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
제486장 그린수호자
“너희를 없앨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아. 백번 양보해서 내가 너희를 없애지 못한다고 쳐. 그렇다고 황야고원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꼭두각시가 될 셈이야? 내 말은 여기까지야. 이제 네가 알아서 판단해!”
천제현이 손짓하자 클라크가 결박을 풀어주었다. 천제현은 루츠를 쳐다보지도 않고 클라크와 델로리스를 데리고 사라졌다.
“빌어먹을!”
루츠는 불과 몇 분 만에 약이 온몸으로 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오묘하면서 강력한 독약을 본 적이 없었다.
인간족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혼돈의 숲에서 이 독약을 해독할 자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약의 잠복기는 사흘 밖에 안 된다. 즉 사흘 안에 선택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망할! 잠시 방심한 틈에 이 꼴이 되다니! 그 인간족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자는 샤먼교 따위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루츠가 샤먼 신전으로 돌아왔다. 대제사장 마르스가 그를 쳐다봤다.
“제대로 처리했느냐?”
고개를 숙인 루츠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루츠도 자신이 왜 이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젊은 인간족과 마주쳤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몸에 잠복해 있는 독약 때문이 아니라 그 인간족의 실력 때문이었다.
그가 주술을 깼다.
하프엘프 다섯은 분명 브레인버그에게 잠식당한 상태였다. 하프엘프의 머릿속에 여전히 벌레가 있었지만 샤먼 주술사들은 그들을 조종할 수 없었다. 그 점이 루츠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벌레에 걸린 샤먼 주술사들의 저주를 풀 길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샤먼 주술사들은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루츠는 그 주술이 풀린 것을 봤다. 그자는 벌레에 걸린 주술을 깼을 뿐만 아니라 샤먼교의 모든 계획을 꿰뚫어봤다.
또한 하프엘프 클라크는 이미 대비책을 세운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샤먼교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다 이긴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이번 전투의 승산은 반 이하로 떨어졌다.
루츠의 조상은 이곳 그린캐슬에 터를 잡았다. 그의 아버지 대부터 시작된 그린캐슬 샤먼교는 원래 황야고원과 관계가 깊지 않았다. 황야고원에서 대제사장 마르스를 보내지 않았다면 두 지역은 원조와 분파로 각기 다른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족은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스는 샤먼교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제사장은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린캐슬 샤먼교 주술사의 대다수는 현지 출신이었다. 주술사들은 마르스를 두려워하기보다는 황야고원에 은거하고 있는 거물을 두려워했다.
황야고원의 노여움을 사면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린캐슬 샤먼교는 단숨에 박살 날 것이다. 이 거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린캐슬 샤먼교는 마르스의 지배를 받으며 황야고원의 교두보가 된 것이다. 계획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샤먼 주술사는 계속 하프엘프를 잠식하여 결국 그린캐슬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프엘프가 갑자기 영원의 숲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황야고원은 몹시 노여워했다. 그린캐슬이 영원의 숲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야고원은 그린캐슬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린캐슬 샤먼교의 뿌리는 바로 그린캐슬에 있다. 그린캐슬이 사라진다면 그린캐슬 샤먼교 역시 커다란 영향을 받을 것이다. 게다가 하프엘프의 세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이들이 결사적으로 싸운다면 샤먼교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린캐슬은 영원의 숲에 귀속되었다. 엘프족은 그린캐슬 샤먼교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루츠는 은연중에 자신들이 숲의 거물 간의 힘겨루기에 쓰이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은 영원의 숲이 지닌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는 존재였다.
루츠는 한참 동안 고심한 끝에 결정을 내리고 주변의 주술사에게 말했다.
“카로라 제사장과 힐튼 제사장을 데려오너라. 의논할 일이 있다.”
카로라 제사장과 힐튼 제사장은 루츠의 심복이자 그린캐슬 샤먼교의 주요 지도자이다. 이 일은 반드시 그들과 논의해야만 했다.
천제현이 루츠를 놓아주자 클라크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루츠를 이렇게 풀어줘도 되겠소? 놈이 쉽게 말을 듣지 않을 텐데. 어렵사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는데 마르스가 눈치채면 그린캐슬은 다시 불리해지네.”
클라크는 이 젊은 인간을 완전히 다시 보게 되었다.
천제현은 그린캐슬에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각 세력의 현황과 구성원 정보를 파악하고, 이토록 대담하고 급진적인 계획을 짠 것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린캐슬은 다시 불리해진다. 샤먼 주술사들이 알아차린다면 하프엘프의 군사배치와 행동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뭐야, 이 노인네가 날 못 믿는 거야?’
천제현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델로리스에게 물었다.
“당신도 절 못 믿나요?”
“믿습니다. 성주님은 샤먼교의 주술을 깨뜨렸죠. 루츠는 큰 충격을 받고 샤먼교의 주술에 회의를 품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성주님이 먹인 독약에는 그의 목숨이 달려 있죠. 이 세상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요.”
델로리스는 천제현의 뜻을 다 알아차린 듯했다.
