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478화 (478/729)

# 478

제478장 조건

미노타우로스 골짜기에서는 떠들썩한 연회가 한창이었다. 사방에 술과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천제현은 여우족과 함께 골짜기 한가운데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한쪽에서는 델로리스가 긴 은발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채 구운 고기를 손으로 붙잡고 뜯어먹는 중이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건지.”

한껏 흥이 오른 미노타우로스들을 쳐다보는 델로리스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미노타우로스들의 기쁨이 그녀에게는 재앙이라도 되는 듯했다. 델로리스가 옆에 앉은 천제현을 나무랐다.

“먹을 수 있는 것만 가져다주면 됐지, 이 황소 놈들은 썩은 늑대 고기도 멀쩡히 소화시킬 것들이라고요. 질긴 칼날초도 문제가 안 될 판에 뭐 하러 이런 고급 음식을 가져와요. 괜히 저놈들 좋은 일만 시켜주네.”

말을 마친 델로리스가 다시 손에 든 고기를 거칠게 물어뜯었다.

숲 속 토착세력들은 털도 안 뽑은 생고기를 먹는 일도 다반사일 정도로 식문화가 낙후되어 있었다. 숲 한복판에 사는 이들을 문명사회에 사는 인간들과 비교할 수 없음이야 당연지사. 물론 기적상회의 마력 조리 식품은 인간사회 요리 중에서도 최상품 중의 최상품에 속했다. 윤택한 삶의 질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엘프족 비비안마저도 한 입 먹자마자 그 맛에 홀딱 반한 바 있었으니.

엘프는 고도로 발달된 조리법을 보유한 종족이었다. 마수고기와 약초를 적절히 배합한 엘프 요리는 기가 막힌 맛을 자랑했다. 다만 단약 제조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조리 과정이 복잡하다는 게 단점이었다. 반면 기적상회는 마력진 하나면 끝아니던가.

공서련이 마력통조림을 발명한 이후 기적상회는 이제까지 수십 군데에 달하는 공장을 세웠다. 초기에는 마력 요리사들이 상주하며 수작업으로 생산 라인을 돌리는 구조였으나 지금은 마력진에 마력 기둥을 장착할 수 있게 되면서 공장 전체가 자동화를 이뤘다. 마력 요리사가 직접 불 조절을 하는 게 아니기에 식감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 자사 제품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천제현은 델로리스의 불평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바로 직전에 미노타우로스들에게서 한몫을 단단히 챙겼으니 그런 불평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기근이 장기화하면서 미노타우로스 부족이 쌓아뒀던 진귀한 약재나 재료들은 이미 다 물물교환에 쓰이고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각종 마수핵이며 마법 수정, 피혁 등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서야 돈이 안 되는 물건들이지만 남하국에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미노타우로스들에게서 넘겨받은 3급 마수 피혁은 최상품 가죽 갑옷의 재료로 부족함이 없었고, 마수핵과 마법수정은 실험실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었다. 그밖에도 온갖 약재와 금속, 갖가지 재료가 한가득이었다.

천제현이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가져온 마력 통조림을 다 합치면 하품 마석 3백 개 정도의 가치가 됐다. 남하국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환산하면 금화 3억 냥가량이었다. 내용물 대부분이 최근 한 달 사이 숲에서 사들인 2급 식자재인 탓에 원가가 높아지긴 했다. 미노타우로스들을 만족시키기에 1급 마력 식품은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방금 미노타우로스 부족 창고를 탈탈 털다시피 해서 손에 넣은 물품은 도합 하품 마석 3천 개에 해당하는 양. 남하국 금화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냥이었다.

솔직히 천제현이 들인 수고는 전혀 없었다.

올드만 마을과 기적상회는 각지에서 후한 값에 마수고기를 사들였다. 용병, 사냥꾼, 토착민 부족들은 기적상회를 거의 은인 대하다시피 했다. 마수고기 따위를 비싼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을 줄 몰랐던 그들로서는 짭짤한 부가 수입이 생긴 셈이었다.

이렇게 사들인 식재료는 남하국 공장으로 보내져 가공을 거친 뒤 기근이 든 지역으로 팔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천제현은 순식간에 열 배의 이익을 챙겼다. 게다가 통조림 구매자들 역시 마수고기 공급자들과 마찬가지로 천제현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천제현은 자기 부족을 지옥불구덩이에서 구해 준 천사나 다름없었다.

돈도 벌고 신망도 얻고, 이런 장사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델로리스도 내심 천제현에게 감탄하는 중이었다. 처음의 색안경 따위는 이미 벗어 버린 지 오래였다.

식량을 어떻게 옮겨온 건지 몹시 궁금했지만 천제현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에야 캐묻기도 애매한 일, 궁리 끝에 델로리스가 택한 상대는 새끼 여우였다.

새끼 여우와 비밀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였다. 신 대접을 받으며 한창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새끼 여우는 델로리스가 살짝 구슬리기 무섭게 공간창고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고해바쳤다.

