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484화 (484/729)

# 484

제484장 배후세력

델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기근도 물론 이상했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찾을 수 없다는 게 더 이상했다.

“과거에 마수들이 집단 이주하거나 흉수가 국경을 건넜을 때, 또는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지질 변화가 일어났을 때만 서식지의 마수들이 바뀌었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징조도 없이 변화가 나타난 거죠.”

이 문제는 클라크 역시 의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술사가 제단을 세워 주술을 통해 마수집단에 관여하면, 이런 변화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론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다만 확실한 증거가 없고,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른다는 게 문제죠. 지금 다른 부족들에게 알려준다고 해도 저희를 믿지 않을 거고요.”

‘어쩐지 부족들의 반응이 빠르다 했더니, 샤먼교가 저들을 도와주고 있었구나!’

그들이 기회를 바로 포착한 것으로 보아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해온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천제현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으니 이 얼마나 재수 없는 일인가.

어쨌든 샤먼교는 그린캐슬 주변 지역에 최소 수십 만 명의 신도를 둘 만큼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토착부족을 선동하여 그린캐슬을 습격하도록 부추기고 있으니, 일단 부족들이 공격을 개시하면 샤먼교도 신도들을 동원해 진격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린교를 함락하지 못하더라도 큰 타격을 줄 수는 있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샤먼교의 이런 주술이오.”

클라크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듯 했다.

“우리 사신이 언제 이런 독충에게 당했는지 알 길이 없소. 최근의 일일 수도 있고, 훨씬 오래전일 수도 있소. 주술사가 하프엘프족 한 명을 조종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동족도 조종할 수 있을 게 아니겠소.”

“그렇겠지요.”

천제현은 샤먼교의 법술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독충은 숙주를 직접 죽일 수 없어요. 다만 숙주의 뇌에 침투한 후 뇌 신경과 바로 연결하여 감정과 사고방식을 통제하는데, 숙주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조종당하게 되죠. 숙주는 평소와 똑같이 생활하므로 최측근조차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어요.”

이런 독충에 조종당하는 사람은 시한폭탄과도 같다. 주술사 제사장은 주술을 통해 독충을 움직이고, 숙주는 순식간에 자주적인 사고 능력을 잃고 주술사의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가끔 주술사가 숙주의 사고를 완전히 조종하는 것이 아닌 주술을 이용해 그의 생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경우도 있죠.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은 일종의 정신 마력이므로, 물리적 수단을 통해서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델로리스와 클라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샤먼교 주술사의 신비하고 악독한 주술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외지인은 주술사와 수십 년 간 내왕한 현지인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생각을 조종하는 주술은 분명 샤먼교의 기밀일 텐데, 그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어쩐지……, 샤먼교가 지금처럼 주변 부족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린캐슬 안에 샤먼교 신전을 몇 채나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성장한 이유가 있었군.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거겠지.’

토착연합군 수십만 명, 지난 몇 년간 불어난 신도도 수십만 명이다.

그밖에 진령급 수준의 주술사가 100명이 넘었다. 이들은 샤먼교의 핵심 전투력이었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조종해온 그린캐슬의 꼭두각시까지 있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세력이란 말인가.

토착연합군이 형성되기까지 고작 3~4일이 걸렸다. 지금은 10만 명 이상이 모인 상태이며, 이 규모는 계속 불어나 곧 수십만 명에 달할 것이다. 이 토착부족 대부분은 강인한 본능으로 들끓어 오른 상태라 이토록 악착스레 열의를 보이는 것이다. 샤먼교가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토착민들이 성을 공격하면 샤먼교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 역시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여기에 그린캐슬 내부 세력이 합세한다면, 하프엘프족은 어떻게 이 사태에 대응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샤먼교 마수령이 그린캐슬의 하프엘프족과 싸운다면, 사령교단의 술사들이 이를 수수방관하겠는가? 드루이드 역시 변수가 될 터였다.

천제현은 모든 이해관계를 일일이 설명했다.

“과연 불 보듯 뻔한 일이군.”

클라크는 천제현의 통찰력에 놀라워하면서도, 이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 큰일을 소홀하게 지나친 것이 부끄러워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린캐슬의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군.”

하프엘프족은 학문에는 정통했으나 외교와 교섭에는 문외한이었다. 군사와 책략에는 더더욱 서툴렀다. 그는 일을 해결하려고 할수록 꼬이기만 하니, 어떤 방법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이번 사태가 이 지경까지 악화될 줄 클라크를 비롯하여 누가 알았겠는가.

클라크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자문을 구했다.

“그렇다면 선생은 하프엘프족의 수많은 사람이 이미 주술사의 꼭두각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이 독충을 만들려면, 주술사의 마력과 기혈을 소모해야 합니다. 만들기 어려운 만큼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니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제현은 잠깐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

“제 지시대로 움직여 주세요. 하프엘프족은 그린캐슬을 안정시키는 일에만 주력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 사태를 정말 진정시킬 수 있단 말인가?”

