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
제500장 참살
“영원의 숲에 사는 그 늙은 꼰대들의 성격은 너희도 잘 알겠지?”
사무엘은 불 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덧붙였다.
“엘프왕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린캐슬을 다스리게 하지 않는 건 그곳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방법이 없었겠지. 엘프들은 분란에 휘말리는 걸 가장 싫어하니까. 그러니 영원의 숲에 의탁하기로 한 건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네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지.”
그때, 스릉하는 소리와 함께 유명검이 뽑혔다.
“아무래도, 잡담이 너무 긴 것 같은데.”
천제현이 장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이 몸이 죽는 걸 원한다니 기회를 주마. 여기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자신 있으면 죽여봐!”
사무엘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나와 겨뤄보겠다 이건가?”
그러자 천제현은 껄껄거렸다.
“네가 그렇게 비열하고 지저분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그 더러운 피로 내 검을 더럽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걸!”
그 말을 들은 사무엘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가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을 뻗으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코를 찌르는 듯한 시체 냄새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 흑록색 불덩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주제를 모르는 인간이로구나. 음살시화의 힘을 보여주마!”
끔찍한 시체 냄새를 풍기는 흑록색 불덩이가 천제현의 발아래로 굴러오자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잠시 후, 녹색 화염이 하늘을 뚫고 치솟았다.
천제현은 어떤 동작도 채 취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화염에 먹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델로리스는 대경실색했다. 말도 안 돼. 저항조차 못하고 당한 거야?
하프엘프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성주 대행이라는 자가 강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반항 한 번 못 하고 죽어 버리다니.
사무엘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웃겨 죽겠군.”
그런데 그때, 불구덩이 한가운데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글거리는 열화에 완전히 먹혀 버린 천제현의 몸에서는 그 어떤 힘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거늘, 괴이하게도 화염이 관통한 그의 육신에는 그 어떤 상처도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천제현의 새까맸던 눈동자가 흰색으로 변해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기운이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천제현의 육체는 그들의 앞에 있건만, 그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적상회의 간부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 무공이 바로 천제현이 비비안에게 전수해 준 공간 신법, 허공둔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제 천제현은 스스로 그 무공을 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무엘의 음살시화는 일종의 기화(奇火)로서 음에서 태어나 시체의 기운을 먹고 자라난다. 사무엘은 오랜 기간 동안 십여 종류의 극독을 기 안에 넣어 눈 깜짝할 새에 생명체의 육신과 생기를 빼앗아가게 만들어 놓았고, 그로 인해 살아 있는 사람이 음살시화에 닿으면 즉시 강시로 변하게 된다.
화염 자체는 별로 강력하지 않았지만, 그 부차적인 효과들은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무엘보다 마력이 고강한 고수들도 음살시화에 접근하는 것을 꺼려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물며 그보다 마력이 낮고 어떤 방어 무공도 시전하지 않은 상대임에야.
그런데 어째서 천제현은 터럭 하나 상한 데 없이 멀쩡하단 말인가.
활활 타오르는 화염 한가운데 서 있는 천제현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떤 변화도 없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사무엘은 다시 몇 번 연달아 불덩이를 쏘아 보냈다.
퍽! 퍽!
불덩이들이 천제현의 몸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놀랍게도 불덩이들이 천제현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육신이 아닌 공기를 통과한 것 같았다. 몸에 닿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그 화염이 아무리 극독을 품고 있다 한들 그를 어쩔 수 있겠는가.
‘속임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정신 환술? 아니다. 어떤 정신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어!’
사무엘은 여전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온몸에서 음기가 맴돌았다. 그가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고목나무 가지 같은 그의 열 손가락에서 화염이 솟구쳐 나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 순식간에 고밀도의 거대한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흑록색을 띠고 있던 화염구는 빠르게 응축되며 칠흑처럼 새까만 색으로 변했다. 그 위력도 방금 전보다 열 배 이상 강해진 것 같았다.
천제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방금 전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화염 자체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그 강도가 진령 3성의 수준에 이르렀다. 천제현의 허공둔으로는 이렇게 강력한 힘의 간섭을 막을 수 없었다. 공격당하는 순간 효력을 잃고 사라지리라.
“괴상한 무공 하나 할 줄 안다고 나대지 마라!”
천제현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포착한 사무엘은 그가 이번 공격을 피하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공격은 어떻게 막을 생각이냐? 죽어라!”
검은 화염구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천제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피부와 육체에서 갑자기 눈부신 성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이 어찌나 강력한지 형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두 팔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끌어안듯 아주 자연스럽게 화염구를 끌어안았다.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나의 시화를 어찌 범인의 육신으로 막아낸단 말이냐?”
