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
제481장 그린캐슬
그린캐슬의 성주 권한대행이자 하프엘프족인 클라크는 근심걱정에 잠겨 있었다.
하프엘프족은 엘프족과 관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엘프족의 혼혈은 아니다. 하프엘프족은 독립적인 종족으로 고대 엘프족에서 분리되어 나온 엘프족에 가까운 종족이다. 반인반수와 인간의 관계처럼 혈통은 유사하나 아예 다른 두 종족으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하프엘프의 키는 드워프와 비슷했지만, 나머지 특징은 엘프에 더 가까웠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하프엘프는 학문 연구와 진리 탐구를 좋아하고, 신묘한 마력진을 분석하는 데 몰두했다. 엘프족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사랑하고 전쟁을 기피했으나 엘프족처럼 고지식하지는 않았다.
하프엘프족은 숲속 부족 중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하프엘프족이 이 지역에서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 인구는 수백만 명에 달했고, 수십 개에 달하는 부족이 있었다. 그 부족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했으나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린교였다.
하프엘프족의 선대와 후대가 장장 500년 동안 건설한 도시가 바로 그린캐슬이다.
하프엘프족은 실력이 뛰어났으나 숲의 수뇌부들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수뇌부들은 그린캐슬을 무력으로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은 채 조금씩 잠식해 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 새로운 종교의 도입이었다. 용의 고개에서 온 주술사가 사령교를, 황야고원에서 온 마수령이 샤먼교를 들여왔다.
본래 자연을 숭상하고 전쟁을 기피하는 드루이드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연루되어 있었다.
각 종교끼리 수십 년간 암투를 벌이는 동안 절대적인 힘을 휘둘렀던 그린교는 이미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프엘프족이 더는 이 도시를 통치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영원의 숲의 엘프왕이 하프엘프족에게 손을 내밀었다. 먼 친척뻘 되는 이 종족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표한 것이다.
클라크와 하프엘프 장로는 더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동의했다.
하프엘프족이 그린캐슬을 건설한 것은 명리를 쫓기 위함이 아니라 하프엘프족이 쾌적한 환경에서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풍족해질수록 다른 부족들이 군침을 흘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용의 고개, 황야고원과 비교하면, 영원의 숲에 귀화하는 게 하프엘프족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영원의 숲에 사는 엘프족은 하프엘프족의 먼 친척뻘인 데다 천성이 온화하고 선량하여 하프엘프족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엘프왕도 하프엘프족이 이전과 다름없이 그린캐슬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 하프엘프족은 권리와 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도시의 주인이 누가 되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쫓겨나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다.
클라크는 흔쾌히 엘프왕과 계약했고, 영원의 숲은 그린캐슬과 한 가족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이제 하프엘프족은 영원의 숲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프엘프족은 그들을 기다리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영원의 숲이 막강한 엘프군단을 그린캐슬에 주둔하고 명망이 높은 사람을 파견하여 그린캐슬의 성주로 삼으면, 샤먼교단과 사령교단이 더는 날뛰지 못할 것이다. 저들의 배후에 용의 고개나 황야고원이 있다고 해도 영원의 숲이 이미 그린캐슬의 주권을 차지했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러나 수일이 지나도 영원의 숲에서 기별이 없었다.
그러고는 얼마 있다 밀서 한 통이 클라크에게 도착했다. 클라크는 엘프왕이 직접 쓴 밀서를 보자마자 펄쩍 뛰었고, 그 바람에 하마터면 천장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
그린캐슬이 지리적으로 특수한 위치에 있고, 각 세력의 개입이 잦은 지역이라 분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엘프의회에서 부결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 엘프군 파견이 무산되었음을 의미했다.
‘믿었던 엘프왕이 성주만 파견하다니!’
클라크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프엘프족도 그리 약한 것은 아니니, 만약 엘프족이 군대가 아니라 고수 몇 명만 보내 도시를 관할하게만 해도 악한 세력에 위협을 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엘프왕이 파견하려는 성주는 인간이었다.
‘힘도 없고 명망도 없고 게다가 인간이다!’
클라크는 절망한 나머지 현기증마저 일었다.
혼돈의 숲에는 인간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온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 현지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그런 인간을 혼란에 빠진 그린캐슬의 성주로 앉히려 하다니, 놀리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설령 하프엘프족이 이를 따른다고 해도 다른 종족도 그리할까.
클라크가 머리를 싸매고 문제 해결에 고심하고 있을 때, 하프엘프족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클라크 대인, 숲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라?”
