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493화 (493/729)

# 493

제493장 성주의 고뇌

천제현이 델로리스와 함께 성 주변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델로리스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이봐요, 출발이 성공적이잖아요. 성주 권한대행이 되었으니 앞으로 성주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고요. 당신도 순조롭게 성주의 조수로 활약하고 있는데,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천제현은 화려한 성주 의상을 흔들어 보였다. 하프엘프가 방금 그를 위해 맞춰준 옷이었다.

“예를 들면, 정열적으로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그런 것 말이죠.”

평소였다면 델로리스는 인간과 이런 애매한 관계를 즐기는 것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결정이 지금 공포되면 하프엘프 내부에서 엄청난 논쟁이 일어날 거예요. 영원의 숲이 그린캐슬에 임명한 신임성주가 인간족이라니, 누구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인걸요, 반란이 일어날까 두렵지 않나요?”

부인할 수 없다.

이 천제현이라는 인간의 실력은 정말 대단하다. 이번에 샤먼교 주술사들과의 갈등에서도 천제현이 뛰어난 활약이 없었다면, 하프엘프들은 아주 막대한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인간에 불과하다. 게다가 아직은 완전히 신분을 공개할 적절한 시기도 아니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다.

그린캐슬에 천제현의 세력이 든든하게 있는 것도 아니요, 요괴신교는 그린캐슬에 입김이 강한 세력도 아니다. 루츠는 압박에 못 이겨 굴복하고 있을 뿐이다. 일부 하프엘프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지만, 대부분은 인간이 도시를 이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현 상황은 천제현을 벼랑 끝에 밀어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겉으로는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나 그 낭떠러지 아래에는 깊고 깊은 바다가 일렁이고 있다.

천제현은 홀로 외로이 버텨야 하는 성주인 셈이다. 그저 상징적인 신분일 뿐, 실제 권력은 여전히 하프엘프의 손에 있다.

델로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하프엘프가 일부러 당신을 골탕 먹이려는 거예요. 지금 당신은 큰 공을 세웠고, 영원의 숲에서 인정을 받은 데다 엘프왕이 직접 임명한 사람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프엘프들은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특별히 당신에게 대항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하프엘프들은 당신이 잘못을 저지를 때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천제현은 그저 손발이 묶인 성주 권한대행에 불과했다. 진정한 성주가 아니라는 것은 하프엘프들이 여전히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뜻이다. 샤먼교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그린캐슬의 복잡한 국면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앞으로 풀어가야 할 내우외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게다가 천제현이 성주 권한대행 자리에 오른 이후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천제현이 실수를 하거나 조금이라도 손실을 가져온다면, 하프엘프들은 이를 빌미삼아 영원의 숲과 엘프왕에게 엘프족의 강자를 다시 임명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천제현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지만, 하프엘프로서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전략인 셈이다.

천제현이 이번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든지 상관없다. 하프엘프들은 마음 속으로 여전히 그의 신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능력과 지위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괜찮아요, 전 도전을 좋아하니까요.”

천제현은 화려한 성 안으로 들어가 넓고 기다란 창 앞에 섰다. 바깥 햇빛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실내가 환해졌다. 바깥을 내다보려니 온통 하얗게만 보였다.

한쪽 문을 열었다. 자연정원으로 꾸며진 화원에는 부드러운 푸른 풀과 온갖 꽃이 만개했다. 그 가운데로 작은 개울이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벼랑 끝에 멈춰 은빛 폭포가 되었다. 폭포수는 높은 벼랑에서부터 저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구름바다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가운데 외로운 섬들이 그 위로 떠다녔다. 산줄기 가운데 높이 솟아오른 산꼭대기 부분이 섬처럼 보인 것이다. 천제현이 있는 성은 산들 중에서도 가장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세운 성이었기 때문에 모든 산줄기며 지역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린캐슬 전체도 내려다보였다.

성은 총 백 층 정도의 아주 큰 규모다. 저 멀리 아래쪽에서 올려다 보면, 웅장하게 솟은 산봉우리 절반이 성으로 건축된 것을 볼 수 있다. 도시와 자연이 완벽하게 융합된 예술품 같았다.

자욱한 기운을 뚫고 깨끗하고 찬란한 빛이 실내로 들어왔다. 온 세상이 영험한 기운에 덮여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물게 경치가 아름다운 명소다. 그린캐슬은 위치 하나는 좋은데 사람이 너무 적어 적막한 게 아쉽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기적상회 본사가 이곳에 오기만 하면 그린캐슬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테고, 결국에는 혼돈의 숲에서도 중요 도시로 부상할 것이다.

천제현은 만족스럽게 성을 바라보다가 조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부임 첫날부터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죠. 어서 처리해야 할 문서들을 다 가져오세요. 이 성주님이 일을 시작해야겠어요.”

성주의 업무 공간에서 천제현은 보석이 가득 박힌 백옥보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방금 조수가 내온 차 한 잔을 음미하고 있었다. 좋은 물에 달인 고급 차였다. 물은 그린신전 내부의 생명의 샘물이요, 차는 엘프족의 고급 엘프녹차였다. 정말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생활이다.

