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
제492장 성주 권한대행
그는 대주술을 사용해 단번에 루츠를 해치우려는 속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벽을 뚫고 덩굴 하나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덩굴은 그대로 마르스의 등을 찌르고 가슴 앞까지 관통한 후 계속해서 나아가 기둥을 감싸 안았다. 마르스의 심장과 폐는 찢어졌고, 거대한 힘에 의해 꿰어진 몸은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신전의 결계가 어찌 이리 쉽게 뚫렸단 말인가?’
마르스는 덩굴이 뚫고 들어온 위치를 보았다. 루츠가 방금 벌레공을 던져 폭파시킨 후 피가 흩뿌려진 곳이었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벌레공의 목표는 애초에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뿌려진 피에는 강력한 주술력이 들어 있어 강산성 물질이 뿌려진 것처럼 신전 벽을 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내면서 이 부분의 신전 방어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하프엘프 덩굴이 신전을 둘러싸고 있던 상황이라, 급속도로 방어가 약해진 부분을 금세 간파했던 것이다. 클라크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벽을 뚫고 단번에 마르스를 해치운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네놈들이 잘 살아남을 성 싶으냐! 나 혼자만 저승에 갈 수 없지!”
마르스의 거대한 몸이 꿈틀거리더니, 무성한 회백색 머리칼이 갑자기 붉게 변하고, 수많은 벌레들이 몸속에서 꿈틀거리기라도 하듯이 피부가 울룩불룩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수는 점점 더 많아졌고, 몸은 더 크게 팽창해졌다. 몇 초 만에 바람이 가득 찬 고무공이 된 것 같았다.
“큰일이다.”
“자폭하려는 거야!”
“어서 도망쳐!”
샤먼교 주술사들은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며 앞다투어 도망쳤다. 마르스의 몸에서 벼락같은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고, 대전 내부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마르스가 평생 쌓아온 주술력이 뿜어내는 저주의 힘은 참으로 강력했다.
그 강력한 힘이 미처 도망치지 못한 샤먼교 주술사들을 뒤덮었다.
그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몸이 마르스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터져 버린 몸은 대량의 붉은색 마력으로 변했고, 그 힘은 다시 다른 이들의 몸에 붙어서 또 다른 폭발을 일으켰다.
이젠 자폭 수준이 아니었다.
마르스가 자폭하면서 수십 명이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만약 도시 중앙, 사람들이 가장 밀집한 곳에서 이런 술수를 썼다면, 짧은 순간에 도시 전체를 사지로 몰아넣었을 지도 모른다.
루츠가 주술사 절반을 데리고 도망쳐 나왔을 때, 신전 안은 이미 피바다가 되었다.
상황을 파악한 클라크가 즉각 손을 들고 외쳤다.
“샤먼교 신전을 봉쇄해라, 저 힘이 새어나오지 못하게 해!”
그린제사장의 공격이 이어졌다. 덩굴이 겹겹이 쌓이면서 땅 위에 무덤처럼 거대한 반원 모양이 생겼고, 계속 쌓여가던 덩굴은 몇 십 척 두께가 되었다. 그 안에 강력한 봉인능력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도 그 힘은 밖으로 조금도 새어나올 수 없었다.
“정말 굉장해요!”
델로리스가 풍만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사악한 놈이에요. 우리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엄청난 손실을 입었을 거예요.”
“샤먼교 대제사장도 죽고, 전투도 끝났으니 우리도 가봅시다.”
천제현이 델로리스를 데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하프엘프는 이미 전쟁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루츠를 포함한 수십 명의 샤먼교 주술사들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하프엘프에게 붙잡혀 묶인 채로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츠는 천제현을 발견하고 바로 소리쳤다.
“성주님, 말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천제현은 하프엘프들에게 놓아주라는 손짓을 했다.
하프엘프는 바로 명령에 따르지 않고, 클라크의 의견을 들으러 갔다.
클라크도 별 방도가 없다. 하프엘프가 쉽게 승리를 거머쥔 것도 다 천제현 덕분이다. 그러니 그저 손만 내저을 뿐이었다.
“놔줘라.”
천제현은 해독약을 루츠에게 건넸다.
“올바른 선택을 했군. 의미 없는 전투를 끝낼 때가 온 것이야. 너도 샤먼신도들이 이 소란 속에서 다 죽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루츠는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로 샤먼교 주술사들의 손실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만약 샤먼교 신도들이 모두 죽는다면, 누가 샤먼교를 계승한단 말인가.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다. 처절하게 패배한 샤먼교에게 판을 뒤집을 기회는 없다.
그린캐슬은 숲의 도시다. 도시는 부락과 달리 상대적으로 개방된 곳이다. 다양한 종족들 간에 자유로운 무역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숲의 임시마을과 유사하지만 도시는 더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진다. 경영자격을 취득하거나 도시에서 허가한 모험가만이 들어올 수 있다.
지난 오백 년 동안 하프엘프가 그린캐슬을 지배하면서 많은 종족과 세력, 거상(巨商)들이 거주 자격, 개업 자격, 출입 자격을 얻게 되었다.
숲의 도시는 주로 교역과 거주왕래 방면에서 세금을 거두어 수익을 창출해왔는데, 그린캐슬은 외부 유입자 비율이 꽤 높았다. 그래서 도시 전체를 뒤흔든 이번 소란이 금방 퍼져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술집에서는 상인들, 모험가들, 하프엘프들이 모두 이번 사건의 전말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빴다
“어이, 여보게들, 그거 알아?”
