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5
제475장 교단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에요?”
결국 참지 못한 천제현이 옆에 있는 델로리스에게 물었다.
“저 녀석이 어딜 봐서 신 같다고?”
한창 경건한 얼굴이던 델로리스가 천제현의 말을 듣더니 발끈하며 눈을 부라렸다.
“위대한 요괴신님을 모욕하는 자는 우리 요괴신교의 적이다!”
‘요괴신교? 그런 종교는 또 처음 듣는군!’
대충 드루이드교나 샤먼교 등과 비슷한 종교이리라. 종교는 천마교 같은 인간 사회의 종문이나 문파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종문은 무공 전승이 핵심인 집단으로, 구성원들이 한 지역이나 한 종족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응집력이 매우 강한 특성을 띤다.
한편 종교는 신앙의 전승을 핵심으로 한다. 종교별로 전해지는 특정 무공이 있긴 하지만 넓은 지역에 분산된 서로 다른 종족들이 공통의 신앙으로 묶인다는 점에서 종문과 차별성을 보인다.
“요괴신교는 대체 뭐 하는 곳입니까?”
천제현이 델로리스의 못마땅한 시선을 무시한 채 물었다.
“거기에 드루이드며 샤먼까지, 여긴 대체 얼마나 많은 교단이 있는 거죠?”
‘원숭이들을 해친 것도 모자라 요괴신께 불경스러운 소리까지 지껄이는 녀석이!’
원래는 상대해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델로리스였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요괴신을 모셔온 장본인 역시 바로 이 작자였다. 델로리스가 천제현의 질문에 간략히 답을 줬다.
알고 보니 혼돈의 숲 깊숙한 지대에는 온갖 종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숲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곳에 남은 고대의 흔적 역시 많았다. 이 지역의 수많은 종교 중 가장 세력이 큰 건 드루이드교, 샤먼교, 사령교, 그린교였다. 여우족들이 믿는 요괴신교는 기껏해야 이류 종교에나 겨우 낄 수 있을까.
“그린교?”
천제현이 멈칫했다.
“그린교와 그린캐슬은 무슨 관계죠?”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면 진짜 외지인이 확실하구나.’
“그린교는 숲의 신을 모시는 자들이다. 엘프족에게서 파생된 종교지. 예전에는 세력이 대단했지만 지금은 한물가서 드루이드나 샤먼한테 한참 밀렸다.”
‘아하. 그린교 자체가 엘프의 분파였기에 엘프왕이 외교적 수단으로 그린캐슬을 손에 넣는 게 가능했던 거군.’
여기 세력구도가 이토록 복잡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금까지 들은 교단들만으로도 천제현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광신도들이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부류 중 하나였다.
종교인들은 다소 독특한 무공 수련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물 속성 정령을 부리는 사람이 불 속성 무공을 익히는 건 자살 행위다. 하지만 그가 수련하는 게 어느 불 속성 교단의 무공이고, 그에게 충분한 신앙심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신앙의 힘이 무공과 정령의 충돌을 막아주기 때문에 신앙심의 깊이만큼 무공 수련에도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것이다.
종교를 통해 전승되는 무공은 대부분 신앙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신도들에게 종교는 단순한 정신적 안식처를 넘어서 수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였고, 그렇기에 다들 더더욱 열성적으로 믿음에 매달렸다.
아까 델로리스가 시전한 술법은 새끼 여우가 쓰는 것과 흡사한 소환술이었다. 어떤 무공 비급에도 등장하지 않아 천제현조차 알지 못했다.
아마 고대 요괴족이 쓰던 특수 술법일 것이다. 보통 사람은 사용할 수 없으리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천제현이라 해도 익히지 못할 소환술을 이 여우족들은 대체 어떻게 시전할 수 있는 걸까.
납득 가능한 가설은 오직 하나였다.
