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9
제499장 사령술사
그린캐슬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성 전체가 정체 모를 괴이한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실 천제현이 그린캐슬에 오기 전에 남부 숲 쪽에서 역병이 발발해 적지 않은 토착 부족들이 전멸한 바 있었다. 그 통에 숲의 큰 면적이 역병에 감염되었고 상황은 매우 심각했지만, 그래도 숲 안에서만 병이 돌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역병이 그린캐슬 안에서 발생해 며칠 안에 3~4천 명이나 감염된 상태였다. 긴급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최근 천제현은 면세정책을 시행하여 상단들을 불러들였는데 역병으로 인해 대다수가 달아나고 말았다.
델로리스가 옆에서 말했다.
“클라크 님은 사령교의 짓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지금쯤이면 아마 사령교에 도착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설령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 사령술사들을 어쩌진 못할걸요.”
사령교란 죽음의 신과 지옥의 신을 숭배하는 종교 색채가 강한 문파이다. 만시고묘의 유적을 남긴 고대 문파 역시 사령교와 비슷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신앙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이 세계에서 유령이나 강시 등 암흑의 존재들을 다루는 술사들은 대부분이 꺼리곤 한다. 그러나 그린캐슬은 그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오래전, 리치들이 사령술사들을 이끌고 그린캐슬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강시들을 부릴 수 있었는데, 피로나 권태를 느끼지 못하는 그 최고의 노동력들은 하프엘프들이 산맥을 깎고 도시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 일로 인해 하프엘프들은 사령교가 신전을 세워 신도를 모집하고 세력을 키우는 걸 허락해 줬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령교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하프엘프들을 위협할 정도가 된 것이다. 특히 이번 역병의 발생도 사령교의 작품인 걸로 의심되고 있었다.
클라크는 하프엘프들을 데리고 사령교 신전을 물샐 틈 없이 에워쌌다.
사령신전은 위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아치형태의 회색 성으로, 석상으로 변한 수많은 가고일들이 조각처럼 성곽 위아래에 잔뜩 꿇어앉아 있었다. 언뜻 보기엔 장식물 같았지만, 실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죽음의 괴물들이었다.
그린수호자들은 성곽 주변을 몇 겹으로 둘러쌌고, 수천 명의 하프엘프 정예병들이 사령신전 입구를 막은 채 사령술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클라크가 격노한 얼굴로 외쳤다.
“사무엘, 기어코 그린캐슬에 맞서겠다는 것이냐!”
“후후후.”
사령 제사장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클라크, 이제 그린캐슬은 하프엘프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가 그린캐슬과 맞서겠다고 한들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 어디로 숨었는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그 겁쟁이 성주를 불러와라. 너희 하프엘프들이 수치심도 없이 그린캐슬을 갖다 바치고 받들어 모신 그자가 어떤 작자인지 궁금하구나.”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어투였다.
그 말을 들은 천제현이 불쾌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델로리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무엘이라는 자예요. 사령신전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제사장이죠. 실력도 뛰어나서 진령 3성 정도는 될 거예요. 여기 있는 사령 제사장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걸요.”
“그런데 어째서 저자는 리치가 아닌 거죠?”
사무엘은 리치가 아니라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온몸에 붕대를 감고 거대한 망토를 두르고 있어 외모를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어떤 종족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사령술사들이 전부 리치라고 생각한 거예요?”
델로리스는 기분이 상한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리치 변신은 사령교의 최고 의식 중 하나예요. 가장 강하고 뛰어난 사람만이 리치가 될 자격을 갖죠. 게다가 그런 자격을 갖췄다고 해서 모두 리치가 될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난 것도 아니에요. 그린캐슬의 사령교단에서 리치가 된 사람은 창시자 한 명뿐이라고요. 그자는 2천 년 넘게 살아온 괴물이라고 하더군요. 영원의 숲의 그 늙은 엘프들보다 더 나이가 많겠죠!”
“리치 같이 천박한 존재도 숭배를 받는단 말이에요?”
천제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당신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이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세상에 리치가 부럽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델로리스는 반박하며 말했다.
“리치는 죽지 않는 몸이라고요. 불로불사는 모든 사람들의 꿈 아닌가요? 대륙의 수많은 제왕들 역시 영원히 죽지 않는 리치의 몸이 되기를 얼마나 원하는데요. 당신이라고 불로불사의 몸을 거절할 것 같진 않은데요?”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리치는 신비롭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 망령의 괴물은 생명체가 특별한 의식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론상 영원히 죽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천제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은 점만을 보려고 하지 마세요.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고, 감각기관도 없고 음식도 먹지 않으며 번식도 할 수 없는 게 리치예요. 삶의 모든 즐거움을 대가로 바치고 얻은 불사의 몸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도, 미녀를 안을 수도 없으며 자손을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도 없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도 없는 삶을 사느니 일찌감치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리치의 좋은 점을 부정할 순 없을 거 아니에요?”