최근 숲에서 기근, 전염병 등 각종 재난과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크는 이 모든 것을 악한 세력의 소행으로 치부했으며, 단순히 혼란을 일으키고 영원의 숲에 저항하려는 행동쯤으로 생각했다.
하프엘프족 부관은 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말했다.
“열 개가 넘는 부족이 식량난 때문에 연합을 결성하여 그린캐슬에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클라크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부족들이 그린캐슬에 진격할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린캐슬은 본래 하프엘프족의 도시다. 하프엘프족은 식량을 처리하고 보관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게다가 그린캐슬은 하프엘프의 노력 하에 수년 간 발전을 거듭했으니 식량 창고가 가득 채워져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토착 부족 간에 서로 약탈하는 것은 흔한 일일지라도, 그 누구도 감히 그린캐슬을 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린교가 아무리 쇠퇴했다고는 해도 그들이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연합을 결성하여 그린캐슬을 습격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어쨌든 열 개가 넘는 부족을 합하면 100만 명이 넘고, 부족마다 3~5만 명의 병력만 파견해도 그 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날 수밖에 없다.
그린캐슬을 함락할 수 없더라도 엄청난 타격은 줄 수 있을 규모다. 클라크는 이 사건의 배후에 조종하는 세력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린캐슬이 패배하여 토착부족에게 점령당하면, 영원의 숲도 이 도시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배후 세력 중 최소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다시 말해,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부족을 선동하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천제현의 판단 미스였다.
하지만 계획 자체는 문제가 없으므로 엄연히 말해 판단 미스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모든 부족의 식량 공급로를 끊은 후 그들이 절망에 빠져 기적을 구할 때, 여우족이 곧바로 신비로운 인간 상인이 있다는 정보를 흘리기만 하면 된다.
이 토착민들이 미노타우로스 골짜기에 사는 미노타우로스가 인간 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기근에서 해방되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 직접 미노타우로스 산골짜기로 가서 상황을 알아볼 것이다.
미노타우로스는 가장 우둔한 종족이라 모두들 미노타우로스가 가장 먼저 아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니 다른 부족이 어찌 눈에 불을 켜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신통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상인이 얼마큼 요구하든 그것에 맞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다고 알려 준다. 양질의 식량을 제공하면서 다른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면, 토착부족들은 천제현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을 테니 그의 목적도 저절로 달성된다.
그런데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 천제현이 1단계 계획을 시행한 다음 2단계 계획을 시행하려던 찰나 델로리스가 긴급 정보를 가지고 황급히 달려왔다. 이는 열 개가 넘는 토착부족이 연합하여 그린캐슬 진격을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요.”
델로리스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제 발등을 찍은 것 같아요.”
“아니, 뭔가 잘못 됐어요!”
천제현이 일그러진 얼굴로 몇 분간 골몰한 후 말을 이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아요. 이 부족들은 평소에 서로 왕래도 않고, 게다가 서로를 배척하는 사이인데 어떻게 2~3일 만에 연합을 결성할 수 있습니까?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아요.”
델로리스 역시 그 점이 가장 이상했다.
“그린캐슬의 하프엘프족은 이미 크게 쇠퇴한 상태지만, 그렇다고 이런 평범한 부족들이 감히 도전할 만한 상대는 아니에요. 그래서 이번 일에 배후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고요.”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천제현은 여우족 마을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고, 그동안 그린캐슬에 대해 충분히 숙지한 상태였다. 이 도시를 건립한 자도, 관리하는 자도 하프엘프족이며, 이들은 엘프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진 않았지만, 이 숲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종족이었다.
하프엘프족은 욕구라곤 전혀 없는 나무 엘프족과는 다르게 천성이 진중하고 지적 욕구가 충만했다. 또한 마력진에 대한 조예가 깊고, 약물 및 부적 제조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린캐슬이 수백 년 동안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프엘프족의 생산성이 도시에 부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하프엘프족이 만든 무기 역시 훌륭했다. 여기에 그들이 개발한 부적과 함정, 각종 방어 시설까지 더해지면, 그린캐슬은 난공불락의 성이 될 수도 있었다.
“예상이 맞다면, 이번 일은 그린캐슬 내부의 소행이 분명해요. 이 토착부족만으로는 그린캐슬을 공격할 수 없어요. 안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죠.”
천제현이 델로리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해요?”
델로리스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말했다.
“샤먼교 아니면 사령교겠지요!”
천제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했다.
“우리가 아무래도 그린캐슬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린캐슬에는 왜요?”
“성주 권한대행을 만나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