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7
제477장 거래
살기등등하던 미노타우로스가 움찔했다.
혼돈의 숲 한복판은 인간이 휘젓고 다닐 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드물게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들은 백발백중 범상치 않은 고수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고작 식량이나 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식량 보따리를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아등바등 온다고? 아니면 숲에서 싸게 사들인 식량을 다시 숲에서 되팔아?’
그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짓이었다.
혼돈의 숲을 가로지르는 건 극히 고단하고도 위험한 행위였다. 대대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온 토착세력조차도 어지간해서는 숲을 통과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와서는 고작 먹을거리나 팔다니. 다른 데도 아닌 피혁, 목재, 광석 등 손만 댔다 하면 대박이 날 온갖 보배가 지천에 깔린 땅에서.
눈을 부릅뜬 미노타우로스가 거친 콧김을 뿜었다.
“누구든 미노타우로스를 농락한 대가는 다진 고깃덩이가 되는 것이다.”
미노타우로스의 흉흉한 기세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천제현이 태연하게 말했다.
“하루, 아니지, 한나절이면 됩니다. 산더미 같은 식량을 미노타우로스 부족까지 친히 배달하죠. 값은 그때 가서 얘기할까요?”
미노타우로스 역시 머리로는 그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뭐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인간은 교활하기로 유명한 종족이었다. 그런데 표정만 봐서는 어째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그 많은 식량을 조달해올 재간이 있단 말인가?’
미노타우로스 마을의 부족원 수는 십만,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은 인구 이백만에 달하는 인간 도시 하나를 먹여 살릴 정도의 양이었다.
“인간을 어떻게 믿으란 거냐.”
“못 믿을 건 또 뭐죠? 여우족을 치려고 해도 어차피 지금 몰려온 숫자로는 부족할 텐데 그냥 돌아가서 한나절 기다려보지 그래요?”
겨우 한나절.
한나절 정도 더 버틴다고 부족민들이 다 죽어 나갈 건 아니었다. 한나절이면 여우족들이 도망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저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나오는데 한 번 기다려볼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미노타우로스 역시 싸움은 원치 않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다 죽게 생겼기에 하는 수 없이 도발을 택한 것뿐.
“좋다, 한 번 믿어보지. 날이 저물기 전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여우족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
미노타우로스의 말에 듣고 있던 여우족들이 분개했다. 하지만 애초에 미노타우로스는 말이 통하는 놈들이 아니었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미노타우로스라면 더욱 그랬다.
화는 날지라도 녀석들과 맞붙고 싶지는 않다는 게 여우족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한 번 눈이 뒤집혔다 하면 실로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종족이었으니까.
천제현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죠!”
우두머리가 수신호를 하자 수천 미노타우로스 무리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델로리스의 아리따운 얼굴이 걱정으로 어두웠다. 대체 뭘 믿고 미노타우로스에게 그런 약속을 한 건지 그녀가 알 리 없었다.
“근처에 동료들이 있어?”
“아뇨.”
“아니면 부근에 따로 도와줄 세력이 있다든지?”
“그것도 아닙니다만.”
천제현은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왔다. 미노타우로스 부족에 줄 몫은 고사하고 자기 먹을 비상식량 한 조각도 없는 처지였다.
여우족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자기 나름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작전이었나?’
그래 봐야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될뿐더러 되레 속았다는 걸 눈치챈 미노타우로스가 열 배는 더 분노해 여우족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대제사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가 볼 때 저 천제현이라는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장차 그린캐슬의 성주가 될 천제현에게 여우족은 중요한 동맹군이다. 이 상황에서 경솔한 짓을 벌일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델로리스는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 아까 그 약속은 뭐 하러 했나? 눈 뒤집히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몰라서 그런가!”
“자, 자, 진정하고.”
여우족들을 쓱 둘러본 천제현이 느긋하게 말했다.
“하나 묻죠, 돈 좀 만져보고 싶습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여우족들이 당황한 사이.