클라크의 자신감은 이미 바닥을 쳤다. 지금 그에게는 그린캐슬의 성주가 될지도 모를 이 외지인을 믿어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

저녁 무렵이 되자 토착부족 15만 명이 숲에 운집했다. 다들 사기가 높았고 살기등등했다. 토착민들의 가입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세력을 빌려 그린캐슬을 약탈하려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연합군 회의가 시작되었다. 식인마, 호랑이족, 표범족, 도마뱀족, 뱀족 등 각 부족의 족장과 고위층 인사가 모두 참석했다. 체격도 모습도 제각각인 토착부족의 수령들은 모두 분기탱천해 있었다.

“그린캐슬이 너무 오만방자한 것 아닙니까!”

“우릴 멸족시켜 노예로 삼겠다지 뭡니까?”

“저 하프엘프족들은 죽기 직전까지 모를 겁니다. 아직도 지금이 100년 전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우리 쪽도 곧 있으면 수십 만 명이 모일 겁니다. 거기다 샤먼교가 주술을 이용해 도와준다면, 우리의 전투력은 2배 이상 높아져 강한 척 허세나 부리는 저 하프엘프족들을 손쉽게 짓밟아 버릴 수 있을 겁니다!”

연합군 전체가 기이한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하나같이 그린캐슬을 공격해 잿더미로 만들고 모든 재산과 식량을 뺏어올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양족의 주술사 제사장 몇 명이 구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고, 입가에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르놀트 족장이 미노타우로스 정예군 5천 명을 이끌고 연합에 가입했습니다!”

토착부족들은 순간 흠칫했다. 미노타우로스는 막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식인마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전방 돌격에 능해 이 5천 명에 달하는 미노타우로스가 집단으로 돌격한다면, 가뜩이나 취약한 하프엘프족 방위선을 손쉽게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아르놀트는 미노타우로스의 족장으로 직접 이 집단행동에 가담한 것이다. 그는 우둔하고 멍청했으며 솔직하고 열정적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전형적인 미노타우로스였다. 미노타우로스는 성격상 교활한 계책을 생각해낼 수 없었으나, 아르놀트가 직접 왔다는 것은 미노타우로스 역시 그린캐슬에서 한몫 잡으려는 심산인 게 분명했다.

부족 족장들과 주술사들이 아르놀트를 접견했다. 이 가운데 한 부족의 족장이 말했다.

“아르놀트, 미노타우로스 5천 만 데려왔는데, 너무 적은 게 아니오? 미노타우로스 골짜기에는 수십 만 명의 미노타우로스가 있지 않소?”

다른 부족의 족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번에는 일한 만큼 분배할 거요. 힘을 더 많이 쏟은 쪽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갈 수 있는 거지. 그러니 미노타우로스 5천 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거요.”

“미노타우로스는 군사만 지원한 게 아니오!”

아르놀트가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네한테 가장 부족한 게 군사는 아니지 않소. 그래서 미노타우로스 부족이 당신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걸 가져왔소이다.”

“우리한테 뭐가 부족하단 거요?”

“식량!”

“뭐라?”

각 부족의 족장들이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식량을 가져왔다는 거요?”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는 아르놀트가 길을 터 뒤에 있던 미노타우로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모든 족장의 이목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무장한 미노타우로스 수천 명이 커다란 통조림을 가져와 토착부족 병사들에게 한 통씩 나누어 주었다.

연합군 영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족장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게 대체…….”

아르놀트가 히죽대며 말했다.

“얼마 전 우리 마을에 어떤 인간 상인이 찾아왔소. 이 식량은 모두 그에게서 사 온 것이지. 술, 고기 할 것 없이 모두 그린캐슬만큼이나 풍족하다오!”

“인간 상인?”

“어디서 온 인간 상인이오? 그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식량을 숲으로 가져올 수 있단 말이오?”

토착부족 족장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그들이 내뿜던 살기도 크게 줄어 어떤 사람은 아르놀트에게 그 인간 상인과 연락할 방법을 묻기까지 했다.

“나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오.”

아르놀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필요하다면, 그와 연락을 취하도록 도와주겠소.”

이때 주술사 제사장 몇몇이 서로 눈을 맞추었고,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가운데 주술사 제사장 하나가 주인(呪印)을 쥐고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아악!”

식인마 하나가 갑자기 포효했다.

“그린캐슬을 장악하면 수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는데, 구태여 큰돈을 들여 간사한 인간 상인과 거래할 필요가 있소? 게다가 이 상인이 얼마나 식량을 공급해 줄지도 모르지 않소? 그린캐슬을 공략하면 족히 10년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옳소!”

“그린캐슬을 공격합시다!”

“아르놀트, 이 식량들을 적절한 시기에 잘 가져 왔소. 우리 전사가 배불리 먹으면 그린캐슬을 능히 함락할 수 있을 것이오. 그때에 당신 몫도 톡톡히 챙겨 주겠소!”

아르놀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노타우로스 족장이 주술사 제사장들을 훑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