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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476화 (476/729)

# 476

제476장 미노타우로스

천제현은 당분간 여우족 마을에서 머물게 됐다.

새끼 여우는 부족민들에게 신으로 대접받으며 호사를 누리는 중이었다. 틈틈이 신도들에게 술법을 전수하기도 했는데, 개중에는 자신조차 아직 쓸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그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새끼 여우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신도들은 당연히 더욱더 열렬하고 경건하게 새끼 여우를 숭배하게 됐다.

새끼 여우는 누가 봐도 아직 유년기에 불과했지만, 요괴신교를 만든 신의 후예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신전에 앉아 신도들의 예우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다.

천제현은 그린캐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여우족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여우족은 결코 나약한 부족이 아니었다. 겨우 2만밖에 안 되는 인구에 진령급 고수가 무려 십여 명이나 되었다.

대제사장의 입에서 그 숫자를 들었을 때 천제현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나.’

2만 명 중에 무려 열 명 이상이 진령급이라니. 여우족은 규모가 작아 진령급이 두 자릿수로 끝난다지만 그 말인 즉슨 인구가 수백만에 달하는 다른 숲속 도시에는 진령급 고수가 무려 천 명 이상이란 게 아닌가.

혼돈의 숲 깊숙한 곳은 토양이 비옥하고 영맥이 빽빽해 온갖 고급 성약과 영약이 지천이었다. 당연히 술사들의 수련 속도도 척박한 남하 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 비율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대제사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놀랄 것 없소. 우리 부족은 신전에 모여 신앙의 힘으로 마력을 기르기에 일반 술사들보다 성취 속도가 빠른 것이니.”

교단 신자들은 일반 술사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무공을 수련하는 것 자체과 신앙심과 매우 밀접했다. 신앙은 그 자체로 매우 신비한 힘을 지녀 무공 수련에 도움을 줬다. 신앙심이 강할수록 수련 속도가 빨라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신자가 되고 나면 다른 속성의 무공을 새로 익히기 매우 어려웠다.

진령 경지에 오르면 요괴신교의 제사장 자격이 생긴다.

델로리스 역시 요괴신 제사장 중 하나였다.

그녀는 진령 1성 정점의 실력이었다. 그러나 술법을 사용해 조종할 수 있는 소환수는 혼성 9성 정점이 최대치였다. 여러 마리를 연속으로 소환해 부린다고 해도 동급 고수와 맞붙었을 때는 상당히 불리했다.

여우족은 원래부터가 그리 강한 종족이 아니었다. 거기에 다른 속성의 무공 수련이 불가능하다는 제한조건까지 따라붙다 보니 정령의 힘을 제대로 끄집어낼 수 없게 되고, 그 결과가 동급 상대보다 훨씬 떨어지는 전투력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급이 높은 고수는 많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전투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게 바로 이곳 여우족 마을이었다.

단, 요괴신교 신도들은 소환사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마수조련사이기도 했다.

요괴신 제사장들은 마수를 길들이는 쪽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였다. 마을 주변 숲속에는 백여 마리가 넘는 원숭이 외에도 각종 고급 마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도합 천 마리에 달하는 2급 상위 마수야말로 여우족이 이 위험천만한 혼돈의 숲에서 이날 이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천제현은 마수 조련에 관심이 많았다.

즉각적으로 마수의 정신을 통제하는 새끼 여우의 능력은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했다. 효과가 빠르고 편리하긴 했지만 중간에 끊기거나 차단당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여우족은 요괴족처럼 마수를 순식간에 쥐락펴락할 수는 없었다. 이들이 쓰는 방법은 일단 마수를 제압한 뒤 요괴신교에서 다년간 연구해낸 비법과 약물을 이용해 서서히 세뇌하는 것이었다. 시간과 자원은 많이 들지라도 성공만 하면 장기간 마수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천제현은 후자를 비교적 선호했다.

지금 기적상회에 가장 필요한 건 비행부대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늘을 나는 부대를 만들어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병사들이 탈 마수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후는 한결 수월하리라.

이제 요괴신교의 능력에 대해 세세히 알았으니 남은 건 어떻게 동맹을 맺느냐였다.

대제사장이 말했다.

“영원의 숲이 그린캐슬을 점령했다고 선포한 건 사실이나 성안 잔존 세력이 여전히 만만치가 않소. 그린교 잔당들 말고도 샤먼교 주술사, 사령술사, 드루이드, 거기에 외부에서 흘러든 대형 세력의 영향력까지 감지되는 상황이오. 우리만으로는 그들 중 하나와도 대적하기 힘들다오. 덤벼봐야 자살행위나 다름없소.”

천제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린캐슬 내부사정이 복잡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이리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이곳에는 온갖 종교가 득시글거렸다. 종교집단의 폐쇄성은 일반 토착세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들만 해도 상대하기 힘들 텐데 거기에 다른 대형 세력까지 끼어들었다니, 상황이 더 꼬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안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린캐슬은 인간족을 구경하기 힘든 곳이오.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괜한 시선만 끌 뿐이오.”

대제사장이 말했다.

“마을에 필요한 물자를 사러 가는 길에 섞여 들어가는 방법이 있소. 우리가 눈속임이 되어준다면 신분이 노출될 걱정은 없을 것이오.”

“그렇게만 된다면 좋지요!”

이때 여우족 한 명이 다급하게 실내로 달려 들어왔다.

“대제사장님, 큰일입니다. 그 망할 황소들이 또 말썽이에요!”

여우족 대제사장이 허옇게 센 눈썹 한쪽을 추켜올렸다.

“전투를 준비하게, 서둘러!”

갑자기 분주해진 여우족들의 모습에 천제현이 재빨리 물었다.

“무슨 일이죠?”