델로리스가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풍만한 가슴이 출렁 흔들렸다.
“때가 어느 때인데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거냐!”
요괴신만 아니었어도 진작 칼을 빼 들었을 델로리스였다.
“델로리스, 앉아라.”
대제사장이 델로리스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성주께서 자신만만한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일단 얘기나 마저 들어보자꾸나.”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전 진짜 상인입니다. 식품 공급책 역할이 가능한 것도 물론이고요.”
‘상인?’
여우족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마주 봤다.
엘프들은 대대로 인간 상인이라면 치를 떨었다. 인간 상인과 마주쳐서 좋은 꼴을 본 엘프가 없는 탓이었다. 이 숲에서 가장 돈 되는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인신매매였고, 여우족과 엘프는 인신매매 업자들이 가장 군침을 흘리는 사냥감이었다.
‘인간 상인이 대체 무슨 수로 엘프왕에게서 성주 임명장을 받아낸 걸까?’
“사실 저 부족들을 구워삶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천제현의 말투가 자못 의미심장했다.
“게다가, 이곳은 돈 벌기에도 딱 좋은 땅인 것 같군요.”
델로리스가 물었다.
“어쩌려고? 미노타우로스는 얕은 수작에 놀아날 놈들이 아니야.”
“수작이요? 미안하지만 저는 말 한 것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긴말이 뭐가 필요할까. 천제현이 조롱박 안에서 재료를 꺼냈다.
“다들 한 걸음 물러나 주시죠.”
미리 준비한 깃발 몇 개를 땅에 꽂은 후 활성화시키자 중앙에 거대한 진법 도안이 나타났다. 잠시 후 공간마력 파동을 일으키는 마력진이 완성되자 천제현이 동력을 공급해 줄 마력 기둥을 설치했다.
“개방!”
낮은 외침.
미리 준비해 둔 깃발로 공간진법을 완성해 공간창고를 여는 건 진령 경지가 아닌 천제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전에 통신기를 사용해 공화련에게 연락을 해둔 덕에 공간창고 안에는 이미 십만 개가 넘는 통조림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그것도 여행용이 아닌 저장용 통조림이.
전자가 여행자, 모험가, 용병들이 휴대하기 편한 작은 크기라면 후자는 허리께까지 오는 높이의 대형 저장용 용기였다. 그 대형 통조림 한 개의 평균 중량은 50근가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우족 마을 중앙에는 공간창고에서 꺼내온 통조림이 쌓여 작은 산을 이뤘다.
여우족들은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 중 천제현이 방금 뭘 한 건지 이해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천제현이 통조림 뚜껑 하나를 열더니 휙 들어서 던졌다. 대형 통조림은 십여 장 거리에 서 있던 여우족들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직접 살펴봐요!”
델로리스의 코끝에 환상적인 음식 냄새가 감돌았다.
“정말 식량이란 말이야?”
통조림 주위로 여우족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용기 안에는 놀랍게도 이미 조리된 만우 고기 덩어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 조각에 열 근은 넘게 나갈 것 같았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살점에서 풍기는 그 먹음직스러운 향기라니. 마치 솥에서 갓 꺼내 따끈따끈한 김이 채 가시지 않은 듯한 자태였다.
델로리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천제현을 쳐다봤다. 사람이 아니라 무슨 괴물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뒤얽히던 놀라움과 기쁨이 종국에는 한마디 질문으로 뭉쳐 터져 나왔다.
“어떻게 한 거예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천제현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질문했다.
“다시 묻죠, 돈 좀 벌어볼 생각 있나요?”
저녁 무렵.
숲 전체가 붉은 석양에 잠긴 시각.
미노타우로스 마을은 암담한 분위기였다. 저마다 쪼그리고 앉아 풀뿌리며 나무뿌리를 캐는 미노타우로스들은 기력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식인마한테도 맨몸으로 덤비는 이 거대한 생명체들이 초췌한 몰골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이다.