고대의 어느 요괴신이 정말로 이 교단을 창시하고 자신을 모시는 대가로 힘을 빌려준 것이다. 고대의 신과 악마들이 왜 종교라는 걸 만들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들이 신앙으로 형성된 강력한 마력을 자기 힘으로 흡수한다는 얘기를 들어보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새끼 여우의 조상과 이들 여우족 사이에 정말로 각별한 인연이 있는지도 몰랐다.
마을 중앙에는 웅장한 신전이 우뚝 서 있었다. 거대한 마수의 뼈대와 암석을 뒤섞어 지은 신전은 높이만 해도 족히 30여 장은 넘어 보였다.
으리으리한 장관이었다. 바람에 깎여나간 흔적에서 신전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인구가 2만 명도 채 안 되는 소규모 부족이었지만 규모만 보고 무시할 수 있는 집단은 아니었다. 거의 부족 전체가 영혼을 이용해 마수를 소환할 줄 아는 요괴신교 신도들이기 때문이었다. 요괴신교는 마수를 길들이는 데도 능했다. 아까 마주쳤던 원숭이도 요괴신교에서 기르는 녀석들이었다. 이들은 숲 가장자리의 마을쯤은 마음만 먹으면 가볍게 쓸어 버릴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이즈음 새끼 여우는 이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손바닥만 한 녀석이 드높은 단상 위에 모셔져 뭇 교도들의 숭배를 받는 모습이라니.’
새끼 여우는 배역에 몰입이 빨랐다. 꼬리를 말고 꼿꼿이 앉아서 까만 눈망울을 빛내고 있었다. 쪼그마한 주제에 자세만큼은 수사자 뺨치게 위엄이 넘쳤다. 바닥에 엎드린 교도들을 죽 훑어보던 녀석이 앞발을 들어 그만 일어나라는 표시를 했다.
천제현은 새끼 여우를 내버려두고 홀로 신전 안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새끼 여우의 허세를 차마 더는 구경하고 있을 수 없어서였다. 신전 구석구석에 세워진 토템들 중에는 섬뜩한 표정을 한 구미호의 수가 가장 많았다.
구미호라면 공화련의 천서 정령이 가진 기억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혼돈시기 이 땅에는 신과 악마 말고도 고대의 요괴족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구미호는 그 요괴들의 왕이었다. 요괴족 최강의 술법을 보유한 구미호들은 신과 악마에게도 다소 꺼림칙한 대상이었다.
‘새끼 여우가 정말 구미호의 후예인 걸까?’
그렇다 하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강시 몸속이라는 극악한 환경에서 만 년 이상 머물던 구미호의 후예가 어떻게 선조의 능력 외에도 사악한 힘을 물리치는 기질까지 갖춘 것일까.
이때 신전 안에 요란한 환호와 탄성이 울려 퍼졌다.
새끼 여우가 석판 앞에 앉아 발톱으로 뭔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낯선 요괴족 문자였다. 한껏 흥분한 신도들의 기색으로 보아 모종의 술법을 시전하는 방법인 듯했다.
신도들이 연이어 머리를 조아리며 새끼 여우에게 감사를 표했다.
의식이 끝나자 여우족 남녀노소가 온갖 영약이며 신비한 열매, 광석을 가져왔다. 전부 새끼 여우에게 바치는 공물이었다. 새끼 여우는 드디어 제 세상을 만난 듯 신이 난 기색이었다. 누군가한테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많이 먹는다고 쥐어박기만 하던 주인 놈은 진짜 악질이었다.
천제현은 으스대는 새끼 여우를 당장에라도 콱 쥐어박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내는 중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거꾸로 매달려 광신도들에게 죽도록 얻어터질 게 분명했다.
‘일단 참자!’
어쨌든 여우 덕분에 의외의 수확을 얻지 않았는가.
