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
제474장 요괴신 강림
천제현이 화염을 잠재웠다.
상대는 마수령,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 명의 여우족이었다.
여우족은 마수령 중에서도 가장 지능이 높은 걸로 알려져 있었다. 신체를 고강도로 단련하거나 근접전용 전투 무공을 익힐 체력은 없으나 특정 마력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자들이었다.
눈앞의 여우족들은 무척이나 독특한 인상이었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아직 어린 티가 남은 나머지 셋과 달리 그중 하나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여우족 미녀는 대륙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여우족은 토끼족과 마찬가지로 대륙인들의 미적 기준에 몹시 부합하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순진한 엘프와 달리 여우족 미녀들은 꽤나 방탕한 데다 세속적인 허영심이 넘쳤다. 부와 권력에 탐닉하는 이들의 특성은 인간 귀족들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졌다.
천제현이 여우족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천남성 시절 강시협곡 안의 암시장에서도 여우족 노예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은 옷차림부터가 어째 괴상했다.
헐렁한 흰색 로브와 손에 든 마법 지팡이에는 알 수 없는 주문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대륙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지만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는 매한가지였다.
“누구냐?”
여우족 소년 하나가 소리쳤다.
“왜 원숭이를 공격한 거지!”
‘아마 이곳 토착세력이겠지? 그런데 어디 모자란 거 아냐? 놈들이 먼저 달려드는데 가만히 서서 당하고만 있으라고?’
천제현의 시선이 넷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우족에게 머물렀다. 한눈에도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면 실력자가 확실했다. 혼돈의 숲 한복판에서는 아무리 작은 규모의 부족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여기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는 건 바깥의 어지간한 대형 부족 못지않은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해입니다, 오해!”
천제현이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미래의 성주가 토착세력과 갈등을 일으켜서야 되겠는가. 충돌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게 좋았다.
천제현은 상대에게 친근감을 주고자 일부러 마수령 언어를 썼다.
“멀리서 온 여행자인데, 지리를 잘 모르다 보니 실수로 여기까지 들어와 버렸어요. 불편하셨다면 지금 바로 떠나겠습니다!”
“할아버지, 수상해요. 분명 뒤가 구린 놈이에요!”
또 다른 여우족 소년이 노인에게 말했다.
“드루이드나 샤먼 쪽에서 보낸 첩자 같은데 일단 잡아서 심문부터 해보죠!”
‘드루이드? 샤먼?’
천제현의 눈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스쳤다.
옛 서적에서나 보던 이름들을 생생하게 듣게 될 줄이야,
‘그 오래된 교파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니?’
여우족 노인도 천제현의 눈빛을 읽어낸 듯했다.
“외지에서 온 여행자가 드루이드와 샤먼을 알고 있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거짓말이 어설프지 않소?”
오해가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확실치 않다고 하더라도 요즘 같은 비상시국에 수상한 자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
여우족 노인이 옆에 서 있던 여자에게 명령했다.
“델로리스, 잡아들여라.”
델로리스라는 여자는 노인을 제외한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우족이었다.
굴곡이 확실한 몸매에 눈부신 은발, 인간으로 따지면 스물네다섯쯤이나 됐을까. 풋풋함을 벗고 한창 성숙한 여인의 단계로 접어드는 중인 나이였다. 여우족 특유의 요염함이 그녀의 미모에 치명적인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오해라니까요, 이러지들 마세요.”
천제현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한테 손대고 싶지 않습니다.”
뭐라고 짖든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 델로리스가 품 안에서 주문이 빽빽하게 적힌 병을 꺼내 들었다. 처음 보는 이상한 주문이었다. 연대가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것이, 큰아가씨가 아니고서야 알아볼 사람이 없을 듯했다.
사실 진짜 천제현의 주의를 끈 것은 병 표면에 적힌 주문이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이었다. 병 속에는 보랏빛 영혼 마력이 담겨 있었다.
‘영혼 마력을 가둘 수 있는 병이라니? 대단한 자들이군!’
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든 델로리스가 경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위대한 요괴신이시여, 제 부름에 귀 기울이시어 힘을 내려주소서!”
병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천제현이 눈을 찌푸렸다. 이 세계의 어지간한 무공은 줄줄이 꿰고 있는 천제현에게도 낯선 술법이었다.
순간 안쪽에 차오른 힘에 밀려 병뚜껑이 뻥 하고 날아갔다.
공기 중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영혼에 델로리스가 마력을 주입했다. 마치 빈 물병에 물이 차듯 투명하던 영혼체에 마력이 차오르면서 거대한 녹색 형체가 만들어졌다. 무게를 못 이기고 수풀 위로 떨어진 형체로부터 위협적인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2장에 달하는 거대 사마귀였다. 유령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생명체도 아닌, 기묘한 형태로 그 중간 즈음에 존재하는 괴물.
천제현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영혼비술? 사령비술? 아니, 전부 아니다.’
대체 무슨 해괴한 술법이란 말인가.
천제현이 멈칫하는 사이 사마귀가 앞다리를 휘둘렀다. 두 개의 녹색 마력 칼날이 지면에 섬뜩한 상흔을 남기며 날아왔다.
“할 수 없지.”
천제현이 검을 빼 들어 내리쳤다.
유명검에서 강렬한 불꽃이 이는 동시에 사마귀가 날린 마력 칼날이 예리하게 두 동강 났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사마귀가 녹색 칼날을 마구 휘두르며 질풍같이 치고 들어왔다. 천제현의 검이 좌우로 바삐 춤추면서 사마귀의 공격을 막아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양쪽의 칼날이 수십 번 부딪쳤다. 날카로운 검기에 주변의 나무가 모조리 잘려 나자빠졌다.