중간 상인인 한 땅의 엘프가 과장되게 말을 했다.
“어제 그린캐슬에서 큰 전쟁이 날 뻔 했다는구먼!”
또 다른 숲의 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그러게, 그놈의 그린캐슬은 안전하질 못해. 앞으로 장사를 할 수 나 있을까? 주변 숲속 부족들이 모두 폭동을 일으켰다던데. 이제 그린캐슬도 안 되겠어, 하루빨리 장사 접고 떠나는 게 나을 거 같아.”
“안심하시오.”
술집에 있던 그 지역 하프엘프가 해명에 나섰다. 이 거상들은 그린캐슬의 주요 수입원이다. 만약 이들이 그린캐슬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하프엘프들은 큰 손해를 입는다.
“위기는 그 샤먼교 놈들이 만든 거요. 이제 샤먼교가 아주 박살났다고 하니 앞으로 어떤 위협도 없을 거요.”
또 다른 하프엘프가 나서서 덧붙였다.
“그린캐슬은 숲속 각 부족들의 기근을 위해서, 남아 있는 위험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창고 안의 식량을 개방해서 숲속 부족들에게 나눠주고 있소. 그린캐슬의 물자 손실이 적지 않지만, 이번 일 이후로 숲속 주변 부족들은 더욱 하나로 똘똘 뭉치게 됐소. 그러니 앞으로 외부에서 적이 침입해도 힘을 합쳐 적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요!”
숲속 상인들은 다들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린캐슬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까. 이번은 어찌어찌 넘어갔다지만, 다음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이때, 내막을 잘 아는 모험가가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이번 그린캐슬이 심각한 손실이 없었던 건 어떤 신비로운 인간족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린캐슬은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을 거라고 하더군.”
“정말인가, 대체 어디서 온 인간이란 말인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면 왜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거야!”
한 하프엘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린제사장이신데, 그 인간을 본 적이 있다고 하오. 이름이 뭐라더라…… 천제현? 어쨌든 스무 살도 안 된 인간이라고 했소.”
숲속 부족들에게는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숲에서 활동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 보니 그린캐슬을 대신해 난리를 평정한 천제현이란 인물에 대해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이때, 한 모험가가 술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린캐슬 하프엘프가 방금 공포한 공고를 손에 든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외쳤다.
“제기랄, 큰일 났네. 이것 좀 보게!”
“한센이 왜 저렇게 난리야?”
“설마 또 전쟁이라도 난 거야?”
술집에 있던 상인들이며 관광객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일어나 모험가의 손에 있는 공고를 빼들었다. 공고 내용을 확인한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한 사람이 다급하게 물었다.
“난 엘프 문자를 모른다구! 어서 읽어줘!”
“최신 소식이야!”
“그 인간의 진짜 신분이 밝혀졌어. 바로 영원의 숲 엘프왕이 직접 보낸 그린캐슬 성주라는군!”
“이런 얼어 죽을!”
“진짜야?”
“엘프왕이 노망난 거 아냐!”
사람들은 모두 욕을 퍼부어댔다. 그린캐슬의 위태로운 상황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영원의 숲에서 그린캐슬을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원의 숲이 그린캐슬을 관리하게 되면, 엘프족의 강력한 군사력 덕에 그린캐슬은 다시 흥성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엘프왕이 그린캐슬을 인간에게 줘 버리다니.
“장난하나? 엘프족이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온 인간 한 명 따위가 어떻게 상황을 안정시킨단 말이야!”
“또, 또 있어!”
“그린캐슬의 성주 권한대행인 클라크님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린교 제사장들이 논의한 끝에 인간인 천제현에게 성주 권한대행을 맡겼다는군!”
“이 명령은 공포 즉시 발효되고, 천제현은 이미 성 안에 들어가 하프엘프 도시의 모든 업무를 인수인계받기 시작했대!”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자리에 있던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농담하는 건가?”
“영원의 숲이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하프엘프들도 따라서 난장판을 벌이는 거야?”
“그런 소리가 있더군. 이 인간은 혼돈의 숲 주변 작은 세력의 수령이었대. 한 마디로 겨우 작은 상회의 상인이었다는 거야. 그런데 혼자 그린캐슬로 와서 성주가 됐다지 뭐야.”
“허, 애송이 놈이 뭘 믿고 그린캐슬 성주가 된다는 거야!”
“제기랄, 하프엘프가 못하겠으면 차라리 날 시키라고!”
“그린캐슬은 이제 끝인 건가?”
이번에는 상인들이나 모험가 같은 외부인들만이 아니라, 하프엘프족 사이에서도 파문이 일어났다.
‘클라크님이 어째서 인간에게 성주 권한대행을 넘겼지? 정말 말도 안 된다!’
***
약 30분 전.
천제현은 이제 막 성주 권한대행으로 임명됐다.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기면서 숲 부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하프엘프와 샤먼교 사이의 갈등이 깊기 때문에 루츠가 이끄는 그린 샤먼교는 내부적으로 하프엘프의 신뢰를 받을 수 없었고, 외부적으로는 황야고원 쪽의 보복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천제현을 성주로 추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샤먼교가 그린캐슬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잠시 몸을 의탁하며 앞으로 발전할 여지를 남길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 아르놀트는 천제현 편이고, 델로리스가 있는 요괴신교도 있다. 천제현 수중에 많은 패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클라크는 성주 권한대행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