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
제454장 설전
루루가 돕고 있는 게 분명했다. 꽃의 엘프와 엔트족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루루가 천제현의 일을 알렸다면 엔트족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면, 걱정거리는 크게 줄어들게 마련이다.
본래 천제현은 몸만이라도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재 정황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으니 약간의 소득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엘프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비비안은 무단으로 부족을 떠나 인간의 나라로 간 후 두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인간족과 마수령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참여하고, 마수령 왕국의 국왕을 죽인 증거까지 나왔습니다. 이는 선조의 유훈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며, 이를 뒷받침할 증거 역시 확실하므로 최소 징역 50년을 구형해야 합니다!”
그가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비비안은 아비숑 장로의 선약을 훔쳐 인간인 천제현에게 주고, 심지어 그의 조직에 가입해 자진하여 타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게다가 인간을 위해 일함으로써 우리 엘프족의 위신을 크게 훼손하였으며, 인간을 데리고 혼돈의 숲에 들어가 곤충령과 싸우고 거미여왕 엘리카시스의 후손들을 해쳤습니다. 엘프와 곤충령의 관계를 악화시켜 엘프족 외교에 악영향을 미쳤기에 최소 징역 100년을 선고해야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
“비비안은 엘프의 공주의 신분으로 엘프족의 풍기를 문란케 하고 큰 누를 끼친 바, 마땅히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공주 신분을 영구적으로 박탈하고, 징역 200년에 처할 것을 제안합니다!”
‘200년?!’
엘프들은 깜짝 놀라 숨이 턱 막혔다.
“비비안, 이 같은 혐의에 대하여…….”
율리시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의 있는가?”
엘프족에게 200년은 반평생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처럼 무거운 형벌이 선고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비비안은 얼굴빛이 다소 창백해지긴 했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이를 악물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비비안이 종족의 규율을 깬 행위는 용인할 수 없는 중죄로 지난 100년 간 거의 발생한 적이 없소. 그러나 비비안 공주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인간인 천제현에게도 책임이 있다오!”
이제 천제현 차례였다.
“비비안이 선약을 훔친 것은 사실상 천제현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소. 상회 가입을 권유한 것도, 인간족이 벌인 마수령 전쟁과 곤충령 전쟁에 휘말린 것도 모두 천제현이 배후에 있었소!”
“인간족이 엘프를 속이고 약탈하는 사건은 대륙 각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소. 심지어는 엘프를 능욕하고 겁박하여 더러운 육체적 거래를 시킨 사례도 적지 않다오. 이는 엘프족이 극도로 혐오하는 일이지 않소. 천제현이 비비안을 이용한 것도 이런 행위와 다르지 않기에 중죄에 해당한다고 보오. 따라서 그 죄를 엄히 다스려 사형에 처할 것을 제안하겠소!”
엘프족 원로들은 몇 분간 의견을 나눈 다음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에 대한 판결은 다소 무겁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천제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정말 악독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군!”
“순진하고 착한 엘프족을 이용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나이 많은 엘프들은 살면서 수많은 악행을 봐왔다. 숲 속에서 인신매매 업자에게 납치된 엘프도 수두룩했으며, 이렇게 잡혀간 엘프 대부분은 인간에게 팔렸다. 엘프족 눈에 인간족은 더럽고 탐욕스러운 종족이었다.
엘프족과 인간족 사이에 뿌리 깊은 원한은 없었지만, 엘프족 대부분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엘프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에 추악한 목적이 있다고 여겨, 천제현이 비비안에게 접근한 동기 역시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엘프족에 이 같은 파란을 일으킨 것도 백번 죽어 마땅한 일이었다.
율리시스는 천제현에게 말했다.
“인간이여, 엘프족은 공명정대한 종족이오. 그러니 당신께 변론할 기회를 주겠소!”
“변론은 무슨!”
엘프들 얼굴이 순간적으로 변했고, 이와 대조적으로 천제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전부터 엘프족이 고지식하고 아둔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오늘 보니 정말 그렇네요. 이 대륙에서 엘프족은 인간은커녕 마수령보다도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하겠어요? 자기 발등을 찍는 줄도 모르면서 우월감만 하늘을 찌르는군요!”
엘프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엘프들이 얼마나 교만하고 오만함이 가득한 종족인가. 마수령보다 못하다는 말은 모욕이 아니라 적나라한 도발이었다.
율리시스는 표정 변화 없이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이 고귀한 엘프를 모욕하여 당신이 지은 죄를 더 가중시키다니!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기회는 많지 않으니.”
“고귀, 정의, 품격, 선량. 엘프족은 이런 수식어를 참 좋아하나 봅니다!”
천제현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본 엘프족은 생각이 짧고 고루한 데다 현실에 안주하여 발전이라곤 모르는 종족입니다! 빛나는 역사 속에 도취되어 미래를 보지 않는 겁쟁이들이지요! 제일 웃긴 게 뭔지 아십니까? 이 겁쟁이들이 하나같이 이런 빌어먹을 규율을 정해 종족 가운데 진정한 선구자를 제약하고 박해 한다는 겁니다! 비비안 공주 같은 진정한 영웅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지요!”
좌중은 모두 아연실색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비비안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언제 엘프족의 영웅이 되었지?’
‘그녀가 엘프족을 개혁할 선구자라고?’
이게 무슨 관계가 있나?!
율리시스가 일어났다.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변론할 기회를 포기했으니 우릴 탓하지 마시오. 여봐라…….”
“부의장님!”
천제현이 율리시스를 지목하여 날카롭게 질문했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대인의 연세가 600살 이상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엘프족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높은 자리에 앉아 엘프족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나요?”
