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
제453장 숲 속 법정
새끼 여우가 고개를 길게 빼 들고 눈망울을 이채롭게 반짝였다. 새끼 여우가 꽃의 엘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그 작은 몸 안에 숨겨진 강력한 마력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호오, 생각지도 못했군. 이런 곳에 꽃의 엘프가 살다니!’
전혀 뜻밖의 상황이었다. 천제현은 예상치 못한 보배를 발견한 보물사냥꾼이 된 기분이었다.
꽃의 엘프는 누구라도 눈이 뒤집힐 만한 능력을 지닌 생명체이자, 능력을 뺀 신체 자체도 귀한 보물이었다.
훗날 인간들의 남획에 멸종 직전까지 몰리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혼돈의 숲에서 이 신비한 종족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꽃의 엘프가 가진 능력은 아주 다양했다.
첫째는 치유능력. 이들의 작은 몸에는 대단히 강력한 자연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꽃의 엘프는 대지와 식물로부터 생명의 정수를 뽑아내 동물의 상처를 치료하는 법도 알았다. 꽃의 엘프 하나만 손에 넣으면 몇 사람분의 목숨을 보장받는 셈, 오로지 이 능력만으로도 이들은 인간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식물을 키우는 능력. 꽃의 엘프는 타고난 정원사였다. 아무리 재배가 까다로운 식물이라도 꽃의 엘프가 돌보기 시작하면 대부분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 또한 이들에게는 약초의 성장 속도를 열 배까지 끌어 올리는 힘이 있었기에 본래 재배에 십 년이 걸릴 약초도 일 년이면 수확이 가능한 상태로 키워내는 게 가능했다.
셋째는 보물을 찾는 능력. 꽃의 엘프는 나무, 풀, 대지와 소통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산속 깊이 숨겨진 보물이라도 이 능력을 이용하면 간단히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모험가라면 누구나 꽃의 엘프를 탐냈다.
확실하게 증명된 세 가지 능력 외에도 꽃의 엘프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떠돌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꽃의 엘프 자체가 최상품 보조재료라는 말이었다. 사악한 제약사들은 단약 품질을 높이는 데 꽃의 엘프를 썼다. 예를 들어 반선급 약물 재료에 꽃의 엘프를 더하면 선물급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믿음이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증명된 건 아니지만 근거는 있는 얘기였다.
꽃의 엘프는 숲이 품은 생명의 정기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한 생명체였기에 모두가 한 가지 성(性), 그중에서도 여성의 모습이었다. 본래가 진귀한 자연의 보물인 동시에 번식 능력마저 없다 보니 개체 수가 극히 적은 것도 당연했다.
꽃의 엘프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천제현은 역시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꽃의 요정, 이름이 뭐야?”
“어머, 우리 일족을 아세요? 대륙에서는 엘프밖에 우리 존재를 모르는 줄 알았는데!”
표정이 금세 환해진 꽃의 엘프가 투명한 날개를 파닥이며 천제현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루루라고 해요!”
꽃의 엘프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반짝이는 빛의 궤적이 남았다. 그걸 잡아보겠다고 앞발을 허우적대던 새끼 여우는 빛의 가루를 한 움큼 콧속으로 들이마신 뒤에야 만족스러운 표정이 됐다.
루루 역시 천제현의 추종자였다. 꽃의 엘프들은 아비숑이 비비안에게 선물한 상영기를 빌려 가 꽤 긴 시간 갖고 있었다. 꽃의 엘프는 그 수가 몇 안 되는 희귀종족이었지만 생명의 나무 부족에서의 지위만큼은 대단히 높았다.
루루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정말로 하늘의 별도 딸 수 있다고요?”
“그게 어려운 일인가?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비행기구를 만들어서 하늘 밖 광산을 개척하면 되지!”
천제현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나한테 그쯤은 식은 죽 먹기야!”
루루가 감탄과 선망이 가득한 얼굴로 천제현을 바라봤다.