“기근 탓에 주위 부족들이 요즘 식량난을 겪고 있소. 걸핏하면 우리한테 눈을 돌리니 우리 요괴신교를 자기들 식량창고 정도로 보는 게 아니면 뭐겠소?”

대제사장의 안색이 무서우리만치 어두웠다.

“이쯤 되면 따끔하게 한 번 교훈을 줄 필요가 있소!”

올 것이 왔다는 게 천제현의 생각이었다. 여기 도착하기 전에도 그린캐슬 부근의 식량난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생물자원이 풍부한 숲속에서 이들 토착세력이 식량을 못 구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이곳에서 마을 하나의 활동반경은 보통 500리가량이다. 토착세력이 오랜 세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사냥을 지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마수들도 그 지역을 피해 다니게 된다. 그러면 마을에서는 사냥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대규모 부족은 보통 십만에서 수십만 명 규모, 며칠만 식량공급이 끊겨도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일주일 이상 식량 부족이 계속되는 상태가 바로 이들이 말하는 기근이었다.

그리고 기근은 백발백중 전쟁으로 이어진다.

도시 부근은 토착세력들이 특히 밀집된 지대인지라 사냥구역이 서로 겹치면서 사냥감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개중 규모가 큰 부족은 인구가 수십만은 되는데, 그 많은 입을 채울 식량을 당장 어디서 구해 오겠는가? 기근에 대처할 방법은 약탈이 유일했다.

천제현도 여우족을 따라 함께 숲에 들어섰다.

이미 여우족 수백 명이 대기 중이었다. 주변 나뭇가지 위에는 원숭이들이, 수풀 사이사이에는 거대한 늑대들이 보였다. 여우족은 촉각을 바짝 곤두세운 채 앞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얼핏 보기에도 이쪽보다 열 배는 많은 것 같았다. 원시적인 형태의 덩굴갑옷을 입고 손에는 거대한 도끼와 쇠망치를 든 형체 수천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실로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델로리스를 비롯한 제사장들이 일갈했다.

“더럽고 우둔한 미노타우로스 놈들,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미노타우로스는 신장만 해도 1장에 인간의 네 배에 달하는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들로, 놀랍게도 목 위로는 황소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 놈들의 부리부리한 두 눈알에서 불꽃이 튀었다.

천제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야만족과 마찬가지로 신체 능력이 우수한 종족이었다. 다시 말해 광전사로 키울 만한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전쟁이 목적이었다면 겨우 이 숫자만 데려오진 않았겠지. 지금처럼 주절대고 있지도 않았을 테고!”

체격이 우람한 미노타우로스 하나가 쿵쿵 지면을 울리며 걸어 나왔다.

“식량을 빌려주면 두 달 안에 갚겠다.”

여우족 제사장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리 먹기도 부족한데 빌려줄 게 어디 있어!”

“그래, 꺼지시지!”

“이 숲이 무덤이 되기 싫거든 꺼져!”

여우족의 태도는 타고나길 온화한 종족이 아닌 미노타우로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조금 전의 그 우두머리로 보이는 미노타우로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십 년이나 담장을 맞대고 살았으면서 사소한 부탁 하나 못 들어준다고? 수천 명이 굶어 죽기 직전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죽을 거, 무슨 미친 짓을 해도 우릴 원망하진 마라!”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여우족들의 표정이 일제히 딱딱하게 굳었다.

천제현이 옆에 있던 대제사장에게 물었다.

“미노타우로스들의 세력은 어느 정도죠?”

“서쪽 골짜기에 사는데, 부족원이 십만 명이 넘으니 이 부근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세력이오.”

대제사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충돌 없이 지내왔지만 이번 기근으로 아무래도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 같소.”

숲에서 사냥감을 구하기가 힘들어지면서 많은 부족들이 식량난을 겪고 있었으나 여우족만은 그들과 사정이 조금 달랐다. 이들은 먹을거리를 저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을 줄도 알았기에 기근 중에도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어디 보통 대식가이던가? 식인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게 그들이었다.

미노타우로스 하나가 먹어치우는 식량은 여우족 열 명 분량을 넘어섰다. 그런 미노타우로스를 도와주면 정작 여우족은 뭐로 목숨을 부지한단 말인가.

델로리스의 요염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미노타우로스 놈들, 힘으로 협박한다고 우리가 굴복할 줄 알고? 허튼짓하면 그 자리에서 숨통을 끊어줄 테다!”

여우족들의 살기를 느낀 탓일까.

주변에 숨어 있던 원숭이며 늑대들이 일제히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는 허기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주변 부족을 다 돌아봤지만 대부분이 제 코가 석 자였다. 남는 식량이 있어도 선뜻 빌려주겠다는 자들은 없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가장 만만한 상대가 여우족이었다.

“주지 않겠다면 빼앗는 수밖에!”

미노타우로스들이 내뿜는 살기에 여우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피할 수 없는 혈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숲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인구가 적은 여우족에게는 이번 싸움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 될 게 확실했다. 부족 규모가 여기서 더 줄어든다면 그때는 이곳에서 버틸 자격 자체를 잃게 되리라.

“겨우 그까짓 식량 때문에 칼까지 겨눌 게 뭐 있습니까?”

“웬 놈이냐!”

천제현을 발견한 미노타우로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은 인간 구경 자체가 힘든 땅이었다. 그런데 여우족 무리 사이에서 갑자기 인간이 튀어나오다니.

“저는 장사치입니다. 지금은 식량 공급책이라고 봐도 좋고요.”

천제현이 거대한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살갑게 웃어 보였다. 어딘지 간사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부족 전체가 배불리 먹을 만큼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단, 아까 소개했다시피 저는 자선가가 아니라 장사치라서요.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으리라 믿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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