율리시스는 순간 말문이 막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종족은 자연에 순응하며 무위로 다스려왔소. 당신들처럼 허영심 많은 인간이 뭘 안다는 거지?”
“마수령이 엘프족을 거의 박살낼 뻔 했는데, 무슨 무위로 다스린다는 겁니까? 그리고 무위로 다스린다면서 엘프 의회는 왜 여는 겁니까? 진작 해산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천제현의 어조가 갈수록 신랄해졌다.
“종일토록 종족의 옛 영광에만 심취하여 근거도 없는 우월감에 취해 있지 않습니까? 허영심에 빠져 있는 건 엘프인 당신네들입니다! 능력 있는 후손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도 없고, 별 공로도 세우지 못한 채 자기애에 빠져 살고 있으니 진정 멸족을 당해야 깨달으시겠습니까?”
결국 율리시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제아무리 성격 좋은 엘프라도 천제현의 거듭된 도발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좋소! 그럼 당신께 묻겠소! 비비안의 방법이 엘프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천제현은 격앙된 어조로 비비안을 보며 말했다.
“비비안 공주님은 엘프족의 산하가 흔들리는 것을 감지하고는 종족을 구할 방법을 찾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상회의 제품을 통해 인간이 가진 혁신적인 기술을 알게 되셨지요. 엘프족에게 새로운 과학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비비안 공주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선약을 훔쳐 수만 리를 달려와 생사를 오가던 저를 구하신 겁니다…….”
천제현은 전체적인 사실을 부연 설명했다.
“저는 본래 남하국에 사는 인간입니다. 엘프의 숲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비비안 공주님을 뵌 적도 없었습니다. 저는 비비안 공주님의 진심어린 마음에 감동 받아 인간의 무공과 최신 과학기술을 전수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공주님은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엘프족의 규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하국에 몰래 잠입하여 절세무공을 배우고, 첨단 과학기술을 익혀 엘프족을 개혁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진심이 어디가 그리 더럽다는 것입니까?”
엘프들은 모두 말문이 막혀 버렸고, 천제현은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당당하게 다시 물었다.
“지난 수백 년간 쓰지 않은 머리로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남하국은 일개 소국에 불과합니다. 거기서 사는 제가 무슨 자격으로 비비안 공주님을 부를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곳은 남하국에서 수만 리나 떨어져 있고, 고작 혼성급 술사인 제가, 그것도 혼돈의 숲을 지나갈 실력도 없는데 무슨 수로 숲 속에서 엘프를 납치할 수 있겠습니까?”
율리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비비안이 어찌 네 존재를 안 것이오?”
진령 4성의 마력을 지닌 비비안은 혼돈의 숲에서도 고수일 게 분명했기에 이런 실력자가 혼성 술사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천제현이 차갑게 말했다.
“그건 다른 장로님께 물어보시지요!”
이때 주변에 있던 꼬마 엘프들이 말했다.
“아비숑 장로님이 상영기를 가져 오셨고, 우리는 상영기를 통해 천제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비숑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비안이 천제현을 알게 된 것은 엄연히 따지자면 아비숑 장로 때문인 것이다.
율리시스는 아비숑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부의장님께 보고드립니다. 제가 남하국을 지날 때, 그곳에서 신기한 물건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공주님께 드릴 선물로 가져온 것이지, 그 일로 이런 사달이 날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율리시스가 또 물었다.
“비비안, 인간 곁에 머문 두 달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
비비안은 눈빛으로 천제현의 동의를 구했다.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의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비밀리에 천제현이 제게 전수한 최고의 공간 무공인 허공둔을 익혔고, 공간창고 기술을 배웠어요!”
‘공간 무공?’
모든 엘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비안은 줄곧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찾지 못했고, 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공간 무공을 익혔다는 말인가?’
‘이건 불가능해! 공간 무공이 얼마나 희귀한 데 인간 따위가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율리시스가 심문하듯 물었다.
“공간창고는 또 무엇이냐?”
“제가 붙잡혀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저는 기적상회에서 공간 기술자였어요!”
비비안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활짝 폈다.
“저는 이미 공간창고 하나를 만들었고, 우리 종족이 사용하도록 하나 더 만들고 싶었습니다. 천제현에게 이미 동의도 구했고요. 하지만 다 만들기도 전에 이렇게 잡혀온 거죠!”
비비안은 공간창고의 특징을 엘프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엘프들은 깜짝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오리디스, 아비숑 등도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 세상에 이토록 신기한 기술이 있었다니?’
‘인간이 이 정도의 수준까지 발전했단 말인가!’
비비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엘프족은 스스로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인간보다 수만 년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이렇게 많이 뒤처져 있을 줄이야.
“지금 공간창고를 회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기술도 엘프족과 공유하지 않겠습니다!”
천제현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공주님께 전수해드린 무공은 약을 주신 데 대한 보답의 의미입니다! 지금 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제가 죽고 나서 100년 후에는 인간들이 제 복수를 위해 혼돈의 숲에 있는 모든 엘프족을 몰살시킬 테니까요! 엘프족은 은혜도 모르는 졸렬하고 비천한 종족으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비비안이 흠칫 놀랐다. 그녀는 천제현이 일부러 엘프들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신네가 모든 걸 무너뜨렸다는 것만 명심하십시오!”
이때, 징역 200년이 선고될 때에도 가만히 있던 비비안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내가…… 여러분과 같은 종족이라는 게 부끄러워요! 차라리 절 천 년 동안 가두세요. 더는 당신들을 보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