“진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건가요?”
세상에는 물론 그의 능력이 닿지 않는 일도 많았다. 순진한 꽃의 엘프를 상대로 천제현도 거기까지는 차마 허풍을 떨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일단 질문을 그대로 받아쳤다.
“왜, 못 믿겠어? 내가 이래봬도 능력자인데 말이지. 확인 한 번 시켜줘?”
천제현의 손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루루가 놀랍다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
“확인이라니요?”
천제현이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기 손에 올라와 있는 꽃의 요정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꽃의 엘프 일족의 제일 큰 근심거리가 뭔지 맞혀볼까?”
“어디 얘기해 보세요!”
“생명의 나무 씨앗을 싹틔울 방법, 줄곧 그게 고민 아니었어?”
루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걸 어떻게? 나무 엘프들이 알려줬나요?”
“나무 엘프들이 나한테 그런 얘길? 당연히 아니지!”
천제현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또 하나, 꽃의 엘프들한테는 어떤 식물이든 키워내는 특별한 능력이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싹 틔우기에 실패한 게 생명의 나무 씨앗이고, 내 말 맞지?”
루루가 모이 쪼아 먹는 병아리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의 나무 씨앗을 발견한 뒤로 줄곧 연구를 이어왔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어요. 이젠 다들 씨앗이 이미 죽어서 다시는 싹을 틔우지 못할 거라고 말해요.”
잠시 시무룩한 기색이던 루루는 말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선망의 눈빛을 회복했다.
“선지자이신 건가요? 어떻게 저희 일족의 비밀을 알죠?”
천제현이 선지자일 리가.
그가 알기로 꽃의 엘프들은 먼 훗날 생명의 나무 묘목을 성공적으로 키워낸다. 하지만 생명의 나무 묘목이 등장하면서 자연히 꽃의 엘프들에게까지 쏟아진 관심은 그들 일족을 멸종의 위기까지 몰아간다.
그리고 묘목은 결국 인간의 손에 넘어가지만, 생명의 나무를 키워낼 능력이 없는 인간들은 그 소중한 묘목을 말려 죽이기에 이른다.
이는 후대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자 인간과 엘프 사이의 전쟁을 촉발한 도화선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인간의 승리였으나 후대의 학자들은 인간과 엘프 간의 우호 관계를 끝장내버린 이 사건을 인간 역사의 커다란 오점으로 꼽았다.
여기서 이렇게 꽃의 엘프를 만난 이상 같은 역사가 반복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천제현이 루루에게 말했다.
“나한테 씨앗을 싹틔울 방법이 있어.”
“정말요?”
루루의 목소리가 일순 몇 배나 커졌다.
“어떻게 하는 건데요? 빨리 알려주세요!”
천제현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생명의 나무 씨앗은 죽은 게 아니라 그저 깊은 잠에 빠진 거야. 혼돈시대가 끝난 이후로 대륙에는 생명의 나무가 자랄 만한 토양이 남아 있지 않거든. 꽃의 엘프들이 아무리 공을 들인들 앞으로도 효과는 없을 거란 말이지. 생명의 나무 씨앗을 깨우려면 사실 아공간에 남은 혼돈의 기운만 가지고 나오면 돼. 특별한 방법으로 그 기운을 씨앗에 주입하면 싹이 틀 거야.”
루루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걸…… 그 기운을 어떻게 가지고 나오죠?”
“수준 높은 과학기술이 필요해, 특히 공간기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렵겠는걸.”
천제현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생명의 나무가 싹 트는 걸 못 보고 죽는다니, 너무 아쉽네.”
잠시 뭔가 생각하는가 싶던 루루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 엘프가 당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을게요! 약속해요!”
루루는 말을 마치자마자 창문 밖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눈을 가늘게 뜬 새끼 여우가 비스듬히 주인을 쳐다봤다.
하여튼 여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다룬다니까.
