라크가 분통을 터뜨렸다.

“망할 사령술사 놈들! 치료할 방도는 있소?”

“성주 대행 어른, 딸을 구해주십시오!”

“예비 성주님, 저희 오빠 좀 살려주세요!”

“성주 대행님…….”

주변에 있던 하프엘프들이 모두 천제현에게 몰려들었다. 클라크 대장로조차 못 찾던 원인을 이 인간족은 단번에 알아냈다. 비록 대대로 인간을 무시해온 하프엘프 일족이었지만 이자에게 비범한 능력이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잘 들으세요.”

천제현이 조용해진 하프엘프들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시에 감염된 걸 보면 전염원은 절대 음식이나 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사령술사들이 대형 진법을 설치해 그린캐슬에 방대한 죽음의 마력을 주입한 것 같군요. 몸이 약한 이들이 먼저 증상을 보인 겁니다. 그린캐슬 상공에 이미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뭉쳐 있을 겁니다. 그게 언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뭐라고요?”

“뭔가가 더 일어난다는 거예요?”

천제현이 말했다.

“사령술사들은 그린캐슬을 망자의 땅으로 만들 속셈입니다. 이곳의 모든 생명을 망령으로 바꿀 생각이겠죠. 식물이 모조리 말라 죽고 흙마저 죽음의 기운을 품게 되면 영원의 숲에서도 이곳을 포기할 테니까요. 물론 다른 세력 역시 눈길도 안 줄 테니 그린캐슬은 얼마 못 가 자멸하고 말겠지요.”

“숲 속 도시 하나를 완전히 오염시킨다고?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숲 속 도시의 면적은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도시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광활한 땅 전체를 오염시키려면 얼마나 강력한 힘이 필요한지 상상도 안 갈 정도였다.

리치가 무슨 방법을 썼는지까지는 천제현도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폐관수련 이후부터 천제현은 줄곧 그린캐슬이 기묘한 힘에 뒤덮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 보니 그건 일종의 마력, 그것도 인위적인 마력였다.

그린캐슬 안에 자라는 식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인위적인 마력라는 추측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체질이 약한 하프엘프들만을 콕 집어 저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마력원은 물론 숙련된 기술 역시 필요했다. 역시 리치는 범상치 않은 놈이었다.

하기야 2천 년이나 묵은 괴물이니, 그 긴긴 세월 동안 쌓은 지혜와 지식이 얼마겠는가.

“감염된 이들을 최대한 서둘러 치료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됩니다. 진짜 원흉을 제거하는 일이 시급해요. 그 망할 리치를 처치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치료가 가능하다고?”

흥분한 하프엘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인간은 생각했던 것만큼 한심한 종족이 아니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성주 권한대행이라는 이 인간족만큼은 대단히 유능했다. 하프엘프들은 샤먼보다도 가증스러운 사령술사 무리를 이참에 철저히 뿌리 뽑으리라 다짐했다.

제때 발견한 덕에 모두 치료는 가능한 상태였지만, 병자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다. 재료 구해오랴, 물약 제조하랴, 그 사이 그린캐슬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보장할 수 있을까? 시간이 없었다.

그때 천제현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 바로 새끼 여우였다. 녀석이 병자들의 체내에 침투한 죽음의 마력을 빨아내 준다면 수고를 한결 덜 수 있으리라. 사령교와의 전면전을 앞둔 지금, 비밀병기인 새끼 여우는 어차피 그린캐슬로 불러들여야 할 존재였다. 겉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녀석은 사령괴물의 천적이었다.

여우 얼굴 시왕의 체내에서 수만 년을 묵은 새끼 여우는 사악한 음기로 가득한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악을 제압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만시고묘 안의 천년강시 요괴마저도 새끼 여우에게 혼불(魂火)이 쪽 빨려 죽지 않았던가. 천년강시 요괴의 힘은 본디 진령급 고수에 필적한다. 갓 태어났을 때도 그런 천년강시 요괴를 제압할 수 있었던 새끼 여우다. 몇 번의 성장을 거친 지금은 훨씬 더 강해졌을 것이다.

새끼 여우가 도와준다면 승산이 대폭 높아진다.

얼마 후.