‘만만치 않은 놈이다!’
최소 혼성 9성 정점에 달하는 마력이었다.
지금 천제현이 정령을 불러내지도, 전력을 다하지도 않는 건 이들과 원수지고 싶은 생각이 없는 탓이었다. 젊은 여자만 해도 실력이 이 정도인데 뒤에 있는 노인은 어떠하겠는가?
전력으로 덤빈대도 꼭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상황이 그에게 불리했다.
환영사마귀가 애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우족 소년이 품에서 호루라기같이 생긴 물건을 꺼냈다. 그걸 힘껏 불자 아까의 잽싼 원숭이들이 돌아왔다.
“놈을 붙잡아!”
사마귀만도 힘에 부치는데 원숭이들까지 달려들면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게 뻔했다.
“여우, 이놈아! 뭘 보고만 있어? 이럴 때는 네가 나서야지!”
앞발을 뻗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한 새끼 여우가 숨을 한 번 들이키자 사마귀의 형체가 일순 일렁였다. 다음 순간, 돌연한 폭발과 함께 뿌연 연기처럼 산산이 바스러진 사마귀가 새끼 여우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델로리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환영사마귀가!”
새끼 여우가 삼켰던 영혼을 도로 꿀렁 토해냈다. 뱃속에서 나온 영혼은 다시 거대한 사마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새끼 여우가 소환한 사마귀는 조금 전 마력 덩어리 형태였던 사마귀와는 달랐다. 이번 환영사마귀는 살아 있는 상태와 똑같은, 온전한 실체였다.
힘, 위압감, 능력치, 모든 것이 살아생전 환영사마귀의 것 그대로였다.
델로리스가 소환했던 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생생하게 숨 쉬는 생명체. 그렇다면 주위를 둘러싼 원숭이 떼는?
시답잖다는 얼굴이던 새끼 여우가 훌쩍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도약할 때만 해도 자그마하던 몸체가 땅에 착지할 때는 이미 거대하게 불어나 있었다. 새하얗고 복슬복슬한 꼬리 세 개가 등 뒤에서 살랑거리는 가운데 여우의 두 눈동자가 기이한 녹색으로 빛나면서 무형의 마력을 발산했다.
천제현을 공격하려던 원숭이들이 움찔 경련하는가 싶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눈동자에 도는 녹색 기운으로 보아 정신을 지배당한 것이었다. 곧이어 여우 앞에 일렬로 줄을 선 원숭이들의 모습은 흡사 새끼 여우가 기르는 애완동물과도 같았다.
여유롭게 앞발을 쓱쓱 핥던 여우가 오만한 눈빛으로 여우족들을 내려다봤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만한 눈빛이었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내 앞에서 잔재주를 부려?
한편 천제현은 몹시 당황스러운 참이었다.
‘젠장, 여우 녀석이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거지?’
새끼 여우가 소환한 사마귀는 진령 경지에 준하는 수준이었고 흰 원숭이 수십 마리만 해도 혼성 7, 8성은 될 실력이었다.
남하국에서 처음 변신했을 때 새끼 여우의 꼬리는 두 개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 개가 됐다. 꼬리가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난 만큼 새끼 여우의 힘도 한 단계 상승한 것 같았다.
꽃의 엘프 마을에서 진령급 고수 여럿은 만들어낼 법한 약재를 혼자 다 먹어치우더니 그게 낭비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이, 이건…….”
이번에는 젊은 여우족들만 놀란 게 아니었다. 줄곧 침착하던 여우족 노인 역시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노인이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요괴신, 요괴신이시다! 위대한 요괴신이셔!”
노인이 마치 쓰러지듯 땅에 무릎을 꿇었다.
나머지 세 여우족도 흥분을 주체 못 하는 기색이었다.
“저 능력, 저 형상. 전설 속 요괴들의 왕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하다. 정말로 요괴신께서 다시 세상에 강림하셨다는 말인가?”
여우족들이 왜 그러는지 알 리가 없는 새끼 여우는 미심쩍다는 눈빛이었다.
“어서, 어서 가서 다른 이들에게도 요괴신 님을 영접하러 나오라 이르거라. 요괴신께서 강림하셨으니 이제 우리 교파는 무한히 부흥하리라!”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여우족 수천 명이 달려오더니 새끼 여우를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요괴신 만세’를 외쳤다. 하나같이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들이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새끼 여우도 곧 특유의 영악함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렸다. 자기들이 좋아서 무릎 꿇고 숭배하겠다는데 받아주지 못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여우족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괴신께서 강림하신 줄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여우족들의 한껏 상기된 얼굴이 일제히 새끼 여우를 향해 있었다.
새끼 여우가 멋쩍게 코를 킁킁거렸다. 이런 상황은 영 익숙지가 않았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천제현이었지만 어쨌든 상대가 저 망할 여우를 숭배한다면야 그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천제현이 재빨리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자, 자, 제가 오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쪽에서 이 망할 여…… 요괴신을 안다면 우리가 적이 아니라는 뜻이죠.”
“맞소, 맞아.”
“어서 요괴신님을 신전으로 안내해라.”
“온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할 것이야!”
새끼 여우가 여우족 무리에 둘러싸여 우쭐대며 걸어가는 모습을 천제현은 옆에서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알기로 여우족은 총명하기로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종족이었다. 장사든 정치든 노련하게 해내는 여우족이 이 시점에는 왜 백치처럼 군단 말인가.
‘저 망할 여우가 요괴신인지 뭔지를 닮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