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7
제487장 드루이드교
하프엘프는 매우 박학다식했다. 하프엘프 제사장이 인간 세상에 나가게 된다면 최소 대학자나 국사의 작호를 받을 것이다. 적어도 이 숲에서 하프엘프보다 더 학식 있는 세력은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박학다식한 하프엘프조차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현자라는 칭호를 받은 학자만이 풀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식물과 생명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현자여야 한다.
이렇게 젊은 인간이 그런 현자일 리가 있겠는가?
하프엘프들은 모두 얼토당토않다는 눈빛이었다.
천제현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죽음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만성 저주에 걸렸네요. 리치가 벌인 일인 것 같아요. 그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죠.”
델로리스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치료할 방법이 있나요?”
“있죠. 그렇지만 일반적인 방법을 쓰면 힘을 너무 많이 소모하게 돼요. 이 생명체는 너무 심하게 저주에 걸려서 단시일 내에 회복되기 어려워요. 그렇게 되면 이번 전투에 사용할 수 없지요.”
천제현이 몇 분을 망설이다 작은 병을 꺼냈다. 병에는 검붉은 액체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병을 델로리스에게 건넸다.
“이걸 생명의 샘물에 붓고 그 물을 저들에게 뿌려주세요.”
하프엘프들은 모두 경악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델로리스는 천제현이 시킨 대로 하려다가 수염이 허연 하프엘프 몇 명에게 저지당했다. 하프엘프들은 극도로 경계하는 눈빛으로 여우족 여자와 인간을 쳐다봤다. 하나는 이교도이고 하나는 교활한 인간이다. 이들이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클라크가 가볍게 헛기침했다.
“저들이 하자는 대로 해보세. 달리 뾰족한 수도 없잖나.”
델로리스는 하프엘프들을 매섭게 쏘아본 후 병 속의 액체를 생명의 샘물에 부었다. 순식간에 온 샘물이 검붉은색으로 변하면서 기이한 힘이 생겨났다. 델로리스는 샘물에 가득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샘물을 바라봤다.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뿌려주세요.”
델로리스가 곧바로 다 죽어가는 그린수호자의 몸에 샘물을 뿌렸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붉은색 물방울이 닿는 순간 그린수호자들이 쓰으쓰으 하고 소리를 냈다. 샘물이 스치자마자 잿빛 몸체에 다시 생기가 돌면서 말라가던 나뭇잎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하프엘프들은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나 천제현은 속이 쓰린 얼굴이었다. 신혈은 어떤 저주라도 풀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의 샘물과 섞어서 사용하여 그린수호자를 되살릴 수 있었다. 문제는 천제현에게 신혈이 얼마 없다는 것이다. 신혈강시를 만들 수 있는 신혈을 이런 곳에 사용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얼마 후면 그린수호자들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이 정도 전력이면 후방을 견고히 지키기에 충분했다.
생명의 샘물을 뿌리자 그린수호자는 빠르게 생기를 되찾았다. 나뭇잎은 이전보다 훨씬 더 파래졌다. 그린수호자는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생명의 샘 하나면 그린수호자 4~5백 그루를 되살릴 수 있다. 하프엘프가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문제를 천제현은 단숨에 해결해냈다.
짙푸른 나뭇잎은 이전보다 더욱 생기 넘쳤다. 모든 나뭇잎에 육안으로 분별할 수 없는 미세한 주름 혹은 진법 같은 것이 핏줄처럼 퍼졌다. 이로 인해 그린수호자는 독특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들은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그린교 제사장들이 서둘러 그린수호자들을 점검했다.
“숲의 신이시여!”
“그린수호자들의 생명력이 두 배로 뛰었습니다!”
“그린수호자들의 재생력과 회복력, 힘이 전부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저주와 힘으로 다 죽어가던 생명체는 특수한 힘의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모든 게 월등히 좋아졌다.
그린수호자는 최대 천 년까지 사용할 수 있다지만, 하프엘프들은 지금 이들의 수명을 가늠 할 수 없었다.
“믿을 수가 없군!”
클라크가 천제현을 바라봤다.
“그린교 제사장이 백 년 전 그린수호자를 강화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이들의 힘을 끌어올릴 방도를 전혀 찾지 못했네. 그런데 그대가 이 작은 병 하나로 해냈군. 병에 든 게 뭔지 말해 줄 수 있는가? 이걸 모으면 그린캐슬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질 것이네!”
“물론 알려드릴 수 있죠. 허나 여러분의 실력으로는 모으기 힘들 겁니다.”
천제현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건 고대신이 죽기 전에 응결시킨 정혈입니다. 고대신의 피는 모든 저주를 풀 수 있죠. 그래서 이 합성생명체가 빠르게 회복된 것입니다.”
하프엘프와 델로리스는 모두 뛸 듯이 놀랐다.
‘방금 뭐라고……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천제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했다.
“그린수호자는 고대 전쟁수 조직을 배양시켜 만든 생명체라서 고대 신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신혈을 빠르게 흡수해서 생기를 되찾은 겁니다. 이 그린수호자들은 앞으로 더욱 강해지고 어떤 저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신혈은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거잖아!.’
‘저 인간족이 어떻게 그런 물건까지 가지고 있지?’
‘게다가 그렇게 귀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평범한 그린수호자에게 사용하다니?’
델로리스의 눈이 곧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신물도 가지고 있었어요?”
“별거 아니에요.”