“족장님, 곧 해가 집니다!”
“나라고 그걸 모르겠느냐!”
미노타우로스 족장은 다른 미노타우로스보다 배에 달하는 신장에 시커먼 쇳덩이로 만든 듯한 몸통을 자랑하는 놈이었다. 커다란 콧구멍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고, 큼지막한 두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마 양쪽에 흡사 섬뜩하게 휘어진 두 자루 검처럼 우뚝 솟은 뿔이 서늘하게 번쩍였다.
“인간 놈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그놈, 여우족과 한패였어요. 당장 쳐들어가서 여우 놈들 가죽을 싹 다 벗겨버립시다! 놈들 뼈로 국물을 내서 마시자고요! 미노타우로스를 속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줘야 합니다!”
성질 급한 미노타우로스 몇몇이 흥분해서는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지금 급한 건 여우 놈들을 잡아 죽이는 게 아니라 식량을 빼앗아 오는 일이었다. 먹을 것이 필요했다. 이대로 밤을 넘기면 내일 아침에는 최소 수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 나갈 것이다. 기근이 며칠만 더 이어져도 희생자는 네 자릿수를 넘어설 터, 그때는 부족 자체가 공중 분해될지도 몰랐다.
족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굳이 입을 열지 않더라도 거대한 강철 도끼를 둘러메는 살기등등한 모습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족장님! 여우들이 왔습니다!”
족장이 부족민들을 대동하고 출격하기 직전, 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일순 좌중의 안색이 변했다.
“뭐?”
“진짜 왔다고?”
미노타우로스 골짜기 앞에 델로리스와 천제현이 나란히 서 있었다. 젊은 여우족 오백여 명도 함께였다.
“비켜라, 비켜!”
구경꾼들을 헤치고 나타난 미노타우로스 족장이 호통을 치려다 말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우족이 데려온 왕도마뱀 무리 때문이었다. 왕도마뱀들은 저마다 커다란 철제 깡통을 지고 있었다. 여우족들은 그걸 내리느라 한창 정신이 없었다.
“이건?”
미노타우로스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철제 용기는 전부 남하국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혼돈의 숲에서는 누구도 이런 물건을 만들면서까지 수고스럽게 식량을 저장하지 않았다.
“통조림 만 개를 가져왔습니다. 오십만 근 정도 될 거예요. 수십 종에 달하는 향신료와 특제 양념으로 조리했으니 평소에 대충 먹던 음식보다 백 배는 맛있을 겁니다. 아마 저희 상회 음식을 맛보고 나면 앞으로 다른 건 입에도 못 댈걸요.”
점점 거칠어지는 미노타우로스들의 숨소리가 자리에 있는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아,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부족이라길래 좋은 술 천 통도 준비해 봤습니다.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서 입맛 까다로운 인간들 사이에서도 호평인 술이죠.”
미노타우로스들의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섰다. 묵직한 목울대만 꿀렁일 뿐, 다들 목소리조차 못 내고 있었다.
천제현이 미노타우로스들의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흡족한지 모르겠군요?”
미노타우로스 족장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치였다.
“당장 이리 내놔.”
이성을 잃은 미노타우로스들은 급기야 천제현 일행에게 달려들어 통조림을 낚아챌 궁리를 하고 있었다.
“경고하겠는데 강탈은 곤란합니다. 이건 첫 물량에 불과해요. 술과 고기라면 얼마든지 공급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 강제로 빼앗으려 든다면 미안하지만 앞으로 미노타우로스 부족과의 거래는 없을 겁니다.”
천제현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식량 공급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기꺼이 미노타우로스 골짜기를 치겠다는 부족은 아마 차고 넘칠 겁니다.”
미노타우로스 족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워, 원하는 게 뭐냐?”
“글쎄요.”
천제현이 약삭빠른 상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그쪽이 뭘 가졌는지 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