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1
제501장 참살(2)
검은색 신마검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천제현도 더는 실력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광기 어린 파멸의 힘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가까이 있던 해골대가리들이 산산조각 났다. 형체만 흩어놓는 것이 아닌, 근본을 파괴하는 타격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해골들은 더 이상 치유되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리고도 수많은 해골들이 달려들었지만, 전부 3척 밖에서 소멸되었다.
천제현의 칼날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어느 샌가 그의 몸에 옮겨 붙어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온몸을 덮어 버렸다. 이제 그는 화염악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해골장군, 또 하나는 화염악마. 둘은 동시에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천제현과 기령, 그리고 무기가 완전한 합일을 이루며, 그의 힘이 순간적으로 몇 배나 폭증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힘이 사무엘을 덮치고 있었다.
이윽고 검기 하나가 하늘을 뚫고 치솟아 올랐다.
챙강!
해골 창 두 자루가 깔끔하게 두 동강 났다.
그런데도 천제현의 검기는 여전히 위력을 지니고 사무엘의 몸을 덮쳤다. 망령과 죽음의 힘으로 만들어진 해골 갑옷이 산산조각 나며 사무엘의 몸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일격.
군더더기 없는 일격에 사무엘을 제압한 것이다.
그때 천제현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화염에 휩싸인 몸이 8개로 갈라져 유성처럼 사무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8개의 형체는 제대로 바라보기가 힘들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며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사무엘은 간신히 버티며 소리 질렀다.
“그랬다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게 될 테니까!”
멍하니 둘의 싸움을 보고 있던 클라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직 일족을 구할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저자를 죽이면 수습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채 말리기도 전에 천제현의 분신 8개가 동시에 유명순염참을 시전했다.
분신 하나당 최소 30개의 검기를 내뿜는 것 같았다.
8개의 그림자는 눈 깜짝할 새에 200여 개의 검광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의 시야는 폭풍과도 같은 푸른 검광으로 가려졌다. 하늘 위에서 화염이 폭발한 것 같았다. 검광으로 뒤덮인 속에서 사람들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검기의 폭풍 가운데 있는 모든 사물이 가루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유명화에 먹히면서 재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검광은 나타날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이 어찌나 빨리 이뤄졌는지 아쉬울 지경이었다.
상공에서 검광의 폭풍이 사라지자 천제현은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화염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경멸의 시선으로 침을 뱉으며 말했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날 죽이겠다고? 사령 제사장도 별거 아니었군!”
주변에 적막이 흘렀다.
하프엘프들은 하나 같이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누가 저 인간이 약하다고 했어?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하잖아!’
‘스무 살 이하의 인간은 잠재력이 가장 클 때잖아! 저자가 앞으로 30~50년쯤 더 수련을 한다면 대체 어떤 존재가 되는 거야!?’
“사…… 사무엘을 죽이다니!”
몇 초간 돌처럼 굳어 있던 사령술사들은 분노와 경악, 공포의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왜 사무엘뿐이라고 생각하지? 너희도 죽여 버릴 생각인데!”
천제현은 검을 들고 번개처럼 수백 명의 사령술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사령교 최고위급까지는 아니었어도 사무엘은 그린캐슬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다. 하프엘프들의 대장로 인 클라크가 직접 나선다면 어떻게든 이길 수야 있겠지만, 아마 꽤나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교활하게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법을 아는 사령교 제사장들 앞에서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들 무시하던 성주 권한대행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풋내기가 사무엘을 깔끔하게 처리해 버렸다. 심지어 몇 합 겨루지도 않고서. 기껏해야 진령 1성인 인간족이 자기 몸에는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두 단계나 더 강한 진령 3성의 제사장을 처치한 것이다.
하프엘프 수천이 그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엘프왕이 보낸 인간은 무능력한 쓰레기가 결코 아니었다. 물론 영원의 숲에는 더한 고수도 많겠지만, 전투력만 놓고 보면 그린캐슬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게다가 아직 새파랗게 젊은 나이, 훗날 영원의 숲 늙은이들에 필적하는 거물로 클 가능성도 충분했다.
쉬익.
천제현의 활약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하프엘프들이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사이. 무서운 기세로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간 천제현이 마치 검광 그 자체가 된 듯 붕 날아올라 사령술사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항 한 번 못하고 잘려져 나간 사령술사들의 몸뚱이는 곧장 유명화에 휩싸였다.
“죽여!”
“놈을 잡아 죽이라고!”
격분한 사령교 제사장이 일갈했다.
이때 천제현의 눈동자가 다시 흰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주변 공간이 맹렬하게 뒤틀렸다. 훌쩍 위로 뛰어오르면서 모습을 감췄던 그가 다음 순간 나타난 곳은 사령술사 무리 한가운데였다.
“공간이동? 망할!”
거대한 검광이 공기를 갈랐다.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사령술사 십여 명이 마치 불붙은 나비처럼 맥없이 저만치 날려갔다.
사령 신전을 지키는 건 교단 내에서도 엄격하게 선별된 정예들이었다. 천제현은 그런 자들을 도마 위에서 채소 썰 듯 힘도 안 들이고 처리하고 있었다.
사령교 제사장 몇몇이 급하게 주문을 외우자 신전 위쪽에 조각상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던 가고일의 몸이 움찔거렸다. 날개를 퍼덕이며 깨어난 가고일들이 천제현을 덮쳐왔다.