“리치의 몸은 확실히 불로불사에 가깝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까울 뿐, 진정한 불사의 몸은 아니에요.”
“어째서죠? 리치는 죽지 않는 존재 아니었나요?”
“이론적으로 리치의 수명은 무한해요. 강력한 리치들은 심지어 영혼을 분리시켜 생명 상자를 만들기도 하죠. 그렇게 하면 육신이 파멸되어도 다른 곳에 숨겨둔 생명 상자를 이용해 부활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치에게 영원한 삶이 주어진 건 아니에요. 그들이 벗어난 건 육체의 노화와 파멸일 뿐, 영혼의 고갈과 노화는 피하지 못하니까요.”
이 세계에는 불로불사라 불리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다. 천제현이 만난 꽃의 엘프들도 그들 중 하나였다. 꽃의 엘프들은 확실히 정해진 수명이라는 게 없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생명체들보다 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환경에 대한 의존성이 크고, 서식지가 파괴되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생명체들의 육신과 정신, 영혼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물질은 의지를 결정하고, 의지는 영혼을 결정하는 식이다. 육신이 없는 정신은 점점 단조로워지며, 결국에는 인성을 잃거나 사고능력까지 사라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혼이 쇠약해져 소멸하게 된다.
리치가 된 생명체는 비술을 이용해 억지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므로 1~2천 년 이상 살면 점점 감정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갈수록 차갑고 무감각해지며 결국에는 인성과 사고능력을 잃고 생명체로서의 본능마저 사라져 망령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천제현은 리치 변신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괴물이 되는 데는 조금의 흥미도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컸는지 어느샌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심지어 사령신전 교도들까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주 대행!”
“성주 대행님께서 오셨다!”
하프엘프들은 한두 마디씩 의견을 말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들의 앞에 있는 젊은 인간족을 훑어봤다. 대부분이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에게 성주 자리를 준다는 것은 하프엘프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그린캐슬에 심각한 역병이 돌기 시작했는데, 이 성주 대행이라는 자는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는지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군가 했더니! 감히 위대한 리치님을 모욕하다니!”
사무엘은 비웃음과 분노의 눈빛으로 천제현을 훑어봤다.
“하프엘프들도 갈 데까지 갔군!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저 버러지 같은 인간을 성주 자리에 앉히다니. 도시가 멸망한다 한들 그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겠는가!”
그 말을 들은 델로리스가 쏘아 붙였다.
“그럼 이 모든 게 사령술사들의 짓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
“어리석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사무엘의 눈에는 조롱의 빛이 가득했다.
“중요한 건 역병에 감염된 하프엘프 수만 명이 앞으로 이틀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지.”
“이 비겁한 놈들이!”
하프엘프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번 일은 100% 사령술사들의 짓이 분명했다.
사무엘이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날뛸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망할 리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눈앞에 있는 저 사령 제사장들을 쓸어 버린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프엘프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수만 명의 동족들이 역병에 감염되었다. 저들 손아귀에 인질 수만 명이 잡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동족들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비열한 사령술사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일단 동족들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클라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원하는 것이 뭐냐! 말해라!”
“너희 동족들이 오래 살길 바란다면 위대하신 리치님께 그린캐슬을 바쳐라. 그러지 않는다면 역병은 불행의 시작이 될 것이다.”
“꿈 깨시지! 리치 따위에게 그린캐슬의 성주가 가당키나 하다고 보느냐!”
“버러지 같은 인간도 성주가 되는데 우리 고귀하고 박학다식하신 리치님은 왜 안 된단 말이냐? 너와 농담 따먹기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수만 명의 동족을 생각하란 말이다. 그들을 구할 자들은 우리 사령술사밖에 없을 것이다!”
사무엘은 천제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물론, 너희에겐 다른 선택지도 있다. 저 인간을 처리하고 저 자의 머리를 영원의 숲에 보낸 뒤 용의 고개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너희 하프엘프들이 계속 그린캐슬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게 해주마. 우리 사령교가 너희의 든든한 동맹자가 되어줄 것이다.”
리치가 성주 자리에 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사령 제사장으로서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사무엘은 일부러 불가능한 조건을 걸며 두 번째 요구에 대한 포석을 깔아놓은 것이다.
천제현을 죽이고 영원의 숲과 관계를 끊는 것. 그것이야말로 용의 고개가 바라는 일이었다.
하프엘프 수만 명의 목숨이 사령술사들의 손에 있으니 어려운 선택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하프엘프는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하찮은 인간 한 명을 위해 동족들을 버릴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