델로리스가 새끼 여우를 데리고 돌아왔다. 여우족 대제사장이 수행원으로 딸려 보낸 인원은 무려 정예 소환사 이백 명. 녀석은 여우족 사이에서 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매일같이 수많은 추종자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새끼 여우의 팔자는 천제현보다 열 배는 더 좋아 보였다.

“요괴신님께서 드십니다!”

경건한 표정의 여우족 수백 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도열한 가운데, 델로리스가 마치 성물이라도 되는 듯 새끼 여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걸어왔다. 엄격하게 선발된 여우족 미녀 십여 명이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클라크와 그린교 제사장들이 수군거렸다.

“저게 소문의 요괴신이라고? 인간족 말로는 자기 애완동물이라던데.”

토착집단 중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는 요괴신교가 애완동물 따위를 신으로 모시다니,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대장로님, 저 새끼 여우한테 정말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제 말이요, 어떤 마력 파동도 느껴지지 않는데요.”

누구라도 품을 만한 의문이었지만 천제현이 자리에 없으니 어디 마땅히 물어볼 데도 없고, 다들 요괴신교의 장황한 의장대를 멀뚱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우족 소녀의 손길에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새끼 여우가 잠에서 깬 수사자처럼 앞발을 길게 뻗으며 몸을 흔들어 털었다. 무심하게 주변을 훑어보던 새끼 여우는 들것에 누워 있는 병자들을 보더니 돌연 훅하고 숨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하프엘프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새끼 여우의 호흡에 골짜기 전체의 마력이 요동쳤다. 마치 방금 숨을 들이마신 게 손바닥만 한 털 뭉치가 아니라 거대한 고래의 숨결인 것처럼. 병자 수천 명의 몸이 들썩들썩 움직이는가 싶더니 모공에서 가느다란 실처럼 생긴 흑색 마력이 빠져나왔다.

곧 병자들의 몸에서 나온 마력이 공중에 한데 모여 커다란 공 모양을 이뤘다. 허공에서 검은 화염 덩어리가 타오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계속해서 모여드는 흑색 마력이 연료 역할을 하는 듯 새카만 구체는 점점 더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대장로님, 저것 보세요!”

새끼 여우가 흑색 마력을 전부 빨아내자 얼굴에 핏기가 돌아온 병자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됐어요, 정말 효과가 있어요!”

“저 여우에게 이토록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니!”

병자 대부분이 어린 하프엘프들이었다. 자식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부모들은 눈물을 흘리며 새끼 여우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델로리스가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요괴신님의 힘인가? 아직 성체가 아니신데도 이 정도라니!”

여우족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요괴신님은 분명 고대의 신과 악마에 맞먹는 존재로 성장하실 것이다.

새끼 여우가 병자들 몸 안의 나쁜 마력을 모조리 빨아내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허공에 뭉친 흑색 화염구는 이미 납덩어리만큼이나 무거워진 상태였다. 저게 추락했다가는 아래가 완전히 초토화되는 것은 물론이요, 죽음의 마력이 퍼져 나가면서 수백 장 안의 생명체가 전부 몰살당할 것이다.

저토록 강력한 마력이 작용했으니 하프엘프들이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겠는가?

새끼 여우가 주둥이를 벌리더니 마력을 덩어리를 깨끗이 빨아들였다. 일순 빵빵하게 부풀었던 뱃가죽은 녀석이 몇 차례 통통 두드리는 것만으로 다시 홀쭉하게 돌아왔다.

새끼 여우가 앞발을 들어 휘적휘적 흔들어 보였다.

“예, 요괴신님.”

정중하게 예를 표한 델로리스가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요괴신님께서 이들은 이제 무사하니 다음 환자들을 들이라 이르셨습니다.”

골짜기 전체가 일순 소란에 휩싸였다.

하프엘프들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쏟았다.

새끼 여우는 단순히 아픈 아이들만을 치료해 준 게 아니었다. 그린캐슬의 하프엘프족 전체가 그로 인해 구원받았다.

새끼 여우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좌중의 존경심 어린 시선을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하여튼 주인 녀석은 쓸모가 없다니까. 이까짓 일에까지 내가 나서야겠어?

연이어 실려 들어온 병자들이 모두 새끼 여우의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린캐슬에서는 새로운 감염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새끼 여우가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고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새 감염자들의 잠복기는 일주일, 그 안에 원인 제공자를 처치하기만 하면 이들은 저절로 완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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