가고일은 사령술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일종의 꼭두각시로, 샤먼교 꼭두각시나 그린교의 그린수호자와 비슷한 존재였다. 가고일의 전투력은 혼성 9성 마수와 맞먹었다. 온몸에 걸린 저주와 죽음진법 덕에 동급 적수 여럿이 동시에 덤벼도 상대하기 힘든 게 그들이었다.
깨어난 가고일의 수는 삼백, 순식간에 가고일 부대 하나가 가세한 셈이었다.
활짝 편 가고일들의 날개에서 발산된 잿빛 파동이 빠르게 주위를 뒤덮었다. 빛의 파동에 갇힌 사물은 토양이며 풀, 나무 할 것 없이 모조리 강력한 저주에 잠식당해 회색 돌덩이로 변해 버렸다.
석화저주.
모든 생물체를 돌로 바꿔 버리는 저주받은 힘.
그러나 천제현만은 예외인 듯했다. 빛의 파동 사이를 재빨리 뚫고 나온 그의 검이 사령술사 몇 놈을 더 베어 넘겼다.
궁지에 몰린 사령술사들이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썼다. 신전 주변의 묘지가 갈라지면서 좀비들이 깨어났다. 살갗에 봉합 흔적이 선명한 시체들이 마치 발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땅속에서 맹렬하게 튀어나왔다.
그 좀비들은 일반 강시를 한 단계 개조해 만든 것으로, 움직임은 뻣뻣하고 느릿느릿했으나 온갖 독소와 저주가 주입된 덕에 전투력은 가공할 만했다. 가고일처럼 사납고 민첩하진 못하더라도 일단 숫자가 천 단위를 넘지 않는가.
그러나 천제현의 눈에는 빽빽하게 늘어선 사령좀비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그가 다시 검을 들어 사령술사 한 명을 두 동강 냈다.
죽음의 힘을 부리는 술사들도, 무시무시한 망령괴물들도 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백 명의 사령술사와 천 마리가 넘는 사령괴물로도 천제현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놈을 없애!”
“당장 죽여 버려!”
가고일 두 마리가 흑자색 마력을 방출하며 좌우 양쪽에서 천제현을 향해 급강하했다. 몸체로 천제현을 들이받으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들이받은 것은 천제현이 아니라 반대편에서 날아오던 동족이었다.
퍼억.
가고일 두 마리의 몸체가 터져나갔다.
화염, 바람칼날, 얼음송곳, 독화살, 맹독암기, 사령좀비의 연이은 공격은 번번이 빗나갔다. 개중 몸에 명중한 일부 공격마저 마치 피와 살로 된 육신이 없는 듯 천제현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결과적으로 천제현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허공둔을 시전하는 천제현은 전신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있었다.
운 좋게 허공둔을 뚫는다 해도 결국 성광체의 방어력에 공격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저주, 약화, 부식, 그 무엇도 먹히지 않았다. 어떤 마력도 천제현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베고, 한 발 나아가고, 다시 베고, 한 발 더 나아가고.
천제현은 검 한 자루만으로 그 난장판 속에 길을 만들며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고위급 사령술사 수십 명이 검의 제물이 됐다. 그중 둘은 심지어 사령교 제사장 신분이었다. 넝마가 된 가고일이 십여 마리, 동강 난 좀비의 수는 백 마리에 가까웠다. 그때까지 천제현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령술사는 말할 것도 없이 하프엘프들도 기겁할 지경이었다.
저게 과연 인간인가. 빗발치는 공격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휘젓고 다니는 내내 상처 하나 입지 않다니. 정반대로 상대편은 저항할 엄두도 못 낸 채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하프엘프 한 명이 물었다.
“대장로님, 사령술사들이 전멸하면 동족들은…….”
“돌이키기엔 늦었어, 따로 방도를 찾는 수밖에.”
복잡한 표정이던 클라크가 결국 명령을 내렸다.
“다들 일단 사령 신전을 끝장내는 것만 생각한다!”
부상은 없더라도 마력 소모까지는 피할 수 없는 일.
천제현의 공격에서 점점 힘이 빠질 때 즈음 드디어 하프엘프들이 합류했다. 천제현 한 명만으로도 혼비백산했던 판에 하프엘프까지 가세하자 사령술사들은 아예 도망칠 엄두조차 못 냈다. 이쪽 편이 신전 안까지 밀고 들어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백에 달했던 사령술사 중 남은 건 고작 마흔 명가량. 사령술사들은 신전 안에 보라색 결계를 가동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심한 것들, 내가 죽길 바라지 않았었나?”
지친 와중에도 천제현의 눈빛만은 여전히 사령술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디 죽여보시지, 왜? 정작 멍석 깔아 주니까 겁이 나나?”
결계가 너무 견고해서 금방 뚫기는 어려울 듯했다.
물론 그래 봐야 사령술사들이 도망칠 구멍 같은 건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목숨만은 건질 기회를 주겠다!”
클라크의 낮게 깔린 음성이 신전 안에 메아리쳤다.
“당장 치료법을 털어놔라. 아니면 이 신전의 잿더미에 함께 묻히게 될 거다!”
“하하하!”
사령교 제사장 하나가 요란하게 웃어젖혔다.
“설마 그걸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린캐슬의 파멸과 하프엘프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일, 이곳은 죽음의 땅이 될 운명이다! 우리는 한발 먼저 저승신의 품에 안기지만 너희는 고통과 죽음의 심연에서 영원히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사령교 제사장이 몸을 틀어 뒤쪽의 거대한 제단을 쳐다봤다.
“진정한 죽음의 공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