천제현 앞에는 사람 키만한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반들반들한 거울 속 화면은 흐릿하다가 점차 선명해지더니 그 속에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늘씬한 몸매를 가진 이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나올 덴 나오고 들어갈 덴 들어간 매력적인 몸매로 젊음의 활력을 물씬 풍기는 여인, 아무리 봐도 부족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무언가를 살피는 중이었다. 덕분에 천제현은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매끄러운 도자기 같은 뺨, 맑고 투명한 수정 같은 큰 눈동자, 오똑하니 솟은 어여쁜 콧날, 입술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었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천제현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옷을 떨치며 말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성주님에게 인사 안하고 뭐하는 거예요!”

“와!”

공서련은 눈을 반짝이며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네 업무실이야? 아주 화려해 보이는구나, 뒤쪽 창밖에 있는 건 뭐야, 화원이야? 왜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지? 정말 성주가 된 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직접 와 보시면 알잖아요?”

천제현은 이런 자잘한 일들은 자신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올드만 마을 상황은 어때요?”

“언니가 주변 토착부족들을 모두 통일했어. 지금은 무역과 공업을 함께 추진하는 도시를 세울 계획인데, 우선 200만 명 정도 수용할 생각이야. 그러면 기적상회에 남아도는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수정의 눈물 광산 개발은 성공했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야. 그래서 차세대 마력병기 연구도 시작할 수 있게 됐어. 비비안 공주는 4번째 공간창고를 개발했고, 꽃의 엘프도 안정적인 정신공간을 만들었어. 우리 모두 마력이 아주 아주 많이 증진했어. 그리고 또…….”

“음, 음, 아주 좋네요. 모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군요. 모두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빨리 이곳으로 오세요. 주변에 사람이 부족해서 두 아가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좋아!”

공서련은 반색하며 답했다. 사실 그녀는 벌써부터 가고 싶었다.

“서련아, 천제현과 통신하고 있니? 목소리가 들리네.”

이때,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곧 매력적이고 늘씬한 몸매를 가진 미인이 거울 앞에 등장했다. 공화련이었다.

천제현은 바로 공화련과 인사를 나눴다. 공화련 역시 천제현이 성주 보좌에 앉은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천제현이 이렇게 일을 빨리 진행할 줄이야!’

공화련에게 숨길 게 없었던 천제현은 모든 진행과정과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렇다면 네 위치도 불안정하구나. 그린캐슬 발전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움직여야겠어. 다행히 최근 몇 달 동안 기적상회의 수익 규모가 계속 커진 덕분에, 지금은 꽤 자금이 많이 모였어.”

공화련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다른 자원 가치를 계산하지 않는다면, 기적상회는 총 2만 5천 개의 마석을 비축하고 있어. 지금 상회 규모가 아주 커졌기 때문에 하품 마석 5천개는 남겨서 유통시켜야 하니까, 나머지 2만 개를 상회 내부 전용 공간창고에 보관할게. 그쪽에서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가져다 써. 난 되도록 빨리 자원을 현금화시켜서 마석을 더 많이 확보해 발전하는 데 사용할게.”

‘기적상회에 벌써 돈이 이렇게 많이 모였단 말이야?’

천제현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마석 비축량만 해도 이 정도라니. 만약 기적상회가 사재기로 모아둔 자원 재료를 같은 가격의 마석으로 교환한다면, 최소한 지금에서 한 자릿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천제현은 자신이 생겼다.

내조에 뛰어난 공화련만 있으면 천제현으로서는 뒤탈 걱정할 일이 전혀 없다.

사무실 안쪽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델로리스가 돌아왔다.

“좋아요, 오늘은 우선 여기까지 하죠. 이 성주님은 이제 열심히 일을 시작해야 해서요.”

천제현은 공화련 자매와의 대화를 마치고 통신기와 영상을 껐다.

그가 고개를 든 순간.

펑!

온갖 족자, 장부, 기록이 산더미처럼 앞에 쌓였다. 몇 백 권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수량에 천제현은 얼이 빠졌다.

“우리 성주님 왜 멍하니 계세요?”

아름다운 성주 조수 델로리스가 교활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를 가지고요, 바로 옆에 있는 기록보관소 세 개가 다 꽉 차있어요, 모두 성주님이 봐주셔야 할 자료들이랍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렇게 많죠?”

“생각해 보세요, 지역별 세금 명세서, 대상 등록 자료, 도시 인력 상황, 도시 개발 상황, 주변 숲 상황 자료, 각 숲 세력 및 외교 상황, 연구소 연구 상황, 민생과 민정수치, 도시 계획 건설 초안, 수리 공사, 양식 재배, 치안 군사…… 모든 자료가 다 여기 있으니까요. 성주가 명령만 내리는 자리인 줄 아셨나 봐요.”

“아, 알겠어요. 이런 것들은 화련 아가씨가 오면 봐달라고 하죠.”

천제현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성주가 이렇게 번거로운 일일 줄이야.’

순간 찬물 한바가지를 덮어쓴 것 같았다.

“이제 제가 뭘 알아야 하죠?”

‘세상에 이런 성주가 어디 있담?’

델로리스는 이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답했다.

“그린캐슬의 상황이 좋지 않아요. 하프엘프의 재정 적자가 매우 심각해요. 방금 슬쩍 보니 최근 연간 재정 지출이 수익의 165%에 달하더군요. 하프엘프는 파산 직전이에요. 최근 10년간 세수는 지난 10년간의 50%도 안 돼요. 하락세가 너무 심해요.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