‘공간운송이라니, 신의 기적에 맞먹는 기술이 아닌가!’

대다수 부족이 기근에 시달리는 비상시기, 천제현이 공간창고를 이용해 막대한 부를 손에 쥐게 되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델로리스는 부족민들을 이끌고 천제현의 사업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즈음 미노타우로스 족장 아르놀트는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오늘처럼 즐거워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인간 상인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배고픔이라는 불만 꺼준 게 아니라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일생 꿈도 못 꿨을 미식의 세계까지 열어줬다.

최상품 술에 최상품 고기.

아르놀트는 울컥 서러워질 지경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헛살았구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오늘 이전의 그는 삶의 질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다.

‘인간 세상이 이렇게 좋은 줄 알았다면 애초에 족장 따위 때려치우고 인간족 왕국에 가서 호강이나 하며 살 것을!’

진령 3성급 미노타우로스라면 대국에서든 소국에서든 환영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너무 늦었지만.

그나저나 납득이 안 가는 점이 있었다. 인간 상인이 요구한 물건은 하나같이 미노타우로스 부족에서는 이렇다 할 쓸모도 없는 것들이었다. 마수 뼈와 정혈, 마수핵에 마법수정이며 피혁까지.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팔아봐야 돈이 되는 것들도 아니었다. 사냥 나가서도 귀찮아서 안 들고 오기 일쑤였건만, 그런 물건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부족을 구해 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넉넉하게 쌓아두는 건데!’

순간, 아르놀트는 술기운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아차!’

애초부터 넉넉하지 못했던 부족살림에 그나마 저장해뒀던 물품 상당수를 인간 상인에게 넘기기까지 했다. 대가로 일단 급한 식량은 확보했지만, 그걸로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기근이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족에 또다시 식량난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어찌한단 말인가.

아르놀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 좋은 종족 축에는 못 끼는 미노타우로스였지만 이렇게 빤한 난관조차 내다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하던 아르놀트가 종국에는 천제현 앞에 가서 섰다.

“천제현 님, 부족을 위기에서 구해주신 데 대해 미노타우로스 전체를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천제현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무슨요, 상인으로서 공평한 거래를 한 것뿐입니다. 고맙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아르놀트의 시커먼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어…… 고기가 아주 고급이더군요, 닷새 정도는 충분히 버틸 양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천제현이 짐짓 모르는 척 말했다.

“가격만 서로 맞는다면 식량이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아르놀트가 희뿌연 콧김을 뿜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저장해뒀던 영약은 보름 전에 몽땅 그린캐슬에 가져가 먹을거리로 바꿔 왔습니다. 돈이 안 되는 피혁이나 광석도 이번 거래로 대부분을 소모한지라, 더는 내놓고 싶어도 내놓을 게 없습니다. 혹시 외상은 안 될까요? 한 달 치 식량만 확보해주시면 대금은 반년 안에 두 배로 치르겠습니다!”

천제현이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르놀트 족장, 알다시피 이번 거래는 저한테는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저 많은 식량을 숲 한가운데까지 옮겨오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미노타우로스 부족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밑지는 장사는 절대로 안 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한테 외상까지 요구하는 건 좀 과하지 싶군요. 상인으로서 상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과 위험부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미안하지만…….”

미노타우로스 족장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근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도 모르는 판에 이 인간족 상인에게 신용을 잃는다면 미노타우로스 부족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말마따나 저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을 숲 한복판까지 옮겨온 건 실로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가로 특별히 귀한 영약이나 희귀 자원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천제현이 가져간 건 숲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이 고작이었다. 질 좋은 식량을 이런 헐값에 넘기다니, 그린캐슬에서 하던 거래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남는 게 없겠구나! 이걸 어쩐다, 힘으로 뺏어? 아니지!’

아르놀트는 상대의 정체조차 제대로 몰랐다. 인간의 몸으로 여기까지 와서 장사를 할 정도면 평범한 자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허튼짓을 하면 주변 다른 부족들을 매수해 미노타우로스 마을을 치겠다는 경고까지 받은 터였다. 자칫하면 감당 못 할 상황을 맞는 수가 있었다.

“어떤 조건이든 고려해 볼 테니 이번 위기만 넘기게 도와주십시오!”

“정말입니까?”

아르놀트가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제현 역시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사실 저는 단순한 상인이 아닙니다만, 아직은 시기상 신분을 밝히기가 곤란합니다. 뭐 어쨌든 저와 손잡아서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았겠지요.”

미노타우로스가 눈썹 없는 눈썹을 다시금 잔뜩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충성 서약이라도 하라는 건가? 웃기는 소리, 미노타우로스를 뭐로 보고. 주린 배 좀 채우자고 인간 발바닥이나 핥을 지경까지는 아니란 말이다.’

“아르놀트 족장, 일부 대금은 외상으로 해주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천제현이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고용 형식으로 치르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