“중요한 것은 성주님이 샤먼교의 내부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점이죠. 마르스는 황야고원을, 루츠는 그린캐슬 샤먼교를 대표하죠. 보통 때라면 둘의 이해관계는 충돌하지 않아요. 그러나 지금은 비상시기라서 이 점을 크게 이용할 수 있죠. 그러니 이 계획은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요.”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성주에 부임하게 되면 제 참모를 맡아주세요.”
델로리스가 기뻐하며 요염하게 감사를 표했다. 옆에 있는 클라크는 몹시 무안했다. 그는 천제현이 성주 자리를 떼 놓은 당상이라고 여기는 게 못마땅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천제현은 인간족일 뿐이다. 하프엘프가 그를 인정할 리 없다.
“이제 뭘 해야 하죠?”
“샤먼교를 처리했으니 이제 다른 세력이 이 기회를 틈타 어부지리를 얻지 못하게 해야죠. 샤먼교 다음으로 사령교와 드루이드교가 그린캐슬의 가장 골치 아픈 세력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렇소,”
클라크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눈앞의 천제현이 못마땅했지만 그린캐슬의 존망이 걸린 문제니 마음 내키는 대로 굴 수 없었다.
“사령교의 창시자는 용의 고개에서 온 세거스터라는 자인데 이 리치는 행동이 괴상하고 매우 신비스럽지.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데다 수하 제사장들조차도 행적이 기이해서 샤먼교와 마찬가지로 사령교 놈들의 행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네. 속수무책이라고 할 수 있지.”
“드루이드교는요?”
“드루이드교는 샤먼이나 사령교와는 또 다르지. 드루이드교의 세력은 밀집되어 있지는 않지만 혼돈의 숲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그린캐슬 주위에 모여 있는 드루이드교는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거칠고 난폭하며 반항적이지. 그린캐슬의 규율은 안중에도 없이 오랫동안 제멋대로 굴었네. 참으로 골치 아픈 세력이야.”
“그렇군요.”
순순히 대답을
‘하프엘프족은 정말 무능력하군. 외부세력이 멀쩡한 도시를 엉망진창으로 망치게 두다니. 이러니 영원의 숲에 도움을 요청하지.’
델로리스가 물었다.
“이번에 우리의 주적은 샤먼교잖아요. 사령교와 드루이드교에서 말썽을 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이들에게까지 손을 쓰려면 힘이 분산돼서 불리할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에요.”
천제현 역시 단숨에 모든 문제를 해치울 생각은 아니었다. 현재 그린캐슬의 힘으로 세 세력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다. 천제현이 클라크에게 물었다.
“그린캐슬의 그린수호자는 몇이나 남아 있죠?”
“다 합해서 3천이 좀 넘소. 2천은 괴질이 돌아 몸이 약해졌고 나머지는 길과 관문을 지키고 있어서 동원하기 힘들 거요.”
“괴질이 돌다니요?”
천제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한 번 봐야겠군요.”
클라크가 천제현을 그린캐슬의 한 야외 신전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은 그린수호자를 기르는 곳 중 하나이다. 그린수호자로 자랄 묘목 수백 그루가 그린교 제단에서 자라고 있었다.
묘목 이외에 거대한 그린수호자 수백 그루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모두 완전체이나 더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린수호자는 매우 강력한 합성생명체이다. 하프엘프가 고대 전쟁수의 조직을 채취하여 실험실에서 배양시키고 그린교 제사장의 술법에 의해 움직인다. 그린수호자는 하프엘프족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였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린수호자는 천 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2~3백 년 전 그린캐슬이 전성기를 누릴 때 그린수호자는 2만이 넘었다. 그린캐슬 전체에 대형 결계를 쳐서 외부의 침입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런데 그린수호자가 3천으로 줄어들었다. 이 중 2천은 괴질로 쓰러졌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샤먼교에서 이렇게 겁 없이 덤비겠는가.
신전 가운데에는 생명의 샘물이 있었다. 그건 평범한 생명의 샘물이 아니라 그린교 제사장이 자연의 힘으로 축복하고 정련한 샘물이었다. 한 방울이 평범한 생명의 샘물 한 통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이 샘물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로 상처 회복에 탁월한 효력을 발휘한다.
괴질에 걸린 그린수호자는 이미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다. 마치 다 죽어가는 고목처럼 잎이 누렇게 갈라져 있었다. 하프엘프가 비용을 아끼지 않고 마력 순도가 극히 높은 생명의 샘물을 뿌려주었다. 그러나 말라죽는 속도만 늦출 뿐 전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클라크님, 이곳에 인간족을 데리고 오시다니요!”
“이곳은 우리 부족에게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우리의 기밀이 숨겨져 있는 장소지요. 인간족에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인간족은 어디를 가도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프엘프 제사장들은 모두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천제현은 이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신식을 사용해 그린수호자 체내를 살펴보았다. 그린수호자의 체내에 알 수 없는 이상한 힘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이 힘이 봉인처럼 그린수호자의 생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클라크가 하프엘프들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아무 희망도 없는데 저자에게 맡겨본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