천제현이 그린캐슬 부근까지 온 건 정보 수집 겸 토착세력 몇몇을 미리 자기편으로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곳 토착민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외지인이 불쑥 끼어드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그런데 여우 덕에 수고를 엄청나게 덜게 된 것이다.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는 건 요괴신교가 숲의 주류 세력까지는 못 되더라도 꽤 강한 집단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긴긴 세월 토박이로 지내면서 그린캐슬 근처에 대해서라면 손바닥 보듯 환히 꿰고 있을 테니 이들이야말로 천제현에게 꼭 필요한 동맹군이었다.
“모두 봤다시피 저는 여러분이 모시는 요괴신의 일행입니다. 다시 말해 적일 리가 없다는 거죠.”
천제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작을 멈춘 여우족들이 일제히 새끼 여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나게 배를 채우던 새끼 여우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를 굴려 천제현의 표정을 살핀 새끼 여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쯧쯧, 주인 놈아. 살다 보니 네가 나한테 사정하는 날이 다 오는구나. 이 몸이 명령만 하면 저들이 당장 널 홀딱 벗겨서 볼기짝을 칠걸. 평소에 내가 당하던 그대로 갚아줄 수 있단 말이지!
이때 여우를 바라보던 천제현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흥.
콧방귀를 뀐 후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인 새끼 여우는 다시 배 채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우족 노인, 즉 부족 대제사장이 재빨리 일어섰다.
“요괴신 님의 친구라면 우리에게도 귀한 손님이니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 괘념치 말고 이야기해 보시오.”
‘암, 바로 이거지!’
크흠 목청을 가다듬은 천제현이 말했다.
“대제사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도 솔직히 밝히죠. 사실 저는 그린캐슬의 새 성주가 될 사람입니다. 이곳 상황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혼자서 먼저 와보게 된 거고요.”
‘그린캐슬 성주?’
천제현을 쳐다보던 좌중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린캐슬 성주 자리가 언제부터 인간 차지가 됐지?’
‘불과 며칠 전에 엘프들 손에 넘어간 성이 아니던가!’
엘프와 인간은 그다지 화목한 관계가 못 됐다. 아니, 몹시 껄끄러운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프가 그린캐슬처럼 중요한 도시를 인간에게 내줄 리가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두의 의혹을 일순에 잠재울 물건이 등장했으니, 바로 천제현이 꺼내 보인 엘프왕의 증표였다.
여우족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 젊은이가 설마 영원의 숲에서 임명한 성주일 줄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근방 천 리는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요괴신교 신도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일대 소란 속에서 그나마 가장 침착한 인물은 대제사장이었다. 가볍게 헛기침을 한 대제사장이 말했다.
“임명을 받았다고는 하나 지금 상황에서 성주 자리를 보전하기란 아마 쉬운 일이 아닐 것이오!”
굳이 대화상대를 고르자면 천제현은 영민한 쪽을 선호했다.
쓸데없는 수고를 아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대다수가 망할 여우 녀석에게 알랑거리는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긴 했으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우족은 마수령 중에서 지능이 가장 높은 종족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과 훈련만 받쳐주면 약삭빠른 상인이 될 수도, 교활한 정객이 될 수도 있는 게 그들이었다.
그런 여우족 사이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대제사장이 요괴신과 젊은이가 무슨 사이인지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요괴신은 이 젊은이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요괴신을 무시하는 듯한 젊은이의 눈빛, 어쩌면 그들의 신과 이 젊은이 사이에는 모종의 굴욕적인 협상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린캐슬의 성주라는 자가 여기까지 수행원도 하나 없이 왔다. 상당한 실력자였지만 어디까지나 ‘상당한’ 정도에 불과했다. 요괴신교 안에만 해도 젊은이와 비견할 만한 고수가 쉰 명은 넘게 있었다.
아마 이 젊은이는 성주 자격만 얻었다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실력은 없는 인물이리라.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성주 자리가 위태로운 지금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면 훗날 진짜 그린캐슬 성주가 되었을 때는 요괴신교에 큰 힘을 실어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