천제현은 속이 무척 쓰렸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에게는 인심을 쓰려면 통 크게 써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기왕 인심을 쓰기로 했으니 제대로 써야 한다. 천제현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어요. 완치된 그린수호자를 사령 신전 근처에 배치하세요. 얘들도 햇볕 좀 쬐어야죠!”
물론 단순히 볕이나 쬐자고 저주에 걸렸다가 회복된 그린수호자를 사령 신전 앞에 배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면 사령술사들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다.
첫째, 사령술사들은 자신들의 저주에 걸려 오염된 그린수호자들이 정화된 것에 깜짝 놀랄 것이다.
둘째, 사령술사가 간계를 부려 그린수호자들을 해쳤다는 사실을 그린캐슬에서 이미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셋째, 이 그린수호자들은 사령 신전 전체를 박살낼 수 있다. 신전 안에 있는 수십 명의 사령술사는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이 사실은 사령술사들을 심리적으로 크게 압박할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인질이기도 하다. 이들이 잡혀 있으니 사령교가 외부에서 몰래 키우는 부대는 경거망동할 수 없게 된다.
이 조치로 사령술사들은 우왕좌왕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천제현은 최대한 빠르게 혼란을 잠재우고자 했다. 사령술사들은 대책을 세울 틈도 없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충분해요.”
천제현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참에 마지막으로 남은 골치 아픈 문제까지 처리해 버리죠. 드루이드교를 만나야겠어요.”
클라크는 천제현의 생각이 이렇게 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드루이드교 신도들은 자네의 체면을 안 봐줄 걸세. 놈들은 난폭한 광신도들이거든.”
“하하하, 그거야 만나보면 알겠죠.”
그린캐슬은 매우 컸다.
정확히 말해 그린캐슬은 산간 지역이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비행 마수를 타고 반나절은 가야 한다. 그린캐슬 하나의 면적은 남하 왕성의 대여섯 배를 족히 넘었다. 남하 왕성의 인구는 7~8백만이지만 그린캐슬 인구는 겨우 백여만 명이다. 게다가 그린캐슬은 입체적인 구조라 거주지역과 성이 대부분 산허리나 꼭대기에 위치했다. 평지에 펼쳐진 인간족의 도시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 까닭에 그린캐슬은 자연의 일부분처럼 보였다.
마치 성벽처럼 성을 감싸고 있는 산맥까지 포함한다면 그린캐슬 규모는 남하 왕성의 2백 배 이상으로 남하국 절반에 달한다.
고작 성 하나의 규모가 이 정도이다.
그린캐슬에는 끝없이 이어진 원시 산맥과 광활한 호수, 야생 마수가 가득했다. 구석진 곳에는 미지의 희귀한 선약이 숨겨져 있었다. 이 특별한 성은 여러 다양한 생명체들과 변화무쌍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은 그린캐슬 동남부로, 온 지역이 고요하고 울창한 우림으로 덮여 있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주위를 에워쌌다. 봉우리마다 온통 녹색식물로 가득했다. 봉우리들은 진법을 펼친 것처럼 모종의 규칙에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우림의 깊은 곳에 이끼로 뒤덮인 신전이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드루이드교의 신전이다. 드루이드교는 다른 세력에 절대 예속되지 않는 숲의 자유로운 세력 중 하나이다. 드루이드교 신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엘프와 마수령 혼돈의 숲 밖의 일부 지역, 심지어 인간족 중에도 드루이드교 신도가 있었다.
천제현이 델로리스와 클라크를 대동하고 우림을 질러 신전으로 다가갔다.
“으르렁!”
주변의 울창한 나무 꼭대기에서 경고의 포효가 울렸다. 몸집이 매우 거대한 늑대가 녹색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늑대는 3급 마수인 유영랑이었다. 유영랑은 아무 기척도 없이 사냥감을 죽일 수 있는 숲의 무시무시한 살수였다.
유영랑은 천제현 일행을 공격하지 않았다. 맑고 영리한 눈빛으로 천제현 일행을 바라보던 유영랑의 입에서 인간의 말이 흘러나왔다.
“드루이드교는 외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유영랑이 경고하는 틈에 여러 신도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이들은 모두 거대 원숭이나 불곰, 지룡 등 야생 마수의 형태로 몸을 바꾼 채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두 머리가 비상한 마수라는 점이다. 영민한 머리에 드루이드교 능력까지 더해져 이들의 전투력은 평범한 야생 마수보다 훨씬 강했다.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드루이드교 신도들은 침입자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델로리스와 클라크는 신경을 바싹 곤두세웠다. 주위는 온통 팽팽한 살기로 가득했다. 드루이드교는 야성 넘치고 거친 세력으로 자연을 숭상하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이들은 모든 일을 자신들의 법칙에 따라 처리했다. 이들은 그린캐슬의 규칙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성주 권한대행인 클라크를 알아본다고 해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게 뻔했다.
드루이드교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응집력이 낮고 폐쇄적이긴 하지만 이들의 전투력은 샤먼 주술사와 사령술사보다 높았다.
천제현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요더 선지자를 만나러 왔다.”
유영랑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영랑의 몸은 빛을 내뿜으며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착지했을 때 유영랑은 용맹한 늑대족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천제현을 향해 낮게 포효하자 무시무시한 살기가 솟구쳤다.
델로리스와 클라크가 경계 태세를 취했다.
천제현은 송곳니가 길게 난 늑대족 신도 앞에서도 여전히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신전 안에서 자신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한 손님이 신전을 찾아오셨군. 안으로 모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