꽃의 엘프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을 떠올린 새끼 여우가 연분홍빛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꽃의 엘프 몇 명만 잡아먹어도 진화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허튼 생각하지 마!”
천제현이 여우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꽃의 엘프는 이곳 엘프들과 긴밀한 사이야. 엘프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어?”
새끼 여우가 콧김을 뿜으며 침을 캭 뱉었다.
내가 더러워서 안 먹고 만다!
사실 새끼 여우도 쪼그마한 꽃의 엘프보다야 생명의 나무에 더 관심이 갔다. 주인이 능글맞기는 해도 능력 하나는 확실하지 않던가. 아까 꽃의 엘프 앞에서 한 말을 생각하면 정말로 생명의 나무를 키워낼지도 몰랐다.
***
며칠 후, 오리디스가 천제현을 데리러 왔다. 엘프 법정이 개정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천제현은 피고인 신분으로 엘프족의 심판을 받게 됐다. 고대 생명수 부족에서 엘프 법정이 열리는 건 무려 삼백 년 만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비비안 공주까지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부족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엘프 법정에 도착한 천제현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그곳은 기괴한 숲의 한가운데였다. 거대한 나무 수십 그루가 사방을 빽빽이 에워싸고 있었다. 하나같이 둘레가 어마어마해서 스무 명은 넘게 달라붙어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층 건물처럼 웅장하게 솟은 나무 사이사이에는 자연적으로 패인 구멍이 있었는데, 그 안은 이미 엘프들로 가득했다. 무성한 나뭇가지 위에도 엘프들이 잔뜩 올라서 있었다.
이 번거롭고도 복잡한 의식은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다.
천제현과 비비안이 앞쪽으로 끌려 나오자 주위를 둘러싼 엘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부족민들 대부분은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꼬마 엘프들은 천제현의 등장에 흥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앞쪽 정중앙, 가장 큰 나무 위에 나이 많은 엘프 한 명을 위시한 생명의 나무 부족 족장들이 서 있었다. 이번 사건의 재판관들인 듯했다.
“이 몸은 엘프의회 부의장 율리시스라 하오!”
나이 많은 엘프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숲과 생명의 신 앞에서 이제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소!”
천제현은 벌써부터 이 재판이 지겨워지려 하고 있었다.
“원고 측 생명의 나무 부족 제3장로 아비숑은 앞으로 나오시오.”
아비숑은 앞으로 걸어 나오는 길에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공주를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가슴이 뜨끔했지만 그는 지금 원고 신분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공주가 더 날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따끔한 교훈을 줄 필요가 있었다.
천제현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느라 죽을 노릇이었다. 수명이 길다고 배때기가 불렀는지 엘프들은 무슨 일이든 꾸역꾸역 시간을 끌었다.
‘대체 언제쯤에나 뭔가가 착착 진행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거지?’
바로 이때, 쿵쿵 거대한 진동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엘프들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본 곳에는 거대한 엔트들이 있었다.
율리시스가 다소 당황스럽다는 듯 물었다.
“존귀한 엔트 일족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꼼짝 않고 보내는 엔트들이 설마 여기까지 재판 구경을 올 줄이야?’
모두가 당황하고 있던 그때 우두머리로 보이는 엔트가 입을 열었다.
“이 인간은 엔트족의 손님이오. 우리의 손님이 그 어떠한 억울한 죄도 덮어쓰는 걸 원치 않소.”
엘프 모두가 멍하니 얼어붙었다. 몇 날 며칠을 동분서주해가며 준비한, 공정하고도 정의로운 이 법정에 갑자기 엔트 무리가 웬 말인가.
“맞아요, 우리가 다 지켜볼 거예요. 무죄로 밝혀지면 더는 괴롭힐 생각 말라고요!”
꽃의 엘프 몇몇이 엔트의 몸에서 날아올랐다.
“천제현은 우리 꽃의 엘프 일족의 손님이기도 하니까!”