사령술사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프엘프들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저 인간, 저 화염구의 진짜 위협은 화염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극독과 저주라는 걸 파악하지 못한 것인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어찌 저리 무모한 짓을 한단 말인가.
치이익!
불과 물이 만나는 소리가 들렸다.
천제현의 품속에서 화염구는 점점 작아졌다. 극악한 음기와 독의 힘은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뚫지 못해 그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성광의 힘으로 인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꼈다.
‘이번에도 멀쩡하다니!’
‘저 인간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린캐슬을 통틀어도 사무엘의 공격을 저렇게 여유롭게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사실 그건 성광체의 효과 중 하나였다. 성광체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암흑과 죽음의 힘에 대한 높은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 아니, 그것들과는 완전히 상극이라고 보는 게 맞다.
사무엘은 이제야 좀 납득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영원의 숲에서 보낸 인간이 평범할 리가 없지. 저 정도 방어력이면 그린캐슬의 주인이 되는 데 무리가 없으리라. 오히려 그를 잘못 건드린 적들은 두고두고 후환이 남게 되겠지!’
그때, 천제현이 검을 들어 올려 이글거리는 검기로 바닥을 한 번 훑었다.
그와 동시에 사무엘의 망토 안에서 엄청난 어둠의 힘이 쏟아졌다. 수백의 망령들이 그의 몸을 감싸고 돌면서 순간적으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천제현의 검기가 땅을 스치듯 날아가 사무엘에게 부딪혔지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겨우 이 정도였구나!”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제현의 형체가 잔영만 남기고 사라졌다.
진령 3성의 사무엘조차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십여 개의 검광이 거미줄처럼 사무엘의 주변을 감싸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러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망령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고, 유명화의 힘에 의해 절반 이상이 사라져 버렸다.
사무엘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위대하신 지옥의 신이시여, 지옥의 문을 열어 망자의 힘을 세상에 풀어주소서!”
그러자 먹물처럼 새까만 먹구름이 사령 제사장의 주변을 뒤덮었다. 이윽고 그 힘은 흉측한 해골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바로 사령술사의 정령이었다.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흰 종이에 먹물이 떨어진 양 순식간에 주위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 어둠 속에서 싱싱하고 생기 넘치던 풀들은 흑요석처럼 변해 버렸고 얼마 안 가 유리가 깨지듯 하나 둘씩 산산조각 나서 땅에 떨어졌다. 천제현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천제현으로서도 함부로 부딪힐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곧이어 정령이 마력을 뿜어냈다.
이제 사무엘의 반경 5장 안에 생기를 띠고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수한 힘이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우자 그 힘은 다시 한 번 한데 뭉쳐 실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만귀색명!”
사무엘의 마력이 무수히 많은 해골대가리로 변했다.
사방팔방에서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들렸다. 정신 공격의 힘을 담은 그 소리에 하프엘프들은 안색이 크게 변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수많은 해골대가리들은 산산이 흩어져 도무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천제현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러고는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처럼 그의 피와 살을 뜯고자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환영이 아니었다.
해골대가리 하나하나가 모두 사령술사가 원혼으로 만든 무기였다. 그것들은 형태는 있으나 닿을 수 없는 괴물들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처치는 물론 피해조차 줄 수 없었다. 공격을 해봤자 몇 초 뒤에 다시 형태를 이루니 공연히 힘만 낭비할 뿐이었다.
인간의 몸이 그 해골대가리와 부딪히면 끔찍한 결과가 생긴다.
망령들이 상대의 육신 안으로 파고들어 저주와 죽음의 힘으로 온몸을 잠식하고, 정신과 영혼을 갉아먹게 될 테니까. 결국엔 피와 살, 정기까지 전부 빨아먹는, 사령술사들의 최고 무공이었다.
첫 번째 공격으로 끝을 내지 못한 사무엘은 두 번째 공격을 시전했다.
그러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망령의 벽과 먹구름들이 빠르게 그의 육신으로 모여들어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갑옷을 만들어냈다. 사무엘 역시 원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키 1장에 손에는 검은색 해골 창을 든 해골장군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온몸에서 주문이 번쩍거렸다. 두 개의 해골 창에서는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으며,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망령의 폭풍이 일었다.
사람의 영혼을 순식간에 얼려 버릴 것 같은 한기에 호흡조차 곤란해지는 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는 저항은 고사하고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제 또 어떤 수법을 쓸 수 있는지 볼까!”
수백 개의 거친 목